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9

상 상 2014. 8. 9. 10:36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9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5)

(문무왕) 11(671)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방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帶方)을 침입하였다. 겨울 106일에 당나라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급찬 당천(當千)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문무왕) 12(672)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에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 이근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아 싸워 수천 명을 목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 한산주의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

 

9월에 살별[彗星]이 북방에 일곱 번 나타났다. 왕은 지난번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청하여 우리를 쳤을 때, 사정이 급박하여 황제께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쳤었다. 이 때문에 당 조정으로부터 죄를 얻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原川)과 나마 변산(邊山)을 보내 붙잡아 두었던 [당나라] 병선 낭장(兵船郞將) 겸이대후, 내주 사마(萊州司馬) 왕예(王藝), 본열주 장사(本烈州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禰軍), 증산 사마(曾山司馬) 법총(法聰)과 군사 170명을 돌려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려 죄를 빌었다.

() 아무개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룁니다. 옛날에 신의 처지가 위급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멀리서 건져주신 은혜를 입어 겨우 죽을 것을 면하였으니,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바스러진다 하여도 크나큰 은혜를 갚기 부족하고 머리가 부수어져 재가 되고 먼지가 된다 하여도 어찌 자애로우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읍니까? 그러나 원한 깊은 백제는 저희 나라 가까이까지 침입하면서 황제의 군사를 끌어들여 신을 죽이고 치욕을 갚으려 하였습니다. 신은 파멸의 처지에 놓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런 일의 내용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형벌을 받아 죽게 된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삼가 일의 사정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잠깐 귀를 기울여 들으셔서 근본 이유를 명확히 살펴주십시오.

신은 전대(前代) 이래로 조공을 끊이지 않았으나 근래에 백제 때문에 두 번이나 조공을 빠뜨려서 마침내는 황제의 조정으로 하여금 조서를 내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성토하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죽어도 오히려 남음이 있어 남산(南山)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다 기록할 수 없고 포야(褒斜)의 수풀로도 신을 처벌할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저희 종묘와 사직을 헐어 늪과 연못으로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사정을 듣고 판단을 내려주신다면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신의 관을 옆에 놓고 진흙 묻은 머리도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삼가 형벌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 같으셔서 포용의 빛을 구석구석까지 비추시고, 덕은 천지와 합치하여 동식물 모두 양육의 은혜를 입었으며 살리기 좋아하는 덕은 곤충에게까지 멀리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마음은 물고기와 날짐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만일 복종하면 놓아주는 용서를 내리시고 허리와 머리를 온전하게 해주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산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마음 속의 품은 바를 말씀드리며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원천(原川) 등을 보내 글월을 올려 사죄하고 엎드려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어 마땅하고 또 마땅합니다.

 

이와 아울러 은 33,500[], 구리 33,000, 400, 우황 120, 120, 40승포(升布) 6, 30승포 60필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문무왕) 13(673) 봄 정월에 커다란 별똥별이 황룡사와 재성(在城)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强首)를 사찬으로 삼고 해마다 조[] 200섬을 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 하다가 일이 탄로나 목베여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은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

 

8월에 파진찬 천광(天光)을 중시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9월에 국원성(國原城),<옛날의 완장성(薍長城)이다.>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또는 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하였다.>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었는데, ()에 두 사람 군()에 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없앴으나 이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