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8

상 상 2014. 8. 6. 17:29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8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4)

대왕이 답서에서 일러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648)에 입조(入朝)하여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玉帛]와 사람들은 나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기일을 정해주셨읍니다. 신라 백성들이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문제(文帝: 당태종)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셔서[踐祚]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으셨는데, 인자한 베푸심을 자주 입어 지난날보다 정도가 더하였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금인(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니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일이오라 몸이 바스러지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부리시는데 쓸모가 되기를 바랬으며, 간과 뇌를 땅에 발라서라도[肝腦途原]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현경(顯慶) 5(660)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마저 이루어지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 남겨둔 사업을 이루고자 하여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끄실 수 없었으나,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셔서 억지로 국경까지 나가 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가 서로 호응하고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적의 큰 부대를 격파하고 양군이 같이 [백제] 왕도에 도착하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선왕께서는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상의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역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후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웅진]부성(府城)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에워싸 지키니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서로 바꿔 잡아먹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현경] 6(661)에 이르러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므로, 웅진의 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공격하러 갔다가 적에게 격파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싸움에 패한 이후 웅진에서 군사를 청함이 밤낮 계속되었는데, 때마침 신라에는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청하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러 갔으나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달려와 공격하여 많은 군사와 말을 잃고 이득없이 돌아오게 되니, 남쪽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웅진부성을 에워싸니 이로써 웅진은 길이 끊겨서 성 안에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그 곤경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6월에 이르러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의식은 겨우 끝났으나 상복을 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구원 요청에] 응하여 달려갈 수 없었는데,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와서 칙명을 받든 바,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나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웅진부성이 고립되어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의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이 마침내 저와 함께 동행하여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쳐서 곧 옹산을 함락시키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의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명을 어기게 될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늙고 약한 자를 시켜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도중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00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 2(662) 정월에 이르러 유총관은 신라의 양하도(兩河道)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눈보라가 치고 날씨가 몹시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다는 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였고 신라 군사도 양식이 다 떨어졌으므로 역시 군사를 돌렸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하여 길에서 죽은 사람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마자 적의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사들이 집에 돌아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부성에서 자주 곡식을 요구하였는데, 전후로 보낸 것이 수만 섬에 달하였습니다. 남으로는 웅진으로 [식량을]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다 써버려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웅진의 중국 군사는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헤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는 백성들에게 할당하여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늘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그 때마다 항상 신라가 구원하여 풀어주었습니다.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 이하 군사 모두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은혜가 비록 끝이 없다 하지만 신라에서 충성을 바친 것 또한 가엽게 여길 만한 것입니다.

 

용삭 3(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거느리고 부성(府城)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 군사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 왜의 배 1천 척은 백강(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지를 깨뜨리니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져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 하나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으나, 그들이 굳게 지키고 반항하였으므로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대부(杜大夫)칙명에 의거하면 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으니,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라가 생각하기에,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이후에 서로 함께 회맹(會盟)하라고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니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고 또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한이 없고 이랬다 저랬다 함이 무상하니 지금 비록 함께 맹약을 맺는다 하여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 걱정이 생길 것이라 하여 맹약 맺는 일을 중지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습니다.

 

인덕(麟德) 원년(664)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약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회맹한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이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취리산(就利山)에 제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을 상대로 피를 마시고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기 생업을 꾸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건봉(乾封) 2(667)에 이르러 대총관 영국공(英國公)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를 국경으로 보내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쳐들어가서는 안되겠기에 먼저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정탐이 돌아와 모두 말하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의 사인(使人)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군사는 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 군량을 공급하고 와서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군사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건봉 3(668)에 이르러 대감 김보가(金寶嘉)를 보내 바닷길로 들어가 영공(英公)[이적]의 분부를 받아오게 하였더니, 신라 군사는 평양으로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받아왔습니다.

5월에 유 우상(劉右相)이 와서 신라의 군사를 징발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는데 나도 또한 한성주에 가서 군사들을 검열하였습니다. 이때 번방(蕃方)의 군사와 중국의 여러 군대가 사수(蛇水)에 모두 모여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 승부를 결판내려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영공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00명을 뽑아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평정하고 큰 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군사는 모두 정벌을 시작한 이래 이미 9년이 지나 인력이 다할 대로 다하였지만 끝내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두고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반드시 우리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한 은택을 입을 것이요, 인민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공이 넌지시 말하기를 신라는 전에 군대 동원기일을 어겼으니 모름지기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두려움이 더했습니다.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는데,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곧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고 하여 군장(軍將)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겨 살게 하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가]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를 평정할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게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었지만 끝내 반역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나라 안에 감추고는 번번이 찾아도 끝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소식을 들으니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였습니다. 또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한성 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보내고 그와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의 땅을 습격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를 목베고 꾀하였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형(咸亨) 원년(670)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알리기를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모여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이 여기에 와서 함께 의논하기를 군사를 일으킨 이후에 피차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을 서로 바꾸어서 볼모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장귀(首彌長貴) 등을 보내 웅진부로 향하게 하여 볼모 교환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볼모 교환을 승낙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여 밤이 되면 와서 공격하곤 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펴서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 주었다 한 번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니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후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이니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런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으나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는 바람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반역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당나라] 고관[貴臣]의 뜻을 잃었고 후에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소가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도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사인(使人) 임윤(琳潤)이 영광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이르러서야 총관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쇠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여야 할 것이나,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사는 까닭에 예를 드리지 못하고 제때에 미처 영접을 못하였으니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관이 보내온 편지를 펴서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반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래 마음이 아니어서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공로를 스스로 헤아린다면 욕된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다물고 책망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지금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간략히 진술하고 반역한 사실이 없음을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일의 근본과 사유를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수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 하여 누선(樓船)들이 푸른 바다에 가득하고 배들이 잇대어 강어귀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을 생각하여 저희 신라를 공격하시는 것입니까?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당하더니 들에 짐승이 없어지자 요리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을 받고 중국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비록 그 빛을 비춰주지 않으나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께서는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타고났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자질을 품고 있으며 일곱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고 아홉 가지 학문을 섭렵하셨으니, 황제의 책벌을 삼가 집행함에 있어 죄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벌을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키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이유를 묻는 서신을 보내왔으니, 이에 반역하지 않았음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리셔서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림주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이 사룁니다.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