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 구당서 토번전(상)- 1)

상 상 2014. 10. 31. 17:4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1)

 

구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196토번열전(吐蕃列傳) 146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번 역 문

원 문

1)토번은 장안 서쪽 8천 리에 있는데, 본래 한()나라 때 서강(西羌)의 땅이다. [토번의] 종족(種落)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혹자는 남량(南涼) 독발이록고의 후예라고 한다. (독발)이록고에게 번니(樊尼)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독발)이록고가 죽었을 때 번니는 아직 어렸으므로, [이록고의] 동생 녹단(傉檀)이 자리를 잇고, 번니를 안서장군에 삼았다. 후위(後魏) 신단 원년(414)에 녹단이 서진(西秦)에게 멸함을 당하자 번니는 나머지 무리를 소집하여 저거몽손에 투항하였고, (저거)몽손은 그를 임송의 태수로 삼았다. (저거)몽손이 멸망하자 번니는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그들은] 황하를 건너고, 적석(積石:적석산)을 넘어, ()의 무리 사이에서 나라를 세우고 강토 천여 리를 개척하였다. 번니는 위엄과 은혜가 이름나서, 많은 강()족에게 사랑 받았으며, [강족] 모두를 은혜와 신실한 믿음으로 위무하니, 그에게 귀의함이 시장에 오는 것 같았다. 마침내 [번니는] ()을 바꿔 솔발야로 하고, 독발(禿髮)로 나라 이름을 삼았는데, [중국어로] 잘못 옮겨 이를 토번(吐蕃)이라 하였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고 침범하기를 그치지 않아 영토가 점차 넓어졌다. 북주와 수()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다른 강족(羌族) 집단과 거리를 두었으며 중국과 통하지도 않았다.

吐蕃在長安之西八千里本漢西羌之地也其種落莫知所出也或云南涼禿髮利鹿孤之後也利鹿孤有子曰樊尼及利鹿孤卒樊尼尚幼弟傉檀嗣位以樊尼為安西將軍後魏神瑞元年傉檀為西秦乞佛熾盤所滅樊尼招集餘眾以投沮渠蒙遜蒙遜以為臨松太守及蒙遜滅樊尼乃率眾西奔濟黃河逾積石於羌中建國開地千里樊尼威惠夙著為羣羌所懷皆撫以恩信歸之如市遂改姓為窣勃野以禿髮為國號語訛謂之吐蕃其後子孫繁昌又侵伐不息土宇漸廣歷周及隋猶隔諸羌未通於中國

2)그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왕을 찬보(贊普)라고 하고, 재상을 대론(大論), 소론(小論)이라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문자가 없어 나무를 깎고 줄을 묶어 약속을 삼았다. 비록 관직은 있었으나, 항상 그 직책을 수행하는 상설직은 아니고 [필요할 때] 임시로 통령하도록 했다. 병사를 모을 때는 금화살을 사용하고, 적이 오면 봉수를 들었으며, 백 리마다 정(:)을 하나씩 두었다. 형벌은 매우 엄하여, 작은 죄에도 눈을 파고 코를 베어내거나 혹은 가죽 채찍으로 채찍질을 하였는데, [집행관의] 감정에 따르니 고정된 법규가 없었다. 죄인을 지하 감옥에 가두는데, 깊이가 여러 장()이고, 2~3년이 지나서야 풀어주었다. 다른 나라의 빈객에게 잔치를 베풀 때는 반드시 리우(犛牛:야크)를 몰아 손님으로 하여금 직접 화살로 맞춰 죽이게 하여 그것으로 음식을 대접하였다. 자신의 신하와는 매년 한번 소맹(小盟)을 거행하면서 양, , 미후(獼猴)를 희생하였는데, 먼저 다리를 자른 뒤 죽이고, 이어 창자를 갈라 도살하고, 무당으로 하여금 천지, 산천, 일월, 성신의 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만약 마음이 변하여 간사함을 품고 배반을 한다면, 신명이 이를 살피시어 저 양과 개처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3년에 한번 대맹(大盟)을 거행하면서 밤중에 단선(壇墠)위에 여럿이 함께 제수를 차리는데, , , , 당나귀를 죽여 희생으로 삼고 주문을 말하기를, “너희 모두는 반드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쳐, 우리 집안을 보위할 것이니, 오로지 천신지지(天神地祗)만이 너희 마음을 모두 알 것이로되, 만약 이 맹세를 배반한다면 너희 신체를 찢어 저 희생처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其國人號其王為贊普相為大論小論以統理國事無文字刻木結繩為約雖有官不常厥職臨時統領徵兵用金箭寇至舉烽燧百里一亭用刑嚴峻小罪剜眼鼻或皮鞭鞭之但隨喜怒而無常科囚人於地牢深數丈二三年方出之宴異國賓客必驅犛牛令客自射牲以供饌與其臣下一年一小盟刑羊狗獼猴先折其足而殺之繼裂其腸而屠之令巫者告于天地山川日月星辰之神云:「若心遷變懷奸反覆神明鑒之同于羊狗。」三年一大盟夜於壇墠之上與眾陳設肴饌殺犬馬牛驢以為牲咒曰:「爾等咸須同心戮力共保我家惟天神地祇共知爾志有負此盟使爾身體屠裂同於此牲。」

 

3)그 땅의 기후는 매우 추워서, 갱도(秔稻:메벼)가 자라지 못하고, 청과맥(靑䴹麥), 노두(䝁豆), 소맥(小麥), 교맥(蕎麥)이 있다. 기르는 짐승 중에 리우(犛牛:야크), 돼지, , , 말이 비교적 많다. 또한 천서(天鼠:박쥐의 일종)가 있는데, 모습이 작서(雀鼠)와 같고, 그 크기가 고양이만하며, 가죽으로 가죽옷을 만들 수 있다. 또한 금, , , ()이 많다. 그 백성 중 혹자는 목축을 하며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성곽이 꽤 많다. 그 나라의 도성을 라사성(邏些城:라싸)이라 부른다. 지붕은 모두 평평하며, 높은 것은 수십 척()에 이른다. 귀인은 대전장(大氊帳)에 거처하는데 이를 불려(拂廬)라고 한다. 잠자리는 매우 더러우며 절대로 머리 빗고 목욕하지 않는다. 맨손으로 손을 모아 술을 마시고, 모전()을 밥상으로 삼으며, 보릿가루를 반죽해서 그릇으로 삼고, [거기에] 갱락(羹酪)을 가득 채워, [그릇까지] 모두 먹는다. 완저(羱羝:야생 숫양)의 신을 많이 섬기고, 또한 사람들은 무격(巫覡)을 믿는 (토번의) 풍속에서 이를 수치스럽다고 하였으니, 이를 죽음 다음가는 것으로 여겼다.

절할 때는 반드시 두 손을 땅에 짚고 개 짖는 소리를 내며 몸을 두 번 구부려 읍한 뒤에 그친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머리카락을 자르고, 청대(靑黛:청흑색 안료)를 얼굴에 바르며, 의복은 모두 검은색을 입다가 장례를 지낸 뒤에야 길복(吉服)으로 갈아입는다. 그 찬보(贊普)가 죽으면 사람으로써 순장을 하는데 평소의 의복, 아끼던 물건 및 타던 말, , 칼 등을 모두 같이 묻는다. 아울러 무덤 위에 큰 집을 짓고, 흙더미를 쌓아 올린 뒤 잡목을 심어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삼는다.

其地氣候大寒不生秔稻有青麥小麥喬麥畜多犛牛猪犬羊馬又有天鼠狀如雀鼠其大如貓皮可為裘又多金銀銅錫其人或隨畜牧而不常厥居然頗有城郭其國都城號為邏些城屋皆平頭高者至數十尺貴人處於大氊帳名為拂廬寢處汙穢絕不櫛沐接手飲酒以氈為盤捻麨為椀實以羹酪并而食之多事羱羝之神人信巫覡不知節候麥熟為歲首圍棋陸博吹蠡鳴鼓為戲弓劍不離身重壯賤老母拜於子子倨於父出入皆少者在前老者居其後軍令嚴肅每戰前隊皆死後隊方進重兵死惡病終累代戰沒以為甲門臨陣敗北者懸狐尾於其首表其似狐之怯稠人廣眾必以徇焉其俗恥之以為次死拜必兩手據地作狗吠之聲以身再揖而止居父母喪截髮青黛塗面衣服皆黑既葬即吉其贊普死以人殉葬衣服珍玩及嘗所乘馬弓劍之類皆悉埋之仍於墓上起大室立土堆插雜木為祠祭之所

4)정관 8(634) 찬보 기종롱찬(송첸감뽀?)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기종)농찬(弄讚)은 약관에 즉위하였으나, 성품이 용맹하고, 재략이 뛰어나, 이웃 나라 양동(羊同)및 여러 강족(羌族)이 공물을 바치고 복종하였다. 태종이 행인(行人:조근, 빙문을 관장하는 관리) 풍덕하를 보내어 위무하게 하니, [농찬은] ()덕하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농찬이] 돌궐 및 토욕혼 모두 [당의] 공주(公主)를 배필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덕하와 함께 입조하게 하면서, 금은보화를 많이 지참하고 표()를 올려 구혼하였으나 태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이 돌아와 (기종)농찬에게 말하길, “처음 대국에 이르렀을 때 저희를 매우 두터이 대하여 공주와의 혼인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토욕혼의 왕이 입조하여, 서로 이간함이 있어, 이로 인해 예절이 박해지고, 마침내 혼인을 불허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기종)농찬은 드디어 양동(羊同)과 연합하여, 병사를 일으켜 토욕혼을 쳤다. 토욕혼은 버티지 못하고, 청해(靑海)의 북쪽으로 도망가서 [토번군의] 예봉을 피했는데, 그 나라의 사람과 가축은 모두 토번에게 약탈되었다. 이때 병사를 전진시켜 당항(党項)및 백란(白蘭)의 여러 강족(羌族)을 쳐부수고, 그 무리 20여 만을 이끌고 송주(松州: 사천성 송반현) 서쪽 경계에 주둔하였다. [이윽고] 사신을 파견하여 금백(金帛)을 바치면서, 와서 공주를 마중한다고 말하고, 또한 그 족속에게 말하길, “만약 대국이 나에게 공주를 시집보내지 않는다면, 나는 곧 침략해 들어갈 것이다.”라고 했다. 드디어 송주로 공격해 들어왔다. 도독 한위는 경기(輕騎)로 적을 살피게 하다가 도리어 패배하여, 변민(邊民)이 크게 걱정했다. 태종은 이부상서 후군집을 당미도 행영대총관으로, 우령군대장군 집실사력을 백란도 행군총관으로, 좌무위장군 우진달을 활수도 행군총관으로, 우령군장군 유란을 조하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보기(步騎) 5만을 이끌고 이를 물리치라 했다. ()진달의 선봉이 송주(松州)로부터 [토번의] 군영을 야습하여 천여 급을 베었다. (기종)농찬이 크게 두려워하며 병사를 이끌고 후퇴하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며 다시 청혼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했다. (기종)농찬은 이에 재상 녹동찬을 보내 극진한 예를 표하면서 금 5천 냥과 별도의 진귀한 물품 수백 건을 진헌하였다.

貞觀八年其贊普棄宗弄讚始遣使朝貢弄讚弱冠嗣位性驍武多英略其鄰國羊同及諸羌並賓伏之太宗遣行人馮德遐往撫慰之見德遐大悅聞突厥及吐谷渾皆尚公主乃遣使隨德遐入朝多賫金寶奉表求婚太宗未之許使者既返言於弄讚曰:「初至大國待我甚厚許嫁公主會吐谷渾王入朝有相離間由是禮薄遂不許嫁。」弄讚遂與羊同連發兵以擊吐谷渾吐谷渾不能支遁於青海之上以避其鋒其國人畜並為吐蕃所掠於是進兵攻破党項及白蘭諸羌率其眾二十餘萬頓於松州西境遣使貢金帛云來迎公主又謂其屬曰:「若大國不嫁公主與我即當入寇。」遂進攻松州都督韓威輕騎覘賊反為所敗邊人大擾太宗遣吏部尚書侯君集為當彌道行營大總管右領軍大將軍執失思力為白蘭道行軍總管左武衞將軍牛進達為闊水道行軍總管右領軍將軍劉蘭為洮河道行軍總管率步騎五萬以擊之進達先鋒自松州夜襲其營斬千餘級弄讚大懼引兵而退遣使謝罪因復請婚太宗許之弄讚乃遣其相祿東贊致禮獻金五千兩自餘寶玩數百事

 

5)정관 15(641) 태종은 문성공주를 그의 처로 삼게 하고, 예부상서· 강하군왕 ()도종(道宗)으로 하여금 혼인을 주관하게 하고, ()을 지니고, 공주를 토번까지 호송하게 했다. (기종)농찬은 그 부하 병사들을 이끌고 백해(柏海: 현재 청해성 마다현)에 머무르다가 하원(河源: 현재 청해호 서남 공화현)에서 친히 맞이하였다. ()도종을 보고, 자서(子壻:아들과 사위?)의 예를 갖춰 매우 공순하였다. 이어 대국의 복식과 예의의 아름다움에 찬탄하고 행동거지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공주와 더불어 귀국하는 길에 친척에게 말하길, “우리 조상들 중에는 상국(上國)과 통혼한 예가 없었는데, 지금 내가 대당(大唐)의 공주를 처로 얻었으니 행운이 진실로 많다고 하겠다. 마땅히 공주를 위하여 성을 쌓고, 후대에 과시해야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성읍(城邑)을 쌓고, 집을 지어 거처하게 했다. 공주가 그 나라 사람들이 얼굴에 붉은 칠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기종)농찬이 온 나라에 명하여 이를 점차 그만두게 하였고, 그 또한 스스로 전구(氈裘)를 벗고 비단옷을 입어 점차 중화의 풍습을 연모하게 되었다. 이윽고 추호(酋豪)의 자제들을 보내 국학(國學)에서 (), ()를 배우게 할 것을 청했다. 또한 중국의 글을 아는 사람을 청하여 표소(表疏)를 담당하게 했다.

貞觀十五年太宗以文成公主妻之令禮部尚書江夏郡王道宗主婚持節送公主於吐蕃弄讚率其部兵次柏海親迎於河源見道宗執子壻之禮甚恭既而歎大國服飾禮儀之美俯仰有愧沮之色及與公主歸國謂所親曰:「我父祖未有通婚上國者今我得尚大唐公主為幸實多當為公主築一城以誇示後代。」遂築城邑立棟宇以居處焉公主惡其人赭面弄讚令國中權且罷之自亦釋氈裘襲紈綺漸慕華風仍遣酋豪子弟請入國學以習詩又請中國識文之人典其表疏

 

6)태종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녹동찬을 보내 경하하게 하고, ()를 받들어 말하길, “성스러운 천자가 사방을 평정하시니, 일월이 비추는 나라는 모두 신하와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멀리 있음을 믿고 신하의 예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천자가 친히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시고, 요하를 건너 토벌하여, 성을 부수고 진을 함락시켜, 짧은 시일에 개선하였습니다. 오랑캐들이 폐하가 출행하였다는 소식을 겨우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러기가 빨리 난다고 하나, 폐하의 빠름에 미치지 못합니다. 소신 사위된 사람으로 보통 오랑캐보다 백배는 더 기쁩니다. 거위는 기러기와 같으니 금으로 거위를 만들어 봉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거위는 황금으로 만들었는데, 높이가 7척이고 안에 술 3()을 담을 수 있었다.

(정관) 22(648) 우위솔부장사 왕현책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천축에 약탈을 당했는데, 토번이 정예 병사를 내어 현책(玄策)과 더불어 천축을 공격하여 대패시키고, 사신을 보내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太宗伐遼東還遣祿東贊來賀奉表曰:「聖天子平定四方日月所照之國並為臣妾而高麗恃遠闕於臣禮天子自領百萬度遼致討隳城陷陣指日凱旋夷狄纔聞陛下發駕少進之間已聞歸國雁飛迅越不及陛下速疾奴忝預子壻喜百常夷夫鵝猶雁也故作金鵝奉獻。」其鵝黃金鑄成其高七尺中可實酒三斛二十二年右衞率府長史王玄策使往西域為中天竺所掠吐蕃發精兵與玄策擊天竺大破之遣使來獻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