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7, 구당서 토번전(상)- 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5) ※ 구당서 토번전(상)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卷196上 토번열전(吐蕃列傳) 第146上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23) 당시 토번의 사신이 주를 올려 말하기를, “[금성] 공주가 『모시(毛詩)』, 『예기(禮記)』, 『좌전(左傳)』, 『문선(文選)』 각 한 부씩을 청합니다.”라고 하니, 황상이 비서성에 명하여 베껴서 주도록 했다. 정자(正字) 우휴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신이 듣기에 융적(戎狄)은 나라의 적이며, 경적(經籍)은 나라의 전범입니다. 오랑캐가 딴 마음을 먹는 데에 방비함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전적(典籍)에는 항상 바뀌지 않는 제도가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좌전』에 이르기를, ‘예(裔)가 하(夏)를 도모해서는 안 되며, 이(夷)가 중화를 어지럽힐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들의 나쁜 마음을 바로 잡는 바는 유비무환에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동평왕이 입조하여, 『사기(史記)』 「제자(諸子)」를 구했으나, 한(漢)나라 황제가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기』에는 군사를 쓰는 전략, 전술이 많고, 「제자」에는 상대방을 속이는 계략이 잡다하기 때문입니다. 동평왕은 한나라의 종친인데도, [한나라의 황제는] 병서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융은 나라의 적이자 원수이니 어찌 가히 경전을 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이 듣기에 토번의 천성은 빠르고 사나우며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고, 기민하고 날카로우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나태하지 않다고 합니다. 만약 서적에 통달하게 된다면 반드시 능히 전략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시경』에 정통하게 되면, 무사가 군대의 방어에 유효함을 알게 될 것이며, 『예기』에 정통하게 되면 「월령(月令)」에 군대를 일으키고 해산시킴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며, 『좌전』에 익숙해지면 군대를 부림에 서로 기만하는 계략이 많음을 알게 될 것이며, 『문선(文選)』에 정통하게 되면 통신에 서격(書檄)의 제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니, 어찌 도적에게 병마를 빌려 주고 양식을 대주는 것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노(魯)나라가 주(周)나라의 예를 가지고 있어 제(齊)나라가 쳐들어오지 못했으며, 오(吳)나라가 승거(乘車)를 얻자 초(楚)나라가 이에 대응하느라 피로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전적을 지켜 나라를 보존했고, 다른 하나는 법을 해쳐서 나라를 위태롭게 했으니 가히 참고할 만합니다. 공주가 지체 낮은 종인(從人)에게 시집을 가서 이국땅 먼 곳에서 이례(夷禮)를 모방하게 되었는데 도리어 좋은 전적을 구한다 하니, 우매한 신의 생각으로 이는 아마도 공주의 본의가 아닐 듯합니다. 아마도 패배하여 도망가는 무리가 그 가운데에서 공주에게 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토번의 인정을 잃을까 걱정하여 나라의 신의를 갖추려 한다면 반드시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청컨대 『춘추(春秋)』는 빼고 주십시오. 당시 주나라의 덕이 쇠하자 제후가 강성해져 예악(禮樂)을 스스로 만들고, 전란이 교대로 일어나니, 거짓됨이 여기서 생겨났으며, 기만함이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즉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일이 생기고 힘으로 패자의 이름을 얻고자 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을 주신다면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좌전』에 이르기를, ‘우해(于奚)가 곡현(曲縣)과 반영(鞶纓)을 청하자,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아깝구나, 봉읍을 많이 주는 편이 낫겠다. 명(名)과 기(器)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狄)은 본래 탐욕스러운데, 재화를 귀하게 여기고 토지를 가볍게 여기니, 금기(錦綺)를 내려 주시고 옥백(玉帛)을 후하게 주면 될 일이지, 하필 그들의 요구에 따라 지혜를 보태주려 하십니까! 신이 관직을 더럽히고 있으나 직분이 귀한 서적을 간행하는 일이니, 경전을 오랑캐에게 버리는 것을 실로 원통하게 여깁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오직 폐하께서 통찰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그의 상소는 채택되지 않았다. [개원] 21년(733), 공부상서 이호(李暠)를 토번에 보내 방문하게 했는데, 매번 당나라 사신이 변경에 들어오면 도착한 곳에 갑병(甲兵) 및 기마를 성대하게 늘어놓고, 그 정예를 자랑했다. [개원] 22년(734), 장군 이전(李佺)을 적령(赤嶺)에 보내 토번과 함께 국경을 나누고 비석을 세웠다. [개원] 24년(736) 정월에 토번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로 금은으로 만든 수백 점의 물건을 바쳤는데, 그 모양이 모두 기이했다. 황상이 제상문(提象門) 밖에 늘어놓게 하고 모든 신료들에게 보였다. | 時吐蕃使奏云:「公主請毛詩、禮記、左傳、文選各一部。」制令祕書省寫與之。正字于休烈上疏請曰: 臣聞戎狄,國之寇也;經籍,國之典也。戎之生心,不可以無備;典有恆制,不可以假人。傳曰:「裔不謀夏,夷不亂華。」所以格其非心,在乎有備無患。昔東平王入朝求史記、諸子,漢帝不與。蓋以史記多兵謀,諸子雜詭術。夫以東平,漢之懿戚,尚不欲示征戰之書;今西戎,國之寇讎,豈可貽經典之事!且臣聞吐蕃之性,慓悍果決,敏情持銳,善學不迴。若達於書,必能知戰。深於詩,則知武夫有師干之試;深於禮,則知月令有興廢之兵;深於傳,則知用師多詭詐之計;深於文,則知往來有書檄之制。何異借寇兵而資盜糧也!臣聞魯秉周禮,齊不加兵;吳獲乘車,楚疲奔命。一以守典存國,一以喪法危邦,可取鑒也。且公主下嫁從人,遠適異國,合慕夷禮,返求良書,愚臣料之,恐非公主本意也。慮有奔北之類,勸教於中。若陛下慮失蕃情,以備國信,必不得已,請去春秋。當周德既衰,諸侯強盛,禮樂自出,戰伐交興,情偽於是乎生,變詐於是乎起,則有以臣召君之事,取威定霸之名。若與此書,國之患也。傳曰:「于奚請曲縣鞶纓,仲尼曰:『惜也,不如多與之邑。惟名與器,不可假人。』」狄固貪婪,貴貨易土,正可錫之錦綺,厚以玉帛,何必率從其求,以資其智。臣忝叨列位,職刊祕籍,實痛經典,棄在戎夷。昧死上聞,惟陛下深察。疏奏不省。二十一年,又制工部尚書李暠往聘吐蕃,每唐使入境,所在盛陳甲兵及騎馬,以矜其精銳。二十二年,遣將軍李佺於赤嶺與吐蕃分界立碑。二十四年正月,吐蕃遣使貢方物金銀器玩數百事,皆形制奇異。上令列於提象門外,以示百僚。 | 24)그 해에(736년) 토번이 서쪽으로 가서 발률(勃律)을 공격하자 [발률에서] 사신을 보내 급함을 알리니, 황상이 사신을 토번에 파견하여 군대를 멈출 것을 명령하였다. 토번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어이 발률국을 공격하니 황상이 매우 노했다. 당시 산기상시 최희일(崔希逸)을 하서절도사로 삼아 양주(涼州)에서 지키게 했다. 당시 토번에서는 나무 울타리로 중국과 경계를 삼고 수착사(守捉使: 당대 변경의 군대는 그 규모에 따라, 큰 것은 군-軍, 규모가 작은 것은 수착-守捉이라고 했다. 수착사-守捉使는 수착의 지휘관을 이르는 말이다.)를 두었다. (최)희일이 토번 장군 걸력서에게 말하길, “양국이 화평한데 왜 하필 수착을 두어 백성의 농사를 방해합니까? 청컨대 모두 파해서 한 집안을 이루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걸력서가 회답하여 말하길, “상시(常侍)께서는 충심이 두터우시니 반드시 진실된 말씀일 것입니다. 다만 조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서로를 신임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지 걱정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원수를 맺어 우리의 방비하지 않음을 틈타 넘어온다면 후회해도 무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희일이 고집스럽게 청하니, 드디어 사신을 파견하여 걸력서와 함께 백구(白狗)를 죽여 결맹하고 각기 수비를 철거했다. 이때 토번에서 목축하는 짐승이 들에 가득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일의 겸인(傔人) 손회(孫誨)가 입조하여 주를 올렸는데 회는 스스로 공을 취하고자 하였고, 그로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토번에는 방비가 없으니 만약 군사를 내어 그 틈을 타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상이 내급사 조혜종(趙惠琮)과 손회로 하여금 급히 가서 일의 마땅함을 관찰하게 했다. 혜종 등이 양주에 이른 후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희일로 하여금 토번을 엄습하게 했는데, 희일은 하는 수 없이 이를 따랐다. 토번을 청해(靑海)의 위쪽에서 크게 파하고 죽이고 포로로 잡기를 매우 많이 하였고, [이에 토번 장수] 걸력서는 몸을 가볍게 하여 도주했다. 혜종과 손회는 모두 후한 상을 받았으며, 토번은 이때부터 다시 조공을 끊었다. 희일은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섭섭하고 기쁘지 않았으며, 군대에서도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남윤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서울(장안)에 이르러 조혜종과 함께 백구가 귀신이 되어 괴롭히는 것을 보고, 서로 잇달아 죽었다. 손회 역시 죄를 받아 주륙되었다. [황상께서] 조를 내려 기주자사 소경(蕭炅)을 호부시랑 판양주사로 임명하고, (최)희일을 대신하여 하서절도사로 삼고, 선주도독 두희망(杜希望)을 농우절도사로, 태복경 왕욱(王昱)을 익주장사 검남절도사로 삼아 길을 나누어 경략하여 토번을 토벌하게 했다. 이윽고 경계를 표시한 비석을 훼손하게 했다. | 其年,吐蕃西擊勃律,遣使來告急,上使報吐蕃,令其罷兵。吐蕃不受詔,遂攻破勃律國,上甚怒之。時散騎常侍崔希逸為河西節度使,於涼州鎮守。時吐蕃與漢樹柵為界,置守捉使。希逸謂吐蕃將乞力徐曰:「兩國和好,何須守捉,妨人耕種。請皆罷之,以成一家,豈不善也?」乞力徐報曰:「常侍忠厚,必是誠言。但恐朝廷未必皆相信任。萬一有人交搆,掩吾不備,後悔無益也。」希逸固請之,遂發使與乞力徐殺白狗為盟,各去守備。於是吐蕃畜牧被野。俄而希逸傔人孫誨入朝奏事,誨欲自邀其功,因奏言「吐蕃無備,若發兵掩之,必克捷」。上使內給事趙惠琮與孫誨馳往觀察事宜。惠琮等至涼州,遂矯詔令希逸掩襲之,希逸不得已而從之,大破吐蕃於青海之上,殺獲甚眾,乞力徐輕身遁逸。惠琮、孫誨皆加厚賞,吐蕃自是復絕朝貢。希逸以失信怏怏,在軍不得志,俄遷為河南尹,行至京師,與趙惠琮俱見白狗為祟,相次而死。孫誨亦以罪被戮。詔以岐州刺史蕭炅為戶部侍郎判涼州事,代希逸為河西節度使;鄯州都督杜希望為隴右節度使;太僕卿王昱為益州長史、劍南節度使,分道經略,以討吐蕃。仍令毀其分界之碑。 | 25) [개원] 26년(738) 4월에 두희망이 무리를 이끌고 토번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를 위무군(威武軍: 청해호와 적령 사이에 있었다.)이라 하였으며, 병사 천 명으로 이를 지키게 했다. 또한 그 해 7월에 (두)희망이 선주(鄯州)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토번 하교(河橋)를 침범하고, (황)하(河)의 왼쪽에 염천성을 쌓았다. 토번이 군인 3만 명으로 관군(당나라군)에 대항했는데, (두)희망이 무리를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고, 이로 인해 염천성에 진서군(鎭西軍)을 두었다. 당시 왕욱은 또 검남에서 불러 모은 군사를 이끌고 안융성(安戎城: 사천성 무현의 서남에 위치)을 공격했다. [그는] 먼저 안융성 좌우에 두 개의 성을 쌓아 공격과 수비의 장소로 삼고, 봉파령(蓬婆嶺: 사천성 무현의 서북 약 100리 지점에 위치) 아래에 주둔한 뒤 검남도의 물자와 양식을 운반하여 이를 지키게 했다. 그 해 9월에 토번이 정예 군사를 모두 모아 안융성을 구원하니, 관군이 대패하고 두 성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왕)욱은 몸을 빼내어 달아났으나, 장사(將士) 이하 수만 명 및 군량, 군수품 등이 모두 적의 손에 넘어갔다. (왕)욱은 죄를 입어 괄주자사로 좌천되었다. 당초 (왕)욱이 군대에 있을 때 그릇되이 그 자식에게 준 재물이 만 개를 상회하였고, 아울러 마음대로 자포(紫袍) 등을 주어 수 만을 낭비하였으니 이 때문에 다시 벌을 받아 단주(端州) 고요(高要: 광동성 고요현)의 위(尉)로 재차 좌천되었다가 죽었다. | 二十六年四月,杜希望率眾攻吐蕃新城,拔之,以其城為威戎軍,發兵一千以鎮之。其年七月,希望又從鄯州發兵奪吐蕃河橋,於河左築鹽泉城。吐蕃將兵三萬人以拒官軍,希望引眾擊破之,因於鹽泉城置鎮西軍。時王昱又率劍南兵募攻其安戎城。先於安戎城左右築兩城,以為攻拒之所,頓兵於蓬婆嶺下,運劍南道資粮以守之。其年九月,吐蕃悉銳以救安戎城,官軍大敗,兩城並為賊所陷,昱脫身走免,將士已下數萬人及軍糧資仗等並沒于賊。昱坐左遷括州刺史。初昱之在軍,謬賞其子錢帛萬計,并擅與紫袍等,所費鉅萬,坐是尋又重貶為端州高要尉而死。 | 26) [개원] 27년(739) 7월에 토번이 다시 백초군(白草軍: 선주 서북 약 230리 지점), 안인군(安人軍: 하원군 서쪽 성숙천 변에 있었다. 하원군은 선주 서쪽에 위치) 등을 침범하니, [황상이] 임조(臨洮), 삭방 등 군(軍)에 명령을 내려 병사를 나누어 구원하도록 했다. 당시 토번은 중로(中路)에서 둔병하여 임조군의 길을 끊었다. 백수군 수착사 고간우(高柬于)로 하여금 수십 일을 막아 지키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물러나자 소경(蕭炅)이 편장(偏將)을 보내 그 배후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왕욱(王昱)이 패배한 뒤 [황제가] 조를 내려, 화주자사 장유(張宥)를 익주장사 겸 검남방어사로 삼고, 주객원외랑 장구겸경(章仇兼瓊)을 익주사마 겸 방어부사로 삼았다. 장유는 문관이었기 때문에 본디 병법에 무지했으므로, 겸경이 마침내 군사에 관한 일을 전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겸경이 주를 올려 안융(安戎)을 공격하여 취할 계책을 상세히 말하자 황상이 매우 기뻐하며, 장유를 광록경으로 옮기고, 겸경으로 하여금 지익주장사사를 맡게 하였으며, 장유의 군수권을 [겸경이] 대신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직접 안융성을 취할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 | 二十七年七月,吐蕃又寇白草、安人等軍,敕臨洮、朔方等軍分兵救援。時吐蕃於中路屯兵,斷臨洮軍之路。白水軍守捉使高柬于拒守連旬,俄而賊退,蕭炅遣偏將掩其後,擊破之。王昱既敗之後,詔以華州刺史張宥為益州長史、劍南防禦使,主客員外郎章仇兼瓊為益州司馬、防禦副使。宥既文吏,素無攻戰之策,兼瓊遂專其戎事。俄而兼瓊入奏,盛陳攻取安戎之策,上甚悅,徙張宥為光祿卿,拔兼瓊令知益州長史事,代張宥節度,仍為之親畫取城之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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