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0, 구당서 토번전(상)- 8)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8) ※ 구당서 토번전(상)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卷196上 토번열전(吐蕃列傳) 第146上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上 38) 영태 원년(765) 3월에 토번이 강화하기를 청하자, 재상 원재와 두홍점 등을 보내 흥당사에서 그들과 결맹하고 돌아왔다. 가을 9월에 복고회은이 토번과 회흘의 무리를 꾀어 남쪽으로 와서 왕기(王畿)를 침범했다. 토번의 대장 상결식찬마, 상식동찬, 상야식 및 마중영이 무리 20만을 이끌고 봉천의 경계에 왔는데, 빈주절도사 백효덕이 이를 막지 못하자 경성(京城: 장안)이 계엄 상태가 되었다. 이에 앞서 삭방선봉병마사 혼일진과 손수량이 봉천에 주둔하고 있다가 이를 막았는데, 이때 조서를 내려 추부원수 곽자의에게 하중부(河中府: 산서성 영제현)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지원하게 하자, [곽자의는] 경양(涇陽: 섬서성 경양현)에 주둔했고, 여러 장수들은 각자 요충에서 주둔했다. 당초 토번은 봉천에 군영을 줄지어 세웠는데, 혼일진이 홀로 말을 타고 쳐들어가니 날랜 기병 2백 명이 이어 진격하여 토번의 군영으로 돌격하였고, 좌우로 쳐서 죽이니 적의 무리가 매우 놀라 활시위를 당기지도 못하고 죽었다. (혼)일진이 토번 장수 한 명을 잡아 말 달리며 돌아왔다. 토번의 장수는 사력을 다했고, 이에 [혼일진이] 살반(撒飯) 하나를 잃었을 뿐, (혼)일진의 무리는 화살에 맞거나 칼에 베인 자가 한명도 없어 군대는 더욱 사기가 진작되었다. 다음 날 토번이 무리를 모아 포위하자 (혼)일진이 포차(拋車)에 명하여 돌덩이를 던지게 하고, 동시에 궁노(弓弩)를 발사하니 적의 사상자가 많았다. 수일 후 [토번이] 병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일진이 밤을 틈타 다시 양모신(梁母神) 아래에서 적의 진영을 습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고 5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낙타와 병기를 노획했다. | 永泰元年三月,吐蕃請和,遣宰相元載、杜鴻漸等於興唐寺與之盟而罷。秋九月,僕固懷恩誘吐蕃、迴紇之眾,南犯王畿。吐蕃大將尚結息贊磨、尚息東贊、尚野息及馬重英率二十萬眾至奏天界,邠州節度使白孝德不能禦,京城戒嚴。先是,朔方先鋒兵馬使渾日進、孫守亮屯軍於奏天以拒之,於是詔追副元帥郭子儀於河中府領眾赴援,屯於涇陽,諸將各屯守要害。初,吐蕃列營奉天,渾日進單騎衝之,驍騎二百人繼進,衝突其營,左右擊刺,賊徒驚駭,無不應弦而斃。日進挾一蕃將,躍馬而歸,蕃將奮身,失其撒飯一,日進之眾,無中鋒鏑者,軍中望而益振。明日,吐蕃悉眾圍之,日進命拋車夾石投之,雜以弓弩,賊死傷眾。數日,斂軍回營。尋又日進夜斫賊營於梁母神下,殺千餘人,生擒五百人,獲駝馬器械。 | 39) 황상이 다시 친정(親征)한다는 조서를 내려, 조정 관료의 말을 징집하고, 경성(장안)에 단련(병)을 두었다. 진서절도(鎭西節度) 마린이 토번의 정찰대 4백여 명을 무공의 동원에서 만나, 50명으로 습격하여 모두 죽이니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17일부터 비가 내려 25일 저녁 무렵이 되어야 겨우 그치니, 의논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했다. 토번이 예천현(醴泉縣: 섬서성 예천현) 구종산 북쪽으로 군영을 옮겼는데, 이로 인해 예천을 쳐서 노략질했다. 경성(京城: 장안) 사람들이 크게 놀라 사람들은 모두 집을 비웠고 대호(大戶)는 굴을 파서 빠져 나갔다. 반역의 무리 임부(任敷)가 군사 5천여 명으로 백수현(白水縣: 섬서성 백수현)을 침범했다. 혼일진이 포고문을 발포하고 이르러 봉천 마외점에 둔병했다. 그 달 19일 이후 25일 이전까지 2백여 차례 교전하여, 토번 군사 만 여 무리를 격파하고, 5천 급을 참수하고, 16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 1,242필, 낙타 115두, 병기, 군기 등 모두 3만여 점을 노획했다. 조정의 관료들이 크게 놀라 열 집에 여덟, 아홉이 도망가 숨었으며, 이를 금해도 그치지 않았다. 앞서 토번이 왕기(王畿)를 범한 후, 중위교(中渭橋: 장안 부근을 흐르는 위수에 동위교, 중위교, 서위교의 세 다리가 있었다), 호풍(鄠豐: 섬서성 호현)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 上又下詔親征,括朝官馬,京城置團練。鎮西節度馬璘遇吐蕃遊奕四百餘人於武功東原,使五十人擊而盡殺之,無噍類。自十七日雨至二十五日晚際始止,議者以為天助。吐蕃移營於醴泉縣九嵏山北,因攻掠醴泉。京城大駭,人皆空室,大戶鑿竇以出。逆黨任敷以兵五千餘人犯白水縣。渾日進露布而至,屯於奉天馬嵬店。今月十九日已後至二十五日已前,交戰二百餘陣,破吐蕃一萬餘眾,斬首五千級,生擒一百六十人,馬一千二百四十二匹,駝一百一十五頭,器械、幡旗共三萬餘事。朝官震懼,家口迴避者十室八九,禁之不止。自前年吐蕃犯王畿後,於中渭橋鄠豐城以營兵,至是功畢。 | 40) 토번이 영수(永壽: 섬서성 영수현) 북쪽으로 퇴각하다가 회흘의 무리를 만났는데, 비록 그들은 (복고)회은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러나 모두 그 부중을 속이고, 서로 유인하여 진군하게 함으로써 다시 침범해 들어왔다. 봉천에 이르러 두 오랑캐가 시기하고 윗자리를 다투다가 각기 별도로 영루를 설치했다. 토번의 순찰대가 요저에 당도했고, 다시 토번이 마외점에 이른 후에 그 곳 주민의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퇴각했다. 회흘 기병 3천이 경양에 가서 투항하고, 토번을 쳐서 공을 세우기를 원하니, 곽자의가 이를 허락했다. 이때 삭방선봉 병마사 개부 남양군왕 백원광과 회흘이 경양 영대현(靈臺縣: 감숙성 영대현) 동쪽 50리에서 만나 토번을 공격하고 격파했는데, 참수하고 포로로 잡고 낙타, 소, 양, 말을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황상이 친정을 정지하고, 경사는 계엄을 풀었으며, 재상이 표를 올려 경하했다. | 吐蕃退至永壽北,遇迴紇之眾,雖聞懷恩死,皆悖其眾,相誘而奔,復來寇。至奉天,兩蕃猜貳爭長,別為營壘。吐蕃遊奕至底,吐蕃又至馬嵬店,因縱火焚居人廬舍而退。迴紇三千騎詣涇陽降款,請擊吐蕃為効,子儀許之。於是朔方先鋒兵馬使開府南陽郡王白元光與迴紇合於涇陽,靈臺縣東五十里攻破吐蕃,斬首及生擒獲駝馬牛羊甚眾。上停親征,京師解嚴,宰相上表稱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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