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32

상 상 2014. 10. 10. 17:28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32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2)

 

여기서 신라와 당나라의 경계선을 알아보자.

 

668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하였으나

676년 옛 요동성으로 안동도호부 옮기고

677년 이후에는 신성으로 안동도호부 옮기면서 신라와 당나라의 경계선은 다 달랐을테고

714년에 안동도호부를 평주로 옮긴 이후에는 신라와 당 사이에 발해가 있어

신라와 당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를 보면 신라와 당의 경계선을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이런 말이 나온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668년이나 엣 요동성으로 안동도호부로 옮긴 676년이나 신성으로 안동도호부를 옮긴 677년 이후나 다 똑같이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가 신라와 당나라의 경계였을까?

 

이것은 여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말도 않되는 거짓말이다.

 

(1) 66812월부터 6762월까지는 신라와 당의 경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불분명하다.

 

, 668년에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지만,

6703월에는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이 압록강 북쪽 너머에서 당나라군과 서로 대치하다가 4월에 전투를 벌리고 있으니

6704월 현재 신라와 당의 경계선은 압록강 너머 북쪽 어딘 가이다.

 

이렇게 압록강 너머에서 전쟁이 벌어지니 당은 같은 달(4)에 군대를 고구려 지역으로 보낸다.

1차 당의 침입

 

당나라의 제1차 침입으로 안시성, 한시성과 마읍성, 백수성, 석문(石門), 백수산, 횡수(橫水) 호로하 왕봉하,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곳은 어디인가?

 

우리가 아는 곳은 안시성 하나인데 나머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이곳이 어디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짐작하는 방법이 있다.

군대는 보낸 목적과 이유이다. 바로 제1차 침입의 목적이나 이유를 알아보면 된다.

 

함형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이 나라를 부흥하려고 당나라에 배반하고, 보장왕의 외손 안순(安舜:안승)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이것이 바로 당나라가 6704월에 고구려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한 이유이며 원인이다.

 

이러한 문구는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전>에도 그대로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대장 겸모잠(鉗牟岑)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장(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간을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이근행을 연산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이러한 기사를 보면 당의 제1차 침입의 목적은 고구려 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 부흥군의 진압이다.

다시말해서 이때 당군의 작전범위는 옛 고구려 영역라는 말이다.

, 당나라의 1차 침입때 벌어지는 전투장소는 전부 옛 고구려 영역 안이라는 말이다.

안시성, 한시성과 마읍성, 백수성, 석문(石門), 백수산, 횡수(橫水) 호로하 왕봉하,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 등은 전부 옛 고구려 영토라는 말이다.

 

그래서 6704월에 파견한 당나라 군대가 6717월에 안시성에서 전투를 벌린 것이며,

이어서 9월에 평양에 도착한 것이다. 이렇게 도착한 군대는 숫자가 모자랐는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수비에 치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따라 그 다음 해인 6727월에 군사 4만명을 평양에 다시 보충한 다음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간다.

 

장소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또하나 중요한 기사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670) 6월 고구려 수임성 사람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위의 기사를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성(漢城) 즉 지금의 서울이 이때(6706) 신라의 영토라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540576) 순수비가 북한산에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576년부터 지금의 서울을 신라가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이 당시(6706) 적어도 100년 이상 지금의 서울이 신라영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당나라 군이 아무리 진군하였어도 지금 서울의 북쪽이라는 말이다.

 

이제 하나하나 알아보자

안시성은 지금의 만주이고, 1차 침입 때 당나라군이 군사를 보충한 다음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간 첫 장소가 한시성과 마읍성인데 그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백수성으로부터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신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 군사를) 맞아 싸워 수천 명을 목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 군사는 고구려 부흥군이다.

이 말은 한시성과 마읍성, 백수성, 석문 등이 전부 옛 고구려 영토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신라군이 여기를 점령하고 있었음을 보면

6728월 현재 신라과 당의 경계선은 평양과 한시성 및 마읍성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당군이 한시성과 마읍성에서 이기고 백수성에서 가까운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는 것이 한 문장 안에 있는 것을 보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임에 틀림없다. 다시말해 백수성은 한시성과 마읍성에서 상당히 가까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백수성 전투에서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이 승리하여 당군은 후퇴하여 석문이라는 곳으로 갔다. 전투할 때 전진은 어렵고 후퇴는 빠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군은 적어도 최초로 전진한 백수성보다 멀리 도망간 곳이 석문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평양을 당이 다시 점령한 후 최초에 일어난 전투이다.

따라서 한시성과 마읍성, 백수성, 석문 등은 모두 평양에서 가까운 곳임에 틀림없다.

 

그 다음 그해(672) 12,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무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기사를 보아도 고구려의 남은 무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고구려 부흥군이다.

 

즉 여기에 나오는 백수산(白水山)도 옛 고구려 영토이고, 당나라군이 그들의 파견 목적에 따라 고구려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신라가 고구려 부흥군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수가 상당히 많았음은 포로만 2천명이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함형3(672) 이 겨울에좌감문대장군 고간이 신라의 무리에게 횡수(橫水)에서 대패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라의 무리는 고구려 부흥군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한 신라군임에 틀림없고

고간은 북상하는 신라 구원군과 횡수에서 싸우다 대패한 것이다. 그리고 죽었는지 다시는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점을 보면 위에 나오는 백수산 전투 이후에 황수에서 또다시 전투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고간이 신라 구원군을 쳐서 이기자 그 기세를 타고 신라군을 쫓아 남쪽으로 추격하다가 횡수에서 대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황수는 남쪽이고 백수산은 북쪽에 있다.

 

신라는 어디에서부터 북상하였을까? 물론 한성(지금의 서울)일 것이다.

, 횡수(橫水) 역시 엣 고구려 영토 안에 있고, 지금의 서울보다 북쪽에 있다.

 

그 다음 해(673)에 홀로 남은 이근행의 행적이 나타난다.

함형4(673) 5월 정묘일연산도총관 이근행이 고구려 반당을 호로하 서쪽에서 깨뜨리니고구려의 평양에 남은 무리는 신라로 달아나 들어갔다.<구당서 고종본기>

 

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반당은 고구려 부흥군이고, 호로하는 옛 고구려 영토 안쪽이며, 파견된 당군은 자기들의 파견 이유에 따라 고구려 영토 안에서 군사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또한 이 기록을 보면 호로하는 평양의 북쪽에 있음이 틀림없다. 평양 이북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패했으니

평양에 남은 사람들이 남쪽 신라로 달아나는 것이다. 만약 평양 이남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패했다면 남쪽 신라로 달아나지 못한다. 살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남쪽에 당나라 군대가 있는데 평양에 있던 사람들이 남쪽으로 달아날 수가 있는가?

 

그해(673) 9월에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신라)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이 기사를 보면 당시 신라의 북쪽 변경이 호로하와 왕봉하임을 짐작케 한다.

또한 이러한 일이 9월에 일어났으니 5월에 고구려 부흥군이 호로하 서쪽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군이 구원하기 위해 북상하여 당과 말갈 거란 연합군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은 모자라는 병력을 채우기 위해 말갈과 거란군을 기다리느라 여전히 호로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신라가 호로하 왕봉하 전투에서 승리하자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 다음,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을 공격하여 멸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라는 기사를 보아도

당의 군사 목표가 고구려 부흥군의 진압임을 알 수 있고 우잠성, 대양성, 동자성 역시 옛 고구려 영토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때문에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도 못하고 군사력이 소진되어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함형 5(674) 2월 임오일태자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서신라를 토벌하도록 보내고이에 영위위경 이필과 우령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가도록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함형 5(674)[신라에서] 고구려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백제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 ()고종이 노하여 조서로 [법민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서울(장안)에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조서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전>

 

674(함형5) 2월 당은 유인궤, 이필, 이근행을 앞세워 신라를 공격하게 된다.

신라를 멸망시키고 문무왕을 없앤 다음 당에 와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내세워 간접통치를 하겠다고 군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한다. 이번 공격목표는 신라라는 말이다.

2차 당의 침입

 

6742월에 출발한 당의 군대가,

 

상원 2(675) 2월에 []인궤가 칠중성에서 그들(신라 군사)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오랑캐(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문무왕)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신라에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로 ()법민(문무왕)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상주· 양주· 강주· 웅주· 전주· 무주· 한주· 삭주· 명주의 9()를 설치하고, ()에는 도독을 두어 10() 내지 20()을 통솔하게 하였다.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편>

 

1년 만인 675 2월에 도착하여 최초로 전투를 벌린 곳이 칠중성이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신라가 칠중성을 치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당이 칠중성에서 이기자 매초성까지 진출한다.

이번에는 당이 신라와 직접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므로 당은 이기면 당연히 남쪽으로 진군한다.

따라서 칠중성이 북쪽에 있고 매초성은 남쪽에 있다.

위 기록을 보면 여기서 나당전쟁이 끝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675)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에워싸 멸하였다.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18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그해(675) 9월에 설인귀가 바다를 통해 천성으로 쳐들어와 싸워 이긴 것은 넘어가고

29일 매초성에서부터 반격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당나라군이 제일 많이 남하한 곳이 매초성이라는 말이다

매초성이 연천이라는 사람이 있고 양주라는 놈도 있으나 아무튼 지금의 서울보다는 북쪽이다.

다시말해서 당나라군이 가장 남쪽으로 내렸왔다는 곳이 서울보다는 북쪽이다.

 

신라의 반격은 북쪽에서 내려온 당과의 싸움이니 당연히 북진이다.

따라서 위에 나오는 안북하, 철관성, 아달성, 칠중성, 적목성, 석현성은 매초성보다는 북쪽이고

이중에 어느 곳은 평양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으로 당은 평양에 있지 못하고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너머 당나라가 말하는 요동성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 6728월 이후부터 6759월까지는 신라와 당의 경계가 크게 보아 평양과 서울 사이 어느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