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6

상 상 2014. 8. 1. 17:10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6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2)

(문무왕) 9(669) 봄 정월에 신혜법사(信惠法師)를 정관대서성(政官大書省)으로 삼았다.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여 자석을 구하였다.

 

221일에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침공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은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서로 떨어져 먼 곳에 뒹굴게 되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해를 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하신 몸을 생각지 않으시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조회하고 황제께 군사를 청하셨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을 없게 하고, 몇 대에 걸쳐 깊이 쌓인 원수를 갚으며 백성들의 가냘픈 남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심이었다. [선왕께서]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시려던 유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조용하고 편안해졌다.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이미 모두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혼령들에게는 명복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보고 불쌍히 여겨 울어주던 은혜[泣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여 고생하는 사람들은 아직 새롭게 시작할 은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니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하니,

총장(總章) 2(669) 221일 새벽 이전에 5(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받은 죄목 이하로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모두 석방하고, 앞서 사면해 준 이후에 또 죄를 범하여 관작을 빼앗긴 사람은 모두 그 전과 같게 하라.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은 다만 그 몸을 풀어주되, 훔친 물건을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들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빌려 쓴 사람으로서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을 필요가 없고,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곡식이 익을 때에 이르러 단지 원금만 갚고 그 이자는 갚을 필요가 없다. △△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여름 5월에 천정군(泉井郡), 비열홀군(比列忽郡), 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나라에 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각간 흠순과 파진찬 양도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하였다.

 

겨울에 당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사찬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당으로] 돌아갔다. [당에서 그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 나갔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 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재목이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에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자 곧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았는데 60보를 나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신도 역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마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로써 위협하였으나 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왕이] 말기르는 목장 무릇 174곳을 나누어 주었는데 소내(所內)22,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태대각간 유신에게 6, 대각간 인문에게 5, 각간 일곱 명에게 각각 3, 이찬 다섯 명에게 각각 2, 소판 네 명에게 각각 2, 파진찬 여섯 명과 대아찬 열두 명에게 각각 1곳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 74곳은 적절하게 나누어 주었다.

 

(문무왕) 10(670) 봄 정월에 [당나라]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4일에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켰다.

 

6월에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다음과 같이 슬피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한기부(漢祗部)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므로 벼 200섬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義官), 천관(天官) 등이 성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을 목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베었으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은 △△△()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용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에게 각각 급찬의 관등을 주고 조()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사찬 수미산(須彌山)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리노라. ()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잇고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땅은 천리를 개척하였고 햇수는 장차 800년이나 되려 하였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형제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 사직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 나라에 의탁하였다.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 무릇 백성에게는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돌보아 주심이 있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함에 공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펼치고 공을 고구려 왕으로 삼을지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왕업을 잇고 일으켜 영원히 이웃 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삼가하고 삼가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 갖춘 말 한 필, 무늬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곱게 짠 베[細布] 10, 목화솜[綿] 15()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12월에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고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중시 지경(智鏡)이 물러났다. 왜국(倭國)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백제의 [6글자 결락]를 취하고 저쪽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眞珠)를 보내 목베었다.[다음의 주는 결자가 많아 해석 불능]<十二△△△賁書所六△△僵事同異可攷>

삼국사기 권 제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