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 구당서 토번전(상)- 3)

상 상 2014. 11. 5. 17:3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5, 구당서 토번전()- 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3)

 

구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196토번열전(吐蕃列傳) 146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14)토번에서는 논흠릉 형제가 군사권을 전담하였는데, ()흠릉은 항상 나라 안에서 조정을 맡았고, 여러 동생들은 방향을 나누어 할거하였는데, 찬파가 동쪽을 맡아 중국의 이웃이 되니 30여 년 동안 항상 변경의 근심이 되었다. 그 형제들은 모두 재략이 있어, 여러 토번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했다.

성력 2(699) 찬보 기노실롱이 점차 장성함에 대신 논암(論岩) 등과 더불어 은밀히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당시 ()흠릉이 밖에 있었는데, 찬보가 거짓으로 사냥한다고 하고 병사를 모아, ()흠릉의 수하 2천여 명을 잡아 죽였다. 사신을 보내 ()흠릉, 찬파 등을 불렀으나, ()흠릉은 병사를 일으켜 부름에 응하지 않으니, 찬보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여, ()흠릉은 싸우기도 전에 괴멸되어 드디어 자살하였고, 그 친속과 수하 중에 같은 날 자살한 사람이 백여 명에 달하였다. 찬파 휘하의 천여 명과 형의 아들 망포지 등이 함께 와서 항복하니, 측천(則天)은 우림, 비기를 보내 교외에서 이들을 영접하고, 찬파에게 보국대장군과 행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귀덕군왕에 봉하였으니, 우대함이 매우 두터웠다. 이윽고 찬파로 하여금 그의 부중을 이끌고 홍원곡에서 싸우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죽자, 특진 겸 안서대도호에 추증하였다.

吐蕃自論欽陵兄弟專統兵馬欽陵每居中用事諸弟分據方面贊婆則專在東境與中國為隣三十餘年常為邊患其兄弟皆有才略諸蕃憚之聖曆二年其贊普器弩悉弄年漸長乃與其大臣論巖等密圖之時欽陵在外贊普乃佯言將獵召兵執欽陵親黨二千餘人殺之發使召欽陵贊婆等欽陵舉兵不受召贊普自帥眾討之欽陵未戰而潰遂自殺其親信左右同日自殺者百餘人贊婆率所部千餘人及其兄子莽布支等來降則天遣羽林飛騎郊外迎之授贊婆輔國大將軍行右衞大將軍封歸德郡王優賜甚厚仍令領其部兵於洪源谷討擊尋卒贈特進安西大都護

 

15)구시 원년(700)에 토번이 다시 장수 국망포지를 보내 양주(涼州: 감숙성 무위시)를 노략질하고, 창송현(昌松縣: 감숙성 양주 창송현 동남)을 포위 공격하였다. 농우제군주대사 당휴경과 ()망포지가 홍원곡에서 싸웠는데, [적군의] 부장(副將) 둘을 베고, 이천오백 급을 노획했다.

장안 2(702) 찬보가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실주(悉州)를 노략질하였는데, 도독 진대자가 적군과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천여 급을 참수하였다. 이때 토번에서 사자 논미살 등을 보내어 입조하고 화평을 청하니, 측천은 인덕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궁궐 뜰에서 각종 유희를 연주해 주었다. 논미살이 말하기를, “신이 변경 황량한 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중국 음악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의 친척도 같이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측천이 허락하였다. 이 때 논미살 등이 서로 보고 웃고 기뻐하며 예를 갖춰 감사하기를, “신이 성조(聖朝)에 귀순한 이래 신에게 베푸신 예의가 넓고 두터웠습니다. 또한 신기한 음악을 직접 관람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생 동안 보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보매 저는 미천하고 보잘 것 없으니 어찌 큰 은혜에 응답하겠습니까? 옹색한 마음이지만 오로지 여러분들의 만수무강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다시 사신을 보내 말 천 필과 금 2천 냥을 바치고, 혼인을 청하니 측천이 허락하였다.

久視元年吐蕃又遣其將麴莽布支寇涼州圍逼昌松縣隴右諸軍州大使唐休璟與莽布支戰于洪源谷斬其副將二人獲首二千五百級長安二年贊普率眾萬餘人寇悉州都督陳大慈與賊凡四戰皆破之斬首千餘級於是吐蕃遣使論彌薩等入朝請求和則天宴之於麟德殿奏百戲於殿庭論彌薩曰:「臣生於邊荒由來不識中國音樂乞放臣親觀。」則天許之於是論彌薩等相視笑忭拜謝曰:「臣自歸投聖朝前後禮數優渥又得親觀奇樂一生所未見自顧微瑣何以仰答天恩區區褊心唯願大家萬歲。」明年又遣使獻馬千匹金二千兩以求婚則天許之

 

16)당시 토번 남쪽의 속국 니파라문(오늘날의 네팔) 등이 모두 반란을 일으켜, 찬보가 직접 토벌하러 갔다가 군영에서 죽었다. 여러 아들들이 자리를 두고 오랫동안 다투자 국인(國人)이 기노실롱의 아들 기례축찬을 찬보로 삼았는데 당시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중종 신룡 원년(705)에 토번의 사신이 와서 [찬보의] 죽음을 알리니, 중종이 그를 위해 애도를 표하는 예를 거행하고, 하루 동안 조회를 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보의 할머니가 대신(大臣) 실훈연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그 손자를 위해 청혼하니, 중종은 수양딸인 옹왕(雍王) ()수례의 딸을 금성공주로 봉하여 시집갈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토번은] 매년 공물을 헌상했는데,

경룡 3(709) 11월에 다시 대신(大臣) 상찬토 등을 보내 공주를 맞이하고자 하니, 중종은 이들을 위해 원내 구장에서 연회를 베풀어, 부마도위 양신교로 하여금 토번의 사신과 함께 격구를 하도록 하고, 중종은 근신과 함께 이를 관람하였다.

(경룡) 4(710) 정월에 제()를 내려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교화를 펼 때는 백성을 중심으로 하고, 왕자(王者)가 인정을 베풀 때는 머나먼 변경의 땅도 바깥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능히 천하에 은혜가 미치게 할 수 있고, 만백성을 옳은 길로 이끌 수 있다. 이로써 융성한 주()나라는 역법을 만들어 변방을 회유하는 방도를 넓혔고, 강성한 한()나라는 [적절한] 시기를 이용하여 화친의 논의를 세웠다. 이는 모두 천하를 제어하는 뛰어난 책략이요,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규범이다. 짐이 상제(上帝)에게 명을 받아 대업을 잇고, 선대의 업적과 같기를 도모하여, 영구한 평화를 이룩했다. 저 토번을 살펴보니, 서쪽 변경에 궁벽되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황조(皇朝)가 처음 세워졌을 때 일찍이 조공을 바쳤다. 태종문무성황제께서 덕을 가지런히 천하에 베풀고 온정을 온 백성에게 깊이하실 때 전쟁이 그치기를 바라시어 혼인을 통해 서로 화목하게 하니 수십 년간 온 세상이 평온했다. 문성공주가 그 땅에서 서거한 이래, 이로 인해 변고가 많이 발생하여, 우리 변경에서도 자주 전쟁이 일어났고, 토번의 부락이 피폐하였다는 소식이 자못 들렸다. 근래 찬보와 그의 할머니 가돈 및 추장 등이 누차 신실함을 표시한지 일 년이 되었고, 옛 친분에 의탁하여 진전된 평화를 청하였다. 금성공주는 짐의 딸로, 어찌 어여삐 여기지 않겠는가만,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의 안녕을 바라고 있으니, 만약 [토번의] 진실된 바램을 받아들여 화평이 더욱 돈독해진다면, 변경이 안녕할 것이고 전쟁이 그칠 것이다. 이에 [부모로서의] 깊은 자애를 베여 나라를 위한 대계로 삼고자 하니, 외관(外館)을 축조하여 가례(嘉禮)를 받아들이고, 토번의 찬보에게 하가(下嫁)토록 할 것인즉, [신부는] 이번 달에 출발토록 하고, 짐이 친히 교외까지 환송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중종이 시중 기처눌을 불러 말하기를, “전에 문성공주가 출가할 때 강하왕(江夏王:이도종)이 배웅하였다. 경은 토번의 사정을 잘 알고, 변경을 안정시킬만한 지략이 있으니, 가히 짐을 위해 토번에 파견될 사신으로 임명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처눌이 받들어 감사를 표하고, 이어 변경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고사했다. 황제가 또 중서시랑 조언소를 사신으로 임명했다. ()언소가 외사(外使)로 임명된 뒤, 권세와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기뻐하지 않았는데, 사농경 조리온이 그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공은 나라의 대신인데 일개 사신이 되었으니 보잘 것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니, ()언소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좋은 계책이 있소?”라고 하였다. ()리온이 이에 몰래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밀주(密奏)를 올리고 그를 남게 했다. 이에 좌위대장군 양구가 사신으로 갔다. 그 달에 황제가 시평현(始平縣: 섬서성 흥평현 북쪽)에 나아가 공주를 환송하는데, 백경박(百頃泊: 현재 섬서성 보계시) 근처에 천막으로 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왕공과 재상 및 토번사(吐蕃使)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하는 가운데 주연이 끝날 무렵, [황제가] 토번사를 가까이 오게 한 뒤, 공주의 나이가 어린데도 자애를 끊어 멀리 시집보내는 의도를 [토번사에게] 분명히 밝힌 뒤, 황제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그로 인해 근신에게 시를 지어 송별하게 하였으며, 시평현의 사형 이하 죄수를 특별사면하고, 백성의 부세와 요역을 일 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시평현을 금성현으로 하고, 그 지명을 봉지향 창별리라고 개명하였다. 공주가 토번에 도착하자, 찬보는 별도로 성을 쌓고 그곳에 머물게 했다.

時吐蕃南境屬國泥婆羅門等皆叛贊普自往討之卒於軍中諸子爭立久之國人立器弩悉弄之子棄隸蹜贊為贊普時年七歲中宗神龍元年吐蕃使來告喪中宗為之舉哀廢朝一日俄而贊普之祖母遣其大臣悉薰熱來獻方物為其孫請婚中宗以所養雍王守禮女為金城公主許嫁之自是頻歲貢獻景龍三年十一月又遣其大臣尚贊吐等來迎女中宗宴之於苑內毬場命駙馬都尉楊慎交與吐蕃使打毬中宗率侍臣觀之四年正月制曰聖人布化用百姓為心王者垂仁以八荒無外故能光宅遐邇裁成品物由是隆周理曆恢柔遠之圖強漢乘時建和親之議斯蓋御宇長策經邦茂範朕受命上靈克纂洪業庶幾前烈永致和平睠彼吐蕃僻在西服皇運之始早申朝貢太宗文武聖皇帝德侔覆載情深億兆思偃兵甲遂通姻好數十年間一方清淨自文成公主往化其國因多變革我之邊隅亟興師旅彼之蕃落頗聞彫弊頃者贊普及祖母可敦酋長等屢披誠款積有歲時思託舊親請崇新好金城公主朕之少女豈不鍾念但為人父母志息黎元若允乃誠祈更敦和好則邊土寧晏兵役服息遂割深慈為國大計築茲外館聿膺嘉禮降彼吐蕃贊普即以今月進發朕親自送于郊外

中宗召侍中紀處訥謂曰:「昔文成公主出降則江夏王送之卿雅識蕃情有安邊之略可為朕充吐蕃使也。」處訥拜謝既而以不練邊事固辭上又令中書侍郎趙彥昭充使彥昭以既充外使恐失其權寵殊不悅司農卿趙履溫私謂之曰:「公國之宰輔而為一介之使不亦鄙乎?」彥昭曰:「然計將安出?」履溫因陰託安樂公主密奏留之於是以左衞大將軍楊矩使焉其月帝幸始平縣以送公主設帳殿於百頃泊側引王公宰相及吐蕃使入宴

中坐酒闌命吐蕃使進前諭以公主孩幼割慈遠嫁之旨上悲泣歔欷久之因命從臣賦詩餞別曲赦始平縣大辟罪已下百姓給復一年改始平縣為金城縣又改其地為鳳池鄉愴別里公主既至吐蕃別築一城以居之

 

17) 예종이 즉위하자(710), 섭감찰어사 이지고가 주()를 올려 말하기를, “요주(姚州: 운남성 요안현)의 여러 오랑캐는 앞서 토번에 복속되었으니 군사를 내어 이를 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지고에 명하여 검남의 병사를 징발하여 그들을 경략하라 하였다. 오랑캐의 추장 방명(傍名)은 이에 토번을 끌어들여 ()지고를 공격하여 죽이고, 이어 그 시신을 절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당시 장현표가 안서도호였고, 토번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서로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토번은 내심 원망하고 분노하였으나 밖으로는 우호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이때 양구가 선주도독으로 부임하자, 토번은 사신을 보내 많은 물품을 주고, 이로 인하여 하서구곡의 땅을 금성공주의 봉지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에 ()()가 상주하였고, 구곡(九曲)을 주었다. 토번이 이미 구곡을 얻었는데, 그 땅은 비옥하며, 병사를 주둔시키고 목축을 할 만하였고, 또한 당()의 국경과 가까웠으므로 이때부터 다시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睿宗即位攝監察御史李知古上言:「姚州諸蠻先屬吐蕃請發兵擊之。」遂令知古徵劍南兵募往經略之蠻酋傍名乃引吐蕃攻知古殺之仍斷其屍以祭天時張玄表為安西都護又與吐蕃比境互相攻掠吐蕃內雖怨怒外敦和好時楊矩為鄯州都督吐蕃遣使厚遺之因請河西九曲之地以為金城公主湯沐之所矩遂奏與之吐蕃既得九曲其地肥良堪頓兵畜牧又與唐境接近自是復叛始率兵入寇

18) 개원 2(714) 가을에 토번의 대장 분달언, 걸력서 등이 무리 십여 만을 이끌고 와서, 임조군(臨洮軍)을 침략하고, 다시 난주(蘭州: 감숙성 고란현)와 위주(渭州: 감숙성 농서현) 등지로 전진하여, 관아에서 기르던 양과 말을 빼앗아 갔다. 양구는 분하고 두려워 약을 먹고 죽었다. 현종은 섭좌우림장군 설눌과 태복소경 왕준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격퇴하게 하였다. 또한 조()를 내려 장차 크게 친정할 뜻을 밝히고, 장수와 사졸들을 소집하고 날을 정해 진군하고자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 등이 위원(渭源: 감숙성 위원현)의 무계역(武階驛: 위주의 서쪽 경계)에서 적과 만났는데, 전군(前軍) 왕해빈(王海賓)은 힘써 싸우다 죽었으나, ()() 등이 병사를 이끌고 전진하여 토번의 무리를 크게 파하고 수만 명을 죽였으며, 약탈당한 양과 말을 다시 찾아왔다. 적의 잔당은 북쪽으로 도망갔는데 시신이 종횡으로 쌓였고, 이로 인해 조수(洮水)가 흐르지 않았다. 이에 황상(皇上)이 친정을 파하고, 자미사인 예약수를 보내 전쟁의 결과와 공훈 등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어 [예약수는] 왕해빈의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토번은 대신 종아인자(宗俄因子)를 조하(洮河)에 보내 사망한 병사를 제사지내고, 이어 화평하기를 청했으나 황상(皇上)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매년 국경을 침범하니 곽지운(郭知運)과 왕군착(王君㚟)이 차례로 하서절도사가 되어 이를 막았다.

開元二年秋吐蕃大將蚠達焉乞力徐等率眾十餘萬寇臨洮軍又進寇蘭渭等州掠監牧羊馬而去楊矩悔懼飲藥而死玄宗令攝左羽林將軍薛訥及太僕少卿王晙率兵邀擊之仍下詔將大舉親征召募將士克期進發俄而晙等與賊相遇於渭源之武階驛前軍王海賓力戰死之晙等率兵而進大破吐蕃之眾殺數萬人盡收得所掠羊馬賊餘黨奔北相枕藉而死洮水為之不流上遂罷親征命紫微舍人倪若水往按軍實仍弔祭王海賓而還吐蕃遣其大臣宗俄因子至洮河祭其死亡之士仍款塞請和上不許之自是連年犯邊郭知運王君相次為河西節度使以捍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