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8, 구당서 토번전(상)- 6)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6) ※ 구당서 토번전(상)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卷196上 토번열전(吐蕃列傳) 第146上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27) [개원] 28년(740) 봄, (장구)겸경(兼瓊)이 안융성 안의 토번 적도국(翟都局) 및 유주(維州: 사천성 고위주-故威州 북쪽) 별가(別駕) 동승연(董承宴) 등과 몰래 공모하여, (적)도국 등이 성을 넘어 귀부하자 이를 기회로 관군을 끌어들여 입성하고, 토번 병사들을 모두 죽인 뒤, 감찰어사 허원(許遠)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지키게 하였다. 황상이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중서령 이림보(李林甫) 등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컨대 토번에게 이 성은 요충이니, [지세가] 험함에 기대어 견고하며, [토번은] 이를 통해 변경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적병이] 개미처럼 모이는 것이 근심이었고, 백만의 병사로도 공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비책을 내시어,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근래 중사(中使) 이사경(李思敬)으로 하여금 강족(羌族)을 깨우치게 하니, [강족이 황상의] 은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고, 결연히 뜻을 바꾸어 스스로 서로 음모로써 함락되게 하였습니다. [황상께서] 신산(神算)을 운용하심이 예측할 수 없고, [황상의] 예략(睿略)은 미래에 통해 있으니, 여러 해 동안 잡아 베던 일이 하루아침에 평정되었습니다. 또한 신들이 금일 주를 올림에, 폐하께서 침착하고 차분히 신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경들은 사방의 오랑캐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 멸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폐하의 덕이 떨쳐지자마자 바로 오랑캐와의 승전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런 즉 성상(聖上)께서 하늘과 합하시어 서로 마주함이 아름다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 것과 같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백관에게 마땅히 보이시고 역사책에 수록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황상이] 친히 제(制)를 내려 답하시기를, “이 성은 의봉(儀鳳) 연간에 강족이 토번을 끌어들여 굳게 지킨 지 오래되었으며, 그간 공격한 일도 많았다. 그 땅이 매우 험하여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조정의 여러 신료들이 의논하기를 이를 취하기 합당치 않다고 했다. 짐이 저 소번(小蕃)의 무지함을 알고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고자 기묘한 계책을 내어 이를 행했다. 이에 저 오랑캐의 마음을 얻어 우리 쪽으로 귀부시키고 성을 지키게 한다면 족히 안정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해 10월 토번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안융성 및 유주를 침략했는데, 장구겸경이 비장(裨將)을 보내 이를 막게 하고, 이어 관중(關中)의 확기(彍騎)를 보내 구원하게 했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적이 오랫동안 머물다가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후퇴했다. [황상이] 조를 내려 안융성을 평융성으로 고쳤다. | 二十八年春,兼瓊密與安戎城中吐蕃翟都局及維州別駕董承宴等通謀,都局等遂翻城歸款,因引官軍入城,盡殺吐蕃將士,使監察御史許遠率兵鎮守。上聞之甚悅。中書令李林甫等上表曰:「伏以吐蕃此城,正當衝要,憑險自固,恃以窺邊。積年以來,蟻聚為患,縱有百萬之眾,難以施功。陛下親紆祕策,不興師旅,頃令中使李思敬曉喻羌族,莫不懷恩,翻然改圖,自相謀陷。神算運於不測,睿略通於未然,累載逋誅,一朝蕩滅。又臣等今日奏事,陛下從容問臣等曰:『卿等但看四夷不久當漸摧喪。』德音纔降,遂聞戎捷。則知聖與天合,應如響至,前古以來,所未有也。請宣示百僚,編諸史策。」手制答曰:「此城儀鳳年中羌引吐蕃,遂被固守,歲月既久,攻伐亦多。其地險阻,非力所制。朝廷羣議,不合取之。朕以小蕃無知,事須處置,授以奇計,所以行之,獲彼戎心,歸我城守,有足為慰也。」其年十月,吐蕃又引眾寇安戎城及維州,章仇兼瓊遣裨將率眾禦之,仍發關中彍騎以救援焉。時屬凝寒,賊久之自引退。詔改安戎城為平戎城。 | 28) [개원] 29년(741) 봄에 금성공주가 사망하자, 토번에서 사신을 보내 부고를 전하고 화의를 청하였으나 황상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이 도착한 지 수 개월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주를 위해 광순문 밖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고,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6월에 토번의 40만 대군이 승풍보를 공격하여 하원군(河源軍: 선성 서쪽 120리 지점 토루산에 있다)에 이른 뒤 서쪽으로 장녕교로 들어가 안인군(安仁軍: 하원군의 서쪽 120리에 있는 성숙천 부근에 있다.)에 이르렀는데, 혼애봉(渾崖峰)의 기장(騎將) 성희액이 무리 5천 명으로 공격하여 격파했다. 12월에 토번이 다시 석보성(石堡城: 적령, 즉 현재 일월산의 남동쪽에 위치했다)을 습격했는데, 절도사 개가운이 지키지 못해 현종이 분노했다. 천보 초(742년 경)에 황보유명과 왕충사를 [차례로] 농우절도에 임명했는데 모두 이기지 못했다. [천보] 7년(748)에 가서한(哥舒翰)을 농우절도사로 삼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석보성을 신무군(神武軍)으로 고쳤다. | 二十九年春,金城公主薨,吐蕃遣使來告哀,仍請和,上不許之。使到數月後,始為公主舉哀於光順門外,輟朝三日。六月,吐蕃四十萬攻承風堡,至河源軍,西入長寧橋,至安仁軍,渾崖峯騎將盛希液以眾五千攻而破之。十二月,吐蕃又襲石堡城,節度使蓋嘉運不能守,玄宗憤之。天寶初,令皇甫惟明、王忠嗣為隴右節度,皆不能克。七載,以哥舒翰為隴右節度使,攻而拔之,改石堡城為神武軍。 | 29) 천보 14년(755)에 찬보 걸려소롱렵찬이 죽으니 대신들이 그 아들 파실롱렵찬을 주상(主上)으로 삼고, 다시 찬보라 하였다. 현종(玄宗)이 경조소윤 최광원을 어사중승에 겸하게 하여, 절(節)과 책(冊)을 가지고 조문하게 했다. [최광원이 토번에서] 돌아오니 안록산이 낙양을 훔쳐 점거하고 있었는데, [황상이] 하서와 농우에서 병사를 모으고 가서한을 장군으로 삼아 동관(潼關: 현재 위남시 동쪽에 동관이 있다)에서 주둔하게 했다. | 天寶十四載,贊普乞黎蘇籠獵贊死,大臣立其子婆悉籠獵贊為主,復為贊普。玄宗遣京兆少尹崔光遠兼御史中丞,持節賫國信冊命弔祭之。及還,而安祿山已竊據洛陽,以河、隴兵募令哥舒翰為將,屯潼關。 | 30) 옛날에 진(秦)나라가 농산(隴山: 육반산의 남쪽 끝 부분을 농산이라고 한다) 이서를 농서군(隴西郡)이라 했다. 한(漢)나라는 흉노를 하우(河右)에서 회유하고, 고장(姑臧: 감숙성 무위현), 장액, 주천, 이오(伊吾: 하미-哈密 뜻한다) 등 군(郡)을 두었다. 또한 사막밖에 서역도호를 두어 오랑캐의 나라들을 회유하게 했고, 농서(隴西)를 나누어 금성군, 서평군으로 하여, 저(氐), 강(羌)이 섞여 살게 했다. [이곳은] 역대 전란 중에 현자와 호걸에게 점거되든지,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먼 오랑캐에게 침탈되기를 반복하여, 그것이 천여 년에 이르렀다. 무덕 초년(618년 경)에 설인고(薛仁杲)가 농(隴) 윗쪽의 땅을 점유하여, 하(河: 황하)의 오랑캐에 이르렀고, 이부(李敷)가 양주(涼州) 일대를 다 가지고 사막 밖과 통했다. 정관 연간에 이정(李靖)이 토욕혼을 격파하고, 후군집이 고창을 평정하였으며, 아사나사이가 서역을 열고 4개의 진(鎭)을 두었다. 앞선 시대의 황제가 복속시키지 못했던 것을 모두 신하로 만들었으니, 진과 한나라의 강역에서 우리 영토의 경계를 논할 수 있겠는가! 이 때 매년 산동(山東)의 정남(丁男)을 징발하여 병졸로 삼고, 증백(繒帛)을 군대의 자금으로 삼았으며, 둔전을 두어 군량을 조달하게 하고, 목사(牧使)를 두어 양과 말을 번식하게 하였다. 대군(大軍)은 만 명, 소군(小軍)은 천 명으로 하였고, 봉화와 초소를 지키는 병졸들이 만 리를 이어 강적을 물리치게 했다. 농우, 선주에 절도사를 두고, 하서, 양주에 절도사를 두었으며, 안서, 북정에 또한 절도사를 두고, 관내(關內)에는 영주(靈州: 영하성 영무현 북쪽)에 삭방절도사를 두었고, 또한 수항성(受降城), 선우도호정을 두어 울타리가 되게 했다. 동관에서 지킴을 잃었을 때 하락(河洛)에서 병사를 막았고, 이 때 하롱(河隴)과 삭방에서 징발된 장수와 진(鎭)의 병사들이 들어와 국난을 평정했으니, 이를 일러 행영(行營)이라 하였다. 이전의 군영과 변방의 주(州)에는 방비가 없었다. 건원(758~759년) 이후 토번이 우리의 내분을 틈 타 매일 변성에 가까이 와서 혹은 노략질하고 살상하였으며, 혹은 시체가 구덩이를 전전하였다. 수년 이후 봉상(鳳翔: 섬서성 봉상현) 이서와 빈주(邠州: 섬서성 빈현) 이북이 모두 토번과 북방 오랑캐 융적의 국경이 되었으니 토번과 융적의 강토가 된 것이 수십 주(州)에 이르렀다. | 昔秦以隴山已西為隴西郡。漢懷匈奴於河右,置姑臧、張掖、酒泉、伊吾等郡;又於磧外置西域都護,控引胡國;又分隴西為金城、西平等郡,雜以氐、羌居之。歷代喪亂,不為賢豪所據,則為遠夷侵廢,迨千年矣。武德初,薛仁杲奄有隴上之地,至於河虜;李軌盡有涼州之域,通於磧外。貞觀中,李靖破吐谷渾,侯君集平高昌,阿史那社爾開西域,置四鎮。前王之所未伏,盡為臣妾,秦、漢之封域,得議其土境耶!於是歲調山東丁男為戍卒,繒帛為軍資,有屯田以資糗糧,牧使以娩羊馬。大軍萬人,小軍千人,烽戍邏卒,萬里相繼,以却於強敵。隴右鄯州為節度,河西涼州為節度,安西、北庭亦置節度,關內則於靈州置朔方節度,又有受降城、單于都護庭為之藩衞。及潼關失守,河洛阻兵,於是盡徵河隴、朔方之將鎮兵入靖國難,謂之行營。曩時軍營邊州無備預矣。乾元之後,吐蕃乘我間隙,日蹙邊城,或為虜掠傷殺,或轉死溝壑。數年之後,鳳翔之西,邠州之北,盡蕃戎之境,湮沒者數十州。 | 31) 숙종 지덕 원년(756) 정월 갑진일에 토번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고 강화하길 청했는데, 재상 곽자의(郭子儀), 소화, 배준경 등에게 칙유를 내려 중서성에서 연회를 베풀도록 했다. 장차 광택시(光宅寺)에 이르러 맹서를 할 때 [토번의] 사신이 말하기를, “토번의 법에 맹서를 할 때는, 세 가지 희생의 피를 취해서 마시고, 불사(佛寺)의 일을 없게 합니다. 청컨대 내일 반드시 홍려시(鴻臚寺: 외빈의 접대, 의전을 담당했던 기구)에서 피를 취하여 마심으로써 토번의 예를 행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보응 원년(762) 6월에 토번의 사신 촉번과 망이 등 두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고 입조하자, 이때 [황상이] 연영전에서 만나 노고를 위로하며 하사하기를 각각 차등이 있게 했다. 검남의 서산(西山) 또한 토번, 저족, 강족 등과 인접했는데, 무덕(618~626년) 이래, 주현(州縣)을 열고, 군대가 방어하게 했으니, 이것이 한(漢)나라의 착로(笮路)로, 건원(758~760년) 이후 토번에 함락되었다. 보응 2년(763) 3월에 좌산기상시 겸 어사대부 이지방, 좌서자 겸 어사중승 최륜을 사신으로 토번에 보냈는데 이들은 국경에 도착한 뒤 억류되었다. | 肅宗元年建寅月甲辰,吐蕃遣使來朝請和,敕宰相郭子儀、蕭華、裴遵慶等於中書設宴。將詣光宅寺為盟誓,使者云:蕃法盟誓,取三牲血歃之,無向佛寺之事,請明日須於鴻臚寺歃血,以申蕃戎之禮。從之。寶應元年六月,吐蕃使燭蕃莽耳等二人貢方物入朝,乃於延英殿引見,勞賜各有差。而劍南西山又與吐蕃、氐、羌隣接,武德以來,開置州縣,立軍防,即漢之笮路,乾元之後,亦陷於吐蕃。寶應二年三月,遣左散騎常侍兼御史大夫李之芳、左庶子兼御史中丞崔倫使于吐蕃,至其境而留之。 | 32) 광덕 원년(763) 9월에 토번이 경주(涇州)를 공격하여 함락했다. 10월에는 빈주(邠州)를 침략하고 또한 봉천현(奉天縣)을 함락했다. 중서령 곽자의를 보내 서쪽을 방어하게 했다. 토번이 토욕혼과 당항강의 무리 20여 만으로 용광도로부터 동쪽으로 왔다. 곽자의는 군대를 후퇴했고 황제의 어가는 섬주(陝州: 하남성 섬현)로 행차하여, 서울(장안)은 지킴을 잃었다. 항복한 장수 고휘가 토번을 이끌고 상도성(上都城, 즉 장안)으로 들어와 토번의 대장 마중영 등과 함께 죽은 빈왕(빈왕은 금성공주의 아버지 옹왕 이수례이다)의 아들 광무왕 (이)승굉을 황제로 옹립했는데, 연호를 세우고 크게 사면하였으며, 관원을 두고, 이어서 사봉(司封) 최괴 등을 재상으로 삼았다. 곽자의가 철군하여 남쪽으로 가서 상주(商州: 섬서성 상현)를 지켰는데, 토번이 성에 머물다 15일 만에 후퇴하자, 관군(당나라군)이 상도(上都:장안)를 수복하고 곽자의를 유수(留守)로 삼았다. ※참고: 경주(涇州): 감숙성 경천현-甘肅省 涇川縣, 장안 북서쪽 181km 빈주(邠州): 섬서성 빈현-陝西省 彬縣, 장안 북서쪽 96km 봉천현(奉天縣): 섬서성 건현 陝西省 乾縣, 장안 북서쪽 65km. | 廣德元年九月,吐蕃寇陷涇州。十月,寇邠州,又陷奉天縣。遣中書令郭子儀西禦。吐蕃以吐谷渾、党項羌之眾二十餘萬,自龍光度而東。郭子儀退軍,車駕幸陝州,京師失守。降將高暉引吐蕃入上都城,與吐蕃大將馬重英等立故邠王男廣武王承宏為帝,立年號,大赦,署置官員,尋以司封崔瓌等為相。郭子儀退軍南保商州,吐蕃居城十五日退,官軍收上都,以郭子儀為留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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