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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 |
1 |
(함형)3년(762년) 정월 신축일,요주의 오랑캐들이 변경을 침구하여,태자우위부솔 양적수를
요주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문무왕 12년(672) 봄 정월에 (문무)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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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2월에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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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 이근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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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백수성으로부터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 군사를)맞아 싸워 수천 명을 목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 산세(山世), 아찬 능신·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한산주의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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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9월에 살별[彗星]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왕은 지난번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청하여 우리를 쳤을 때, 사정이 급박하여 황제께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쳤었다.
이 때문에 당 조정으로부터 죄를 얻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을 보내 붙잡아 두었던 [당나라] 병선낭장 겸이대후, 내주사마 왕예, 본열주장사(本烈州長史) 왕익,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禰軍), 증산사마 법총과 군사 170명을 돌려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표의 내용은 아래에 따로 복사해 놓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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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2월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무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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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형3년(672년) 이 겨울에,좌감문대장군 고간이 신라의 무리에게 횡수(橫水)에서 대패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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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
5 |
함형4년(673년) 윤 5월 정묘일,연산도총관 이근행이 고구려 반당을 호로하 서쪽에서 깨뜨리니,고구려의 평양에 남은 무리는 신라로 달아나 들어갔다.(구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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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 하다가 일이 탄로나 목베여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은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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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9월에 (문무)왕이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신라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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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을 공격하여 멸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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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 |
1 |
문무왕 14년(674)정월, (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이 당의 서울(장안)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함형 5년(674년)에 [신라에서] 고구려의 항거하는 무리들을 받아들여 [옛]백제 땅을 점령하여
지키게 하였다. (당)고종이 노하여 조서로 [법민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의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서울(장안)에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조서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을 다하여 치라고 하였다.(신당서 동이열전 신라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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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함형)5년 봄 2월 임오일,태자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서,
신라를 토벌하도록 보내고,이에 영위위경 이필과 우령대장군 이근행을 부총관으로 가도록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상원 원년 2월 임오일,유인궤를 계림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신라를 토벌하였다.
(신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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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문무왕이)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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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문무왕이)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
<[문무왕] 10년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다시 봉한 것이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순[歸命]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모르겠다.>
영묘사 앞 길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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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
1 |
(상원)2년 봄 정월 병인일,우전(于闐)으로 비사도독부를 만들고,울지복도웅을 비사도독으로 삼아,그 경내를 10개 주로 나누었는데,(울지)복도웅으로 하여금 토번을 공격한 공이 예전에 있었다. 경오일,구자왕 백소계가 은으로 된 파라(頗羅)를 바쳤다. 신미일,토번이 그 대신 론토혼미를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였으나,불허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상원 2년 정월 신미일,토번이 화의를 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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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상원2년 2월,계림도 행군대총관(유인궤)이 신라의 무리를 칠중성에서 대파하여,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지방물건을 바치고,사죄하니;용서하고,다시 그 왕 김법민(문무왕)에게 벼슬과 작위를 주었다.(구당서 고종 본기)
2월,유인궤와 신라가 칠중성에서 싸워,패배시켰다.(신당서 고종본기)
상원 2년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그들(신라 군사)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오랑캐(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김)법민(문무왕)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신라에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로 (김)법민(문무왕)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상주· 양주· 강주· 웅주· 전주· 무주· 한주· 삭주· 명주의 9주(州)를 설치하고, 주(州)에는 도독을 두어 10군(郡) 내지 20군(郡)을 통솔하게 하였다. 군(郡)에는 태수를, 현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편>
(문무왕)15년(675)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신라) 군사를 깨뜨렸다. (유)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침략해 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군사[九軍]를 내어 그것에 대비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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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4월 신사일,천후(天后:측천무후)가 주왕 (이)현의 왕비 조씨를 죽였다. 기해일,천후(天后: 측천무후)가 황태자를 죽였다.(신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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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김)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에워싸 멸하였다.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18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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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 |
2 |
(상원)3년 2월 갑술일,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구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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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윤3월 기사일-초하루,토번이 선주、곽주、하주、방주 등 4개 주(州)를 침략하였다.
을유일,낙주목(洛州牧)이며 주왕인 (이)현을 조주도 행군원수로 삼고,공부상서 유심례 등 12명의 총관을 거느리며;병주도독이며、상왕인 (이)륜을 양주도 행군원수로 삼고,좌위장군 계필하력 등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여,토번을 토벌하였다. 두 왕은 결국 가지 않았다.
<구당서 고종본기>
의봉 원년 윤3월 기사일,토번이 선주、곽주、하주、방주 등 4개 주(州)를 침구하여,좌감문위중랑장 영호지통이 토벌하였다. 을유일,주왕 (이)현을 조하도 행군원수로 삼아,좌위대장군 유심례 등 12총관을 거느리며,상왕 (이)륜을 양주도 행군원수로 삼아,계필하력 등의 군을 거느리고,토번을 토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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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가을 7월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해 와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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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8월 을미일,토번이 첩주(疊州)를 침구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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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