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3, 구당서 토번전(하)- 3)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구당서 토번전(하)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구당서(舊唐書)卷196下 토번열전(吐蕃列傳) 第146下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舊唐書卷一百九十六下 49) 2월에 최한형에게 명하여 절(節)을 지니고 토번에 답방하게 했는데, 구협찬(區頰贊) 등을 보내어 [함께 토번으로] 귀국하게 했다. 황상이 당초 재상, 상서(尙書)로 하여금 토번의 재상 구협찬과 풍읍리(장안성의 일방)의 단소(壇所)에서 회맹하게 했는데, 장차 회맹하려 할 때, 청수(淸水)에서 열린 회맹에서 국경이 정해지지 않아, 이때 회맹이 정지되었다. 이로 인하여 (구)협찬이 억류되어 돌아가지 못했는데, 다시 (최)한형에게 명하여 찬보에게 사신으로 가게 한 것이다. 6월에 답번사판관(答蕃使判官) 우적이 토번의 사신 논협몰장 등과 함께 청해로부터 왔다. 7월에 예부상서 이규에게 어사대부를 더하여 입번회맹사(入蕃會盟使)로 삼았다. 또한 재상 이충신, 노기, 관파(關播), 우복야 최녕, 공부상서 교림, 어사대부 우기(于頎), 태부경 장헌공, 사농경 단수실, 소부감 이창기, 경조윤 왕굉, 좌금오위장군 혼감 등이 구협찬 등과 함께 단(壇)을 설치한 곳에서 회맹했다. 당초 우적이 토번에서 돌아왔는데, 상결찬과 약속하길, “변경의 경계를 정한 뒤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자”고 했는데, [황상이] 이를 따랐다. 풍읍방(豐邑坊) 맹단(盟壇)이 경성(장안)의 안에 있어 편하지 않으므로, 경성 서쪽의 땅을 골라 맹단을 만들 것을 청했다. 그 예는 청수 회맹의 의례와 같이 했다. 회맹하기 이틀 전에 명하기를 해당 관청은 태묘에 [회맹을] 고하고, 맹관(盟官)은 재계하게 했다. 세 번째 날에 조복(朝服)을 입고 단에 올랐으며, 관파는 무릎을 꿇고 맹서의 글을 읽었다. 회맹을 마치고 연회를 베풀어 준 뒤 토번의 사신을 돌려보냈다. | 二月,命崔漢衡持節答蕃,遣區頰贊等歸。上初令宰相、尚書與蕃相區頰贊盟於豐邑里壇所,將盟,以清水之會疆埸不定,遂罷,因留頰贊未遣,復令漢衡使於贊普。六月,答蕃使判官于頔與蕃使論頰沒藏等至自青海。七月,以禮部尚書李揆加御史大夫,為入蕃會盟使。又命宰相李忠臣、盧杞、關播、右僕射崔寧、工部尚書喬琳、御史大夫于頎、太府卿張獻恭、司農卿段秀實、少府監李昌夔、京兆尹王翃、左金吾衞將軍渾瑊等與區頰贊等會盟於壇所。初,于頔至自蕃中,與尚結贊約「疆埸既定,請歸其使」。從之。以豐邑坊盟壇在京城之內非便,請卜壇於京城之西。其禮如清水之儀。先盟二日,命有司告太廟,盟官致齋。三日,朝服陞壇,關播跪讀盟文。盟畢,宴賜而遣之。 | 50) 흥원 원년(784) 2월에 우산기상시 겸 어사대부 우기를 경주로 보내 토번을 위무하고, 아울러 주부(州府)와 더불어 군수물자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당시 변경의 우방 토번이 스스로 당나라를 도와 국난을 평정할 것을 청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4월에 태상소경 겸 어사중승 심방(沈房)을 입번계회(入蕃計會) 및 안서와 북정(北庭) 선위사로 삼았다. 그 달에 혼감(渾瑊)이 토번의 논망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주차(朱泚)의 장수 한민, 장정지, 송귀조 등을 무공(섬서성 무공현)의 무정천에서 대파하고 만여 급을 참수했다. | 興元元年二月,以右散騎常侍兼御史大夫于頎往涇州已來宣慰吐蕃,仍與州府計會頓遞。時吐蕃款塞請以兵助平國難,故遣使焉。四月,命太常少卿、兼御史中丞沈房為入蕃計會及安西、北庭宣慰使。是月,渾瑊與吐蕃論莽羅率眾大破朱泚將韓旻、張廷芝、宋歸朝等於武功之武亭川,斬首萬餘級。 | 51) 정원 2년(786)에 창부랑중 겸 시어사 조율(趙聿)을 입토번사(入吐蕃使)로 삼았다. 8월에 토번이 경(涇), 농(隴), 빈(邠), 녕(寧) 등 여러 도(道)를 침략하여, 백성과 가축을 약탈하고, 곡식을 탈취하니, 서쪽 변경이 소란했다. 여러 도(道)의 절도(節度) 및 군진(軍鎭)은 모두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이었다. 경사(장안)는 계엄상태가 되었다. 황상이 좌금오장군 장헌보(張獻甫)와 신책장 이승담, 소청면 등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여 함양에 주둔하게 하고, 하중절도(河中節度) 낙원광을 불러 군대를 이끌고 함양을 지키게 하여 그들을 돕도록 했다. 9월에 토번의 유격대가 호치(섬서성 건현 동남)에 미치자, 황상이 다시 장헌보 등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여 함양(咸陽: 장안 서쪽 21km)에 주둔하게 하였고, 다시 조서를 내려 좌감문장군 강성(康成)을 토번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초 토번 대상(大相) 상결찬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회맹하고 경계를 정할 것을 청했는데, 이에 강성에게 명하여 사신으로 가게 한 것이다. 상채원(上砦原)에 이르러 (상)결찬과 상견하였는데, (상결찬이) 사신 논걸타에게 명하여 강성과 함께 오게 했다. | 貞元二年,命倉部郎中、兼侍御史趙聿為入吐蕃使。八月,吐蕃寇涇、隴、邠、寧數道,掠人畜,取禾稼,西境騷然。諸道節度及軍鎮咸閉壁自守而已。京師戒嚴。上遣左金吾將軍張獻甫與神策將李昇曇、蘇清沔等統兵屯於咸陽,召河中節度駱元光率眾戍咸陽以援之。九月,以吐蕃遊騎及於好畤,上復遣張獻甫等統兵屯於咸陽,又詔遣左監門將軍康成使于吐蕃。初,吐蕃大相尚結贊累遣使請盟會定界,乃命成使之。至上砦原,與結贊相見,命其使論乞陀與成同來。 | 52) 같은 달에, 봉상절도사 이성(李晟)은 토번이 침략하자, 부장 왕필(王佖)을 보내 적군의 진영을 야습하게 하고, 용맹한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견양(섬서성 견양현)에 들어오게 한 뒤, 그들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적의 대군이 반드시 성 아래를 지날 것인데, 절대로 대열의 앞뒤를 공격하지 말라. 앞뒤가 비록 패했다 할지라도 중군(中軍)의 역량은 온전할 것이니, 만약 그들이 합세하여 너희를 공격한다면 너희는 반드시 그 폐해를 입을 것이다. 다만 토번의 전군(前軍)이 다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오방기(五方旗)와 호표의(虎豹衣)를 본다면 그들이 바로 중군이니, 갑자기 나와서 공격한다면 특별한 공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필이 그 말과 같이 나아가 적군을 격퇴하니 적의 무리가 과연 패했으며, 부장(副將) 사정옥(史廷玉)은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다시 토번이 봉상의 성 아래를 습격하자, 이성이 병사를 내어 이를 막으니, 하루 저녁에 토번이 물러갔다. 10월에 이성이 군대를 보내 토번의 최사보(감숙성 고원현 서북에 위치)를 습격하여 대파했는데, 토번이 남기고 간 물자를 불태우고 토번의 수령 호굴률설찬 등 7명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경사(장안)에 보냈다. | 是月,鳳翔節度使李晟以吐蕃侵軼,遣其將王佖夜襲賊營,率驍勇三千人入汧陽,誡之曰:「賊之大眾,當過城下,無擊其首尾。首尾雖敗,中軍力全,若合勢攻之,汝必受其弊。但候其前軍已過,見五方旗、虎豹衣,則其中軍也。出其不意,乃是奇功。」佖如其言出擊之,賊眾果敗,副將史廷玉力戰死之。又寇鳳翔城下,李晟出兵禦之,一夕而退。十月,李晟遣兵襲吐蕃之摧沙堡,大破之,焚其歸積,斬蕃酋扈屈律設贊等七人,傳首京師。 | 53) 11월에 토번이 염주(영하성 영무현 동남)를 함락시켰다. 당초에 적이 왔을 때, 자사 두언광(杜彥光)이 사람을 보내 소고기와 술로 군사를 위로했다. 토번이 말하기를, “내가 주성(州城)을 점거하길 바라니 그대가 사람들을 이끌고 떠날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하였다. (두)언광이 이에 모든 무리를 이끌고 부주(섬서성 부현)로 도망갔다. 12월에 [토번이] 하주(섬서성 유림현 서북)를 함락시키니, 자사 탁발건휘가 무리를 이끌고 떠났고, 토번이 다시 하주성을 점거하게 되었다. 토번이 다시 은주(섬서성 미지현 서북)를 공격하였는데, 이곳은 본래 성벽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정원) 3년(787) 봄, 검교좌서자 겸 어사중승 최한(崔澣)에게 명하여 입토번사(入吐蕃使)가 되게 하고, 이어서 좌서자 이섬을 토번에 사신으로 보냈다. 하동, 보녕 등 도(道)의 절도사 마수(馬燧)가 조정에 왔다. 당초에 상결찬이 염(鹽), 하(夏) 등 주(州)를 함락시킨 뒤, 각각 1000여 명을 남겨 이를 지키게 하고, (상)결찬의 대부대는 명사(鳴沙: 영하성 중위현 동남쪽)에 주둔했다. 작년 겨울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 양과 말이 많이 죽어 군량의 공급이 부족했다. 당시 조정에서 조를 내려 화주(華州), 동관 절도(節度) 낙원광, 빈녕(邠甯) 절도(節度) 한유괴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봉상(鳳翔), 부(鄜), 빈(邠) 및 여러 도(道)의 수졸(戍卒)과 함께 변방 요새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또한 마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석주(산서성 이석현)에 머물게 하여, 군대를 나누어 황하(河)를 사이에 두고 원광(元光) 등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면서 토번을 토벌하게 했다. (상)결찬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여러 번 사신을 보내 강화하기를 청하였고 이윽고 회맹을 약속하였는데, 이를 황상이 모두 불허했다. 토번에서 다시 대장 논협열을 보내어 후한 예와 비속한 언사로써 마수에게 회맹하길 구하니, 마수가 이로써 주를 올렸으나, 황상이 다시 불허하고, 오직 합세하여 토번을 토벌하고 몰아낼 것을 독촉했다. 마수는 뇌물을 좋아하고 거짓을 쉽게 믿었는데, 이에 (논)협열(頰熱)과 함께 입조하여 토번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맹약을 허락할 것을 청하니, 황상이 이를 따랐다. 마수가 조정에 간 이후, 여러 군대는 다만 성문을 닫고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상)결찬이 신속하게 모든 군대를 모아 하주(夏州)를 버리고 돌아갔는데, 말이 이미 많이 죽었으므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해 여름에 평량(平涼: 감숙성 평량현에 소재한 평량천)에서 회맹했는데, 토번이 결국 회맹을 배신하니, 마수는 이로 인하여 병권을 잃고 조정의 처분을 바라는 몸이 되었다. | 十一月,吐蕃陷鹽州。初,賊之來也,刺史杜彥光使以牛酒犒之。吐蕃謂曰:「我欲州城居之,聽爾率其人而去。」彥光乃悉眾奔鄜州。十二月,陷夏州,刺史拓拔乾暉率眾而去,復據其城。又寇銀州,素無城壁,人皆奔散。三年春,命檢校左庶子、兼御史中丞崔澣為入吐蕃使,相次又遣左庶子李銛使之。河東、保寧等道節度使馬燧來朝。初,尚結贊既陷鹽、夏等州,各留千餘人守之,結贊大眾屯於鳴沙。自去冬及春,羊馬多死,糧餉不給。時詔遣華州、潼關節度駱元光、邠寧節度韓遊瓌統眾與鳳翔、鄜、邠及諸道戍卒,屯於塞上,又命燧率師次於石州,分兵隔河與元光等掎角討之。結贊聞而大懼,累遣使請和,仍約盟會,上皆不許。又遣其大將論頰熱厚禮卑詞求燧請盟,燧以奏焉,上又不許,惟促其合勢討逐。燧喜賂信詐,乃與頰熱俱入朝,盛言其可保信,許盟約,上於是從之。燧既赴朝也,諸軍但閉壁而已。結贊遽悉其眾棄夏州而歸,馬既多死,有徒行者。及是夏平涼之會,竟渝盟,馬燧亦由此失兵柄而奉朝請矣。 | 54) 4월에 최한(崔澣)이 명사(鳴沙)로부터 돌아왔다. 당초 최한이 명사에 이르러, 상결찬과 상견하고, (상결찬이) 약속을 어기고 염주, 하주를 함락한 까닭을 묻자, 대답하여 말하기를, “본래 정계비(定界碑)가 끌려 넘어져 두 나라가 맹약을 배반하고 서로 침략할까 염려되어 국경에 정계비를 만들어 옛 우호를 다시 다지려고 했다. 또한 토번군이 근년에 주차(朱泚)의 무리를 무공(武功)에서 격파하고도 상을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당시 토번군이] 경주(涇州)로 옮겨 간 뒤에 그곳의 절도사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또한 [토번군이] 봉상(鳳翔)으로 옮긴 뒤에는 이령공(李令公: 이성-李晟을 지칭한다)에게 사신을 통할 것을 청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당측에서] 강성(康成), 왕진(王眞)을 파견하여 [우리 토번에게] 왔지만, 모두 대국의 명령을 전달하지 못했다. 매일 대신이 사신으로 충임되어 오기를 기다리고, 또한 우리의 진실과 깎듯한 예의를 겸하여 보였으나 실로 오는 사람이 없어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염주와 하주의 일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 두 주(州)가 나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나에게 성을 줄 것을 청했기에, 온전히 하여 돌려보낸 것이지 내가 공격하여 함락한 것은 아니다. 지금 그대가 국친(國親)으로 명을 받들어 왔으니 만약 화의를 맺고 다시 회맹하려 한다면, 이는 바로 토번이 바라는 것이다. 회맹의 기일과 경계를 정하는 장소는 오로지 명령을 들을 것이다. 그대가 돌아가서 주를 올려 결정한다면 반드시 염주와 하주를 당에 돌려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청수의 회맹은 회맹에 같이 한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화의를 가볍게 여기고 오만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금 토번의 재상과 원수(元帥) 이하 모두 21명이 참석할 것이다. 영주절도사 두희전(杜希全)의 품성이 훌륭함은 국경 밖의 사람도 아는 바이니, 청컨대 그로 하여금 회맹을 주관하게 해 주시오. 경주절도(涇州節度) 이관(李觀) 또한 같이 회맹을 주관하게 해 주시오.”라고 하여, 이상과 같은 내용의 동일한 장표(章表)를 황상에게 알렸다. 최한이 뇌물로 토번에서 노역하는 사람을 꾀어 토번의 인구와 말의 실제 수효를 조사해 보니, 모두 5만 9천여 명이고, 말은 8만 6천여 필이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는 겨우 3만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린 아이였으니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 四月,崔澣至自鳴沙。初,澣至鳴沙,與尚結贊相見,詢問其違約陷鹽、夏州之故,對曰:「本以定界碑被牽倒,恐二國背盟相侵,故造境上請修舊好。又蕃軍頃年破朱泚之眾於武功,未獲酬償,所以來耳。及徒涇州,其節度使閉城自守,音問莫達。又徙鳳翔,請通使於李令公,亦不見納。及遣康成、王真之來,皆不能達大國之命。日望大臣充使,兼展情禮,實無至者,乃引軍還。及鹽、夏二州之師,二州懼我之眾,請以城與我,求全而歸,非我所復盟,蕃之願也。盟會之期及定界之所,唯命是聽。君歸奏決定,當以鹽、夏相還也。」又云:「清水之會,同盟者少,是以和好輕慢不成。今蕃相及元帥已下凡二十一人赴。靈州節度使杜希全稟性和善,外境所知,請令主盟會。涇州節度李觀,亦請同主之。」又同章表上聞。澣誘賂蕃中給役者,求其人馬真數,凡五萬九千餘人、馬八萬六千餘匹,可戰者僅三萬人,餘悉童幼,備數而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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