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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4년(674)
봄 정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대나마 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배워서 돌아와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이 당의 서울[京師]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가을 7월에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을 무너뜨렸다.
8월에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하였다.<[문무왕] 10년에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다시 봉한 것이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귀순[歸命]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모르겠다.>
영묘사 앞 길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
(문무왕) 15년(675)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침략해 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군사[九軍]를 내어 그것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鄕導]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천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 멸하였다. 현령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石峴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문무왕) 16년(676)
봄 2월에 고승 의상(義相)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에 살별[彗星]이 북하(北河)와 적수(積水) 두 별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쯤 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와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재상 진순(陳純)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
(문무왕) 17년(676)
봄 3월에 강무전(講武殿) 남문(南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좌사록관(左司祿館)을 처음 두었다. 소부리주에서 횐 매를 바쳤다.
(문무왕) 18년(678)
봄 정월에 선부령(船府令) 1인을 두어 선박에 관한 일을 맡게 하고 좌·우리방부(左右理方府)에 경(卿)을 각 1인씩을 더 두었다.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 오기(吳起)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3월에 대아찬 춘장(春長)을 중시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아찬 천훈(天訓)을 무진주(武珍州) 도독으로 삼았다.
5월에 북원(北原)에서 이상한 새를 바쳤는데, 깃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 털이 나 있었다.
(문무왕) 19년(679)
봄 정월에 중시 춘장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서불한 천존(天存)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여름 4월에 형혹(熒惑)이 우림(羽林) [별자리]를 지켰다.
6월에 태백성이 달의 자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參大) [별자리]를 침범하였다.
가을 8월에 금성[太白]이 달에 들어갔다.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東宮)을 짓고 궁궐 안팎의 여러 문 이름을 처음으로 정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완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문무왕) 20년(680)
봄 2월에 이찬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가지 채색 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왕의 여동생<또는 잡찬 김의관(金義官)의 딸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무엇보다 우선이고, 왕의 교화의 기틀은 후손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왕의 까치 둥지[鵲巢]에 자리가 비어 있어 닭이 울었음을 일러줄 아내 얻을 생각이 있을 것이고, 안에서 도와줄 배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두어 길이 집안을 일으킬 사업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좋은 때 좋은 날에 옛 법도를 따라 내 누이의 딸로써 배필을 삼게 하니 왕은 마땅히 마음과 뜻을 함께 돈독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이 무성하게 하여 길이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장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름 5월에 고구려 왕이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은 말씀을 올립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이르러 교지를 받들어 선포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려, 생질로써 저의 안주인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윽고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엇갈려 어찌한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컨대 요임금은 딸을 규(嬀)에게 시집보내고 주(周)의 왕은 공주를 제(齊)나라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신성한 덕을 드러내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원래 용렬한 부류로 행동과 재능이 이렇다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운수를 만나 성인의 교화에 젖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택을 받았으니, 은혜를 갚고자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거듭 대왕의 총애를 입어 대왕의 인척을 내려주었습니다.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표하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갖추어 좋은 달 좋은 때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에 만나기 힘든 행운을 하루 아침에 얻었습니다. 처음에 바라지 못했던 일이고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그러한 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선조 이하가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직접 찾아 뵙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표(表)를 올려 아룁니다.』
가야군(加耶郡)에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문무왕) 21년(681)
봄 정월 초하루에 하루 종일 밤처럼 어두웠다. 사찬 무선(武仙)이 정예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비열홀을 지켰다. 우사록관(右司祿館)을 설치하였다.
여름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유성이 삼대성(參大星)을 침범하였다.
6월에 천구(天狗)가 서남쪽에 떨어졌다. 왕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여 승려 의상(義相)에게 물어보니, 의상이 대답하였다
“비록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업이 길 것이요,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만들지라도 또한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이에 왕이 공사를 그만두었다.
가을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왕이 화(化)하여 용이 되었다 하고 또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大王石)이라 한다.
왕의 유조(遺詔)는 다음과 같다.
『과인은 나라의 운(運)이 어지럽고 싸움의 때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무리를 치고 협조하는 무리를 불러들여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평안케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안심시켰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수를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상을 두루 주었고, 벼슬을 터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어질고 장수(長壽)하는 땅으로 이끌었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주니 집집이 넉넉하고 백성들이 풍요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산언덕처럼 쌓여 있고 감옥은 풀이 무성하게 되니, 신과 인간 모두에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있는 이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오(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의 빛나는 향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魏)나라 임금이 묻힌 서릉(西陵)의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전할 뿐이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서책(書冊)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끝이 없을 것이나, 이와 같은 일은 즐거이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하라. 상복을 입는 등급은 정해진 규정이 있거니와 장례 치르는 제도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힘쓰라. 변경의 성·진(城鎭)을 지키는 일과 주·현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도록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시행하도록 하라.』
삼국사기 권 제7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