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5

상 상 2014. 7. 30. 17:08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5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1)

(문무왕) 8(668) 봄에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元器)[]정토(淵淨土)를 당에 보냈다. 연정토(淵淨土)는 그 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는데, 칙명을 내려 이후로는 여인 바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았다.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살별[彗星]이 천선(天船) [별자리]를 지켰다.

 

612일에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유인궤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고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 김인문으로 하여금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맞이하게 했다. 이에 우상(右相)[군사 동원기일] 약속을 마치고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흠순·천존·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개원·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22일에 웅진부성의 유인원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2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湌)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다.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 및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7일에 왕이 서울을 출발하여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9일에 여러 도()의 총관들이 출발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질(風疾)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인문 등은 영공을 만나 영류산(嬰留山)<영류산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아래까지 진군하였다.

 

가을 716일에 왕이 한성에 이르러 여러 총관들에게 명하여,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싸워 크게 무찔렀다.

 

921일에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영공을 찾아 뵙고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갔는데,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수행하였다. 처음에 대군이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肹次壤)에 이르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겨울 1022일에 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주었다. 그 이외 이찬과 장군들을 모두 각간으로 삼았고, 소판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대당 소감(大幢小監) 본득(本得)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여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에서의 싸움에서 공이 제일 많았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관등을 주고 조()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서당 당주(誓幢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평양 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관등과 조 700섬을 내려 주었다.

군사(軍師)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의 관등과 벼 1천 섬을 내려 주었고, 군사 부양(斧壤)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므로 술간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려 주었다. 가군사(假軍師) 비열홀의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싸움에서 공이 제일 많았으므로 고간(高干)의 관등과 벼 500섬을 내려 주었다. 한산주 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사천 싸움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제일이었으므로 일길찬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아술(牙述)의 사찬 구율(求律)은 사천 싸움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진격하여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軍令)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그는] 분하게 생각하고 목매어 죽고자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죽지 못했다. 25일에 왕이 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욕돌역(褥突驛)에 이르렀는데, 국원 사신(國原仕臣) 대아찬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어 왕과 시종하는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緊周)의 아들 능안(能晏)15살인데 가야의 춤을 추어 보였다. 왕이 그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앞에 불러 등을 어루만지며 금술잔에 술을 권하고 폐백(幣帛)을 자못 후하게 주었다.

 

115일에 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돌어왔다.

6일에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先祖廟]에 배알하고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삼가 조상들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게 죄를 묻고 원흉들을 처단하여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시여 들으소서!”

18일에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소감(少監) 이상에게는 10△△, 종자(從者)에게는 20필을 주었다.

 

12월에 영묘사에 불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