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11

상 상 2014. 8. 13. 17:53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11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4) 연표(1)

기 사

668

9

계사일 평양 함락(신구당서 고종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본기)

12

고구려의 5, 176,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 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본기)

669

2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5

총장25월 경자일고구려의 집 수 28,200호와수레 1,0803,3002,900낙타 60두를 옮겨장차 내지에 들여 놓게하고내주(萊州)와 영주(營州)2개 주()에서 두 번째로 다시 추방하여양자강과 회수 이남(以南) 및 산남과 병주와 양주(涼州) 이서(以西) 여러주 빈 땅에 헤아려 분배하여 안치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7

(총장)27월 계사일좌위대장군 계필하력을 오해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토욕혼을 구원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총장 2(669) 고구려의 백성 3만명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670

1

(총장)3년 봄 정월 신묘일여러 요동의 땅을 주와 현으로 만들었다.(구당서 고종본기)

 

문무왕 10(670) 봄 정월에 [당나라]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3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4

여름 44(당나라 군사와) 마주 싸워 우리(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켰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이 나라를 부흥하려고 당나라에 배반하고, 보장왕의 외손 안순(安舜:안승)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의 대장 겸모잠(鉗牟岑)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장(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간을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이근행을 연산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사평태상백 양방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鉗牟岑)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도호부의 치소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의 원병(援兵)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은 그들을 발로하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한 수가 1만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의 패잔병들은 다시 군열을 정비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어울려 신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만에 평정되었다.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여름 4토번이 백주 등 18주를 침구하여 함락시켰으며또 우전(于闐)과 무리를 합쳐 구자의 발환성을 습격하여함락하였다. 안서 4진을 파하였다.

신해일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라사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우위원외대장군 아사나 도진과 좌위장군 곽대봉을 부(총관)으로 삼아병사 5만을 거느리고 토번을 쳤다.<구당서 고종본기>

 

함형 원년 4월 계묘일토번이 구자의 발환성을 함락하였다. 안서 4진을 폐지하였다.

신해일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라사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토번을 토벌하였다.

경오일고려 추장 검모잠이 반란을 일으켜변경을 침구하니좌감문위대장군 고간을 동주도 행군총관으로 삼고우령군위대장군 이근행을 연산도 행군총관으로 삼아토벌하였다.

<신당서 고종본기>

 

함형 원년(670) 4월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라사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좌위원외대장군 아사나 도진과 우위장군 곽대봉을 부장으로 삼아 무리 10여 만을 이끌고 토벌하게 했다. 군대가 대비천(大非川)에 이르렀을 때, 토번의 대장 논흠릉에게 패배하여, ()인귀 등은 모두 죄를 물어 제명되었다.<구당서 토번전>

 

함형 원년(670)[토번이] 기미(羈縻)18()를 침략했는데, 우전(于闐)을 이끌고 와서 구자 발환성을 공격하여 취하니 이때 안서(安西) 4()이 모두 없어졌다.

조서를 내려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라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좌위원외대장군 아사나도진과 좌위장군 곽대봉을 부관으로 삼아 출병하여 토번을 토벌하고 아울러 토욕혼을 호송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군대가 대략 십여 만이었는데 대비천(大非川)에 이르러 흠릉에게 공격을 받아 천자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흠릉은] 드디어 토욕혼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모두 차지했다. <신당서 토번전>

6

6월 고구려 수임성 사람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다음과 같이 슬피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함형(咸亨) 원년(670)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중 문무왕의 답신에서)

7

가을 7월에 (문무)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게 하였다. (문무)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어 돌려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義官), 천관(天官) 등이

63곳을 쳐서 빼앗고 그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을 목베었으며, 군관과 문영 등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베었으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은 △△△()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용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에게 각각 급찬의 관등을 주고 조()를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가을 7월 무자일설인귀와 곽대봉이 대비천에 도착하였는데토번 대장 론흠릉에게 습격당하여대패해서()인귀 등이 모두 연좌되어 제명당했다. 토욕혼 온 나라가 전부 몰락하고

오직 모용 낙갈발과 그 측근자 수천 장막만이 내속하니이에 영주(靈州) 경계에 이주시켰다.

<구당서 고종본기>

 

7월 무자일설인귀와 토번이 대비천에서 싸웠으나(설인귀가) 패배하였다.<신당서 고종 본기>

9

9월 갑인일강각을 양주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토번을 토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10

겨울 10월 계유일큰 눈이평지(平地)3척 남짓내려여행자에게는 솜을 주고 얼어죽은 자에게는 관 짜는 나무를 지급하였다. 옹주와 동주화주의 가난한 집으로 하여금15세 이하가 되어 생존이 불가능한 자는일절 남녀를 누구나 맡아 기르는 것을 용납하고부리는데 충당하여모두 장차 노비가 되지 않게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이해에천하의 40여 주()가 가뭄과 서리, 벌레의 피해로 백성들이 굶주렸는데관중지방(장안)이 더욱 심하였다. 조서로 명하기를 멋대로 여러 주에서 양식을 쫒아가니이에 강남의 조세미()를 돌려 구휼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이해에대기근(大饑: 식량부족으로 인한 대규모 굶주림)이 들었다.(신당서 고종본기)

671

1

문무왕 11(671) 봄 정월에 이찬 예원(禮元)을 중시로 삼았다.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여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죽었다. 말갈 군사가 쳐들어와 설구성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차 물러가려 하자, 군사를 내어 쳐서 300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眞功아찬 △△△△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6

6월에 장군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3백 명을 목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7

가을 726일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중략)-----------

(문무)대왕이 답서에서 일러 말하였다.

-------------(중략)-----------(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설인귀의 편지와 문무왕의 답서는 여기에 있기는 분량이 좀 많고 핵심 파악에 방해가 되므로

아래에 따로 복사해 놓았음>

7

고간이 안시성에서 (고구려의)남은 무리를 깨뜨렸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9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번방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帶方)을 침입하였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10

겨울 106일에 당나라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