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 구당서 토번전(하)- 1)

상 상 2014. 11. 20. 17:39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1, 구당서 토번전()- 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1)

 

 

구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196토번열전(吐蕃列傳) 146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下

번 역 문

원 문

41) 영태 2(766) 2월에 대리소경 겸 어사중승 양제에게 토번과 강화할 것을 명했다. 4월에 토번에서 수령 논읍장 등 백여 명이 양제를 따라서 내조하게 하고, 강화가 성사됨에 거듭 감사했다.

대력 2(767) 10월에 영주(靈州)에서 토번의 2만여 무리를 격파하고, 5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500필을 노획했다. 11월에 화번사(和蕃使), 검교호부상서 겸 어사대부 설경선이 토번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왔는데, 수령 논읍릉이 설경선을 따라 입조했다. 설경선이 주를 올려 말하기를, “찬보께서는 봉림관(감숙성 임하현 서쪽)을 경계로 삼길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번에서] 사신을 보내니, 노실 등 15명이 입조했다.

(대력) 3(768) 8월에 토번의 10만 무리가 영무(靈武)를 노략질하고, 대장 상실마가 빈주를 노략질하니, 빈녕절도사 마린이 2만여 무리를 격파하고 포로를 잡아 조정에 바쳤다. 9월에 [토번이] 영주를 노략하니 삭방기장(朔方騎將) 백원광이 이를 격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영무에서 2만 무리를 격파하고 양과 말 수천 필을 노획했다. 관내부원수 곽자의가 영주에서 토번 6만여 무리를 격파했다. 12월에 토번이 매년 서쪽 변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진지를 증축하고, 마린으로 하여금 경주(涇州: 섬서성 경천)로 진을 옮겨, 경원절도사를 겸임하게 했다. 검남(劍南)의 서천(西川: 현 성도)에서도 토번 1만 여 무리를 격파했다.

(대력)5(770) 5월에 안주(安州: 사천성 검각현), 실주(悉州: 사천성 송반현 서남), 척주(拓州: 사천성 공주 동쪽 100), 정주(靜州: 사천성 송반현 서남), 공주(恭州: 사천성 무현 서북 350)5()를 산 위의 요충으로 옮겨 토번을 방비하게 했다.

永泰二年二月命大理少卿兼御史中丞楊濟修好于吐蕃四月吐蕃遣首領論泣藏等百餘人隨濟來朝且謝申好大曆二年十月靈州破吐蕃二萬餘眾生擒五百人獲馬一千五百匹十一月和蕃使檢校戶部尚書兼御史大夫薛景仙自吐蕃使還首領論泣陵隨景仙來朝景仙奏云:「贊普請以鳳林關為界。」俄又遣使路悉等十五人來朝三年八月吐蕃十萬寇靈武大將尚希摩寇邠州邠寧節度使馬璘破二萬餘眾擒其俘以獻之九月寇靈州朔方騎將白元光破之俄又復破二萬眾於靈武獲羊馬數千計關內副元帥郭子儀於靈州破吐蕃六萬餘眾十二月以蕃寇歲犯西疆增修鎮守乃移馬璘鎮涇州仍為涇原節度使劍南西川亦破吐蕃萬餘眾五年五月徙置當恭五州于山陵要害之地以備吐蕃

42) (대력) 8(773) 가을에 토번의 6만 기병이 영무(靈武)를 침범하여, 우리 농작물을 짓밟고 돌아갔다. 10월에 [토번이] 경주(涇州)와 빈주(邠州) 등지를 침범하니, 곽자의가 선봉장 혼감을 보내 적과 의록(宜祿: 섬서성 장무현 동남, 빈주의 서북)에서 싸우게 했는데, 우리 군대가 불리하여 부장(副將) 사적(史籍) 3명이 죽고, 백성 1천여 명이 피랍되었다. 이날 밤, 혼감이 흩어진 군졸을 모아 적의 진영을 습격했는데, 마침 마린 역시 적군의 군수품을 습격하고, 수천 명을 죽이니 적이 드디어 괴멸되었다. 곽자의가 토번 10여 만을 크게 격파했다. 당초 토번이 우리의 빈주 일대를 범했을 때, 마린이 정예 군사 2천여 명으로 밤을 틈타 적의 군영을 엄습하고, 적의 표피장(豹皮將)의 눈을 화살로 쏘니, 적의 무리가 그를 부축하여 크게 울다가 드디어 군영 전체가 모두 도망갔다. 마린은 이로 인하여 삭방의 병사 200여 명과 백성 700여 명을 되찾았고, 낙타와 말 수백 필을 노획했다.

八年秋吐蕃六萬騎寇靈武蹂踐我禾稼而去十月寇涇邠等州郭子儀遣先鋒將渾瑊與賊戰于宜祿我師不利副將史籍等三人死之村墅居人為驅掠者凡千餘人是夜瑊收合散卒襲賊營會馬璘亦襲其輜重凡殺數千人賊遂潰子儀大破吐蕃十餘萬眾吐蕃犯我邠郊馬璘以精卒二千餘人潛夜掩賊營射賊豹皮將中目賊眾扶之號泣遂舉營遁去璘因收獲朔方兵健二百餘人百姓七百餘人駝馬數百匹

43) (대력) 9(774) 4월에 토번이 침범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질까 우려해서 미리 변경의 방비를 하고 곧이어 [代宗] 명령을 내렸다. “()자의에게 명하여, 상군, 북지, 사새(四塞), 오원, 의거(서융 계통으로 티벳계인지, 투르크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계호, 선비 등 여러 종족의 보병과 기병 5만을 통솔하고, 시급히 순읍(栒邑: 섬서성 삼수현 동북)에 모이게 하여 원래 그곳에 주둔하던 군대를 증강하게 하라. ()포옥( 무덕 연간의 공신 안흥귀의 후예)은 진()의 고도 지방과, ()의 상당 지방, 그리고 하(:황하), (: 황하 상류 황수) 지방의 의병과 견(: 견수는 오늘날 천하-千河라고도 한다), (: 오늘날 감숙성의 중서부) 지방의 소년 부대 등 모두 3만을 통솔하여, 고벽(高壁: 산서성 영석현 동남 25리에 위치한 고벽령)을 횡단하고, 국경을 따라 연이어 군영을 세우게 하라. 마린은 서역의 전정(前庭), 차사(車師: 투르판 일대에 있던 국가)의 후부(後部), 아울러 광무(감숙성 고란현 서쪽으로 현재 란주 일대)의 수비병, 하채(下蔡: 안휘성 수현 일대)의 요역부(徭役夫) 3만의 무리를 통솔하고, 사중(泗中)에 주둔하여 대군의 지원을 증강시키라. ()충성(忠誠)은 무락(武落)의 별교(別校)와 서방(右地)의 정예병(奇鋒)으로 구성된 2만 병력을 통솔하여 기양(섬서성 기산현)으로부터 출병하여 북쪽에서 만나도록 하라. ()희양(希讓)은 삼보태상(三輔太常)의 무리와 6개 군(: 농서군, 천수군, 안정군, 북지군, 상군, 서하군)의 양가 자제를 통솔하여 위수로부터 서쪽으로 올라가서 변송(하남성 개봉), 치청(산동성 운성현), 하양(하남성 심양현), 유계(幽薊: 각각 하북성 북경과 계현)4만 무리와 합하여,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도록 하라. 위박(하북성 기현), 성덕(하북성 정정현), 소의(하북성 안양현), 영평의 6만 무리는 좌익과 우익으로 크게 펼쳐 정렬하라. 짐은 안으로 금군(禁軍)을 정돈하고, 친히 여러 장군들과 맹서하며, 천금(千金)의 비용을 제공하고, 6(六牧:6개의 목장)의 말을 사여할 것이다. 전쟁에 필요한 갑옷과 병기, 군량과 각종 군수품은 해당 관청에 준비되어 있는데, 이는 평소에 모두 세밀하게 갖추어 놓은 것이다. 조정에 봉직하는 너희 문무 관료들에게 이르노니, 군대가 승리함은 화합하는 데 있고, 싸움을 잘 하는 것은 진법에 있지 않으니, 각자 마땅히 강역을 보위하고, 요충에 주둔하며, 경계를 삼엄히 하여, 서로 전후에서 상응하게 하라. 만약 [토번이] 죄를 뉘우친다면 굳이 백성들을 수고로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만은, 만약 공순하지 않다면, 마땅히 죄를 벌할 것이다. 출병한 뒤에는 명령의 통일에 주의하여 모든 군대를 통제할 것이다. 이후 군사 작전의 결정은 뒤에 있을 명령에 따르라.”

九年四月以吐蕃侵擾預為邊備乃降敕:「宜令子儀以上郡北地四塞五原義渠稽胡鮮卑雜種步馬五萬眾嚴會栒邑克壯舊軍抱玉以晉之高都韓之上黨湟義從隴少年凡三萬眾橫絕高壁斜界連營馬璘以西域前庭車師後部兼廣武之戍下蔡之徭凡三萬眾屯於回中[]回中 殿懼盈齋廣本作泗中」,局本作洄中」,今據唐大詔令集卷一冊府卷九九二改。,張大軍之援忠誠以武落別校右地奇鋒凡二萬眾出岐陽而北會希讓以三輔太常之徒六郡良家之子自渭上而西合汴宋淄青河陽幽薊總四萬眾分列前後魏博成德昭義永平總六萬眾大舒左右朕內整禁旅親誓諸將資以千金之費錫以六牧之馬其戎裝戰器軍用邊儲各有司存素皆精辦咨爾將相文武宣力之臣夫師克在和善戰不陣各宜保據疆界屯據要衝斥堠惟明首尾相應若既悔過何必勞人如或不恭自當伐罪然後眷求統一以制諸軍進取之宜俟於後命。」

44) (대력) 11(776) 정월에 검남절도사 최녕이 토번의 고홍 등 4개 절도(節度) 및 돌궐, 토욕혼), (), (), (), 당항(党項) 20여만 무리를 대파하여 만여 급을 참수하고, 납성(䗶城)의 병마사 1350명을 포로로 잡아 황상께 헌납하였으며, 노획한 소와 양 및 병기와 군수물자는 이루다 기록할 수 없었다.

(대력) 12(777) 9월에 (토번이) 방주(섬서성 중부현)로 쳐들어와서 당항의 양과 말을 노략질하고 물러났다. 10월에 최녕이 토번의 망한성(사천성 고위주-故威州 서쪽)을 격파했다.

(대력) 14(779) 8월에 태상소경 위륜에게 명하여 절()을 지니고 토번에 사신으로 가게 했는데, 토번인 포로 500명을 데리고 가서 돌려보내 주었다. 10월에 토번이 남만(南蠻)의 무리 20만을 이끌고 침략했다. 한 무리는 무주로 들어와 문천(汶川)및 관구(사천성 관현 서북 관구산)를 통과했고, 다른 무리는 부주(扶州: 감숙성 문현 서북 160), 문주(文州: 감숙성 문현)으로 들어와 방유(사천성 평무현)와 백패(사천성 이주-利州 경곡현 서북)를 통과했으며, 또 다른 무리는 이주(黎州: 사천성 청계현), 아주(雅州: 사천성 아안현)로부터 공협관(사천성 영경현 서쪽)을 통과하니 여러 군읍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이에 금군 4000명 및 유주(幽州)의 병사 5000명을 보내 동시에 토벌하여 그들을 대파했다.

十一年正月劍南節度使崔寧大破吐蕃故洪等四節度兼突厥吐渾党項等二十餘萬眾斬首萬餘級生擒城兵馬使一千三百五十人獻于闕下牛羊及軍資器械不可勝紀十二年九月入寇坊州掠党項羊馬而去十月崔寧破吐蕃望漢城十四年八月命太常少卿韋倫持節使吐蕃統蕃俘五百人歸之十月吐蕃率南蠻眾二十萬來寇一入茂州過汶川及灌口一入扶過方維白壩一自黎雅過邛崍關連陷郡邑乃發禁兵四千人及幽州兵五千人同討大破之

45) 건중 원년(780) 4월에 위륜(韋倫)이 이르렀다. 대력 연간에 [토번의] 사신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입조했는데 모두 머무르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토번의 사신들은 반드시 중관(中官:환관)을 보내 통솔하게 하고, (양자강), (五嶺:오령)에 나누어 거주하게 했는데 이로 인하여 재물을 구하고 먹이는 비용이 들어 그 폐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작년 겨울에, 토번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세 갈래로 침략해 들어왔는데, 마침 덕종(재위: 779~805)이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덕으로 사방을 위무하고자 하니, 포로로 잡힌 토번 사람 500여 명을 모아 각기 의복 일습을 주고, 위륜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귀국하게 하여 그들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약속하고, 변경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정벌하지 않게 했다. 토번이 처음에 [토번의] 포로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토번 포로가 경계에 들어서자, 부락이 모두 위엄에 두려워했고 은혜에 감사했다. (토번의) 찬보 걸립찬이 위륜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올 줄 몰랐다. 세 가지 회한이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하니, 위륜이 말하기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걸립찬이 말하기를, “대국의 상사(喪事)를 몰라 때에 맞춰 문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요,(현종의 손자인 대종-재위 762~779-의 죽음을 말한다.) 산릉(山陵)에 입장(入葬)하는 시기를 알지 못해 예물을 보내 장례를 돕지 못한 것이 하나요, 장인이신 황제(皇帝) 성명(聖明)께서 계위하신 줄을 모르고,(779년 덕종이 새로 즉위한 것을 몰랐다는 것) 이미 군대를 세 갈래로 출병하여 연이어 공격하였다. 지금 영무로 들어간 [토번의] 군대는 [나의] 명령을 듣고 곧바로 정지하였으나, 산남으로 들어간 [토번의] 군대는 이미 부(), ()으로 들어갔고, () 방면으로 들어간 [토번의] 군대는 이미 관구(灌口)로 질주하여 쫓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니 이것이 세 가지 회한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토번이] 사신을 보내 예물을 바치고, 20일이 되지 않아 임무를 마치고 돌아갔다. 촉의 군대가 잡은 전쟁포로를 [황상에게] 바치니, 해당 관청의 관원들이 전거에 준해서 노역하는 노예로 나누어 주길 청했으나, 황상이 말씀하시기를, “이미 맹약을 분명히 하여 공표하였는데, 어찌 말을 바꾸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포로] 각자에게 겸() 2필과 옷 일습을 주어 돌려보냈다. 5월에 위륜을 태상경에 임명하여 토번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해 겨울에 [토번에서] 재상 논흠명사 등 55명을 보내 위륜을 따라서 도착했으며,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토번은 위륜이 두 번이나 [토번에] 이른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에 위륜이] 숙소에 도착한 후 음악으로 그를 즐겁게 했으며 9일을 머물다가 돌아왔는데, 아울러 [토번은] 거수(渠帥) [논흠명사]를 보내 답례하였다.

建中元年四月韋倫至自大曆中聘使前後數輩皆留之不遣俘獲其人必遣中官部統徙江因緣求財及給養之費不勝其弊去年冬吐蕃大興師以三道來侵會德宗初即位以德綏四方徵其俘囚五百餘人各給衣一襲使倫統還其國與之約和敕邊將無得侵伐吐蕃始聞歸其人不之信及蕃俘入境部落皆畏威懷惠其贊普乞立贊謂倫曰:「不知是來也而有三恨奈何?」倫曰:「未達所謂。」乞立贊曰:「不知大國之喪而弔不及哀一也不知山陵之期而賻不成禮二也不知皇帝舅聖明繼立已發眾軍三道連衡今靈武之師聞命輒已而山南之師已入扶蜀師已趨灌口追且不及是三恨也。」乃發使奉贄不二旬而復命蜀帥上所獲戎俘有司請準舊事頒為徒隸上曰:「要約著矣言庸二乎!」乃各給縑二匹衣一襲而歸之五月以韋倫為太常卿復使吐蕃其冬遣宰相論欽明思等五十五人隨倫至且獻方物吐蕃見倫再至甚歡既就館聲樂以娛之留九日而還兼遣其渠帥報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