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년 (AD 56) :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번역문]
4년(서기 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다.
7 년 (AD 59) : 고안연에서 흰 물고기를 낚아 잡았다.
[번역문]
7년(서기 59) 여름 4월에 왕은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낚아 잡았다.
가을 7월에 서울에 큰 물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겼다.
10 년 (AD 62) : 동쪽으로 사냥 나가 흰 사슴을 잡았다
[번역문]
10년(서기 62) 가을 8월에 동쪽으로 사냥 나가 흰 사슴을 잡았다. 나라의 남쪽에 누리가 날아 곡식을 해쳤다.
16 년 (AD 68) :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하여 왔다.
[번역문]
16년(서기 68) 가을 8월에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20년 (AD 72) : 달가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번역문]
20년(서기 72) 봄 2월에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22 년 (AD 74) : 설유를 보내 주나를 정벌하고,
[번역문]
22년(서기 74) 겨울 10월에 왕은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25 년 (AD 77) : 부여 사신이 사슴과 토끼를 바쳤다.
[번역문]
25년(서기 77) 겨울 10월에 부여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은 상서로운 물건으로 여기고 크게 사면하였다.
11월에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렸다.
46 년 (AD 98) : 책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번역문]
46년(서기 98) 봄 3월에 왕은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는데, 책성의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베풀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왕은 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
50 년 (AD 102) : 사신을 보내 책성 백성을 위로하였다.
[번역문]
50년(102)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책성 백성을 안심시키고 위로하였다.
53 년 (AD 105) :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번역문]
53년(105) 봄 정월에 부여의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 두 자나 되었고 털 색깔이 매우 밝았으나 꼬리가 없었다.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에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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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태조대왕의 영토확장 사업이 눈에 띕니다.
첫째가 요서에 10성을 쌓았고(어제 올린 글- 고구려의 영토가 요서까지 확장되었음을 볼수 있음),
둘째가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 살수까지 이르렀습니다.
셋째가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온 일,
넷째가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다섯째 주나(朱那)를 정벌한 것입니다.
2) 동옥저(東沃沮) 정벌 기사에서‘창해(滄海)’라는 말이 나오고 있음을 볼때
우리 조상들은 동해(東海)를‘창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갈사국에 대하여...
갈수국은 대무신왕이 부여왕 대소를 죽였을때 대소의 막내동생이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갈사국왕이 되었는데,
그 사람의 손자가 태조대왕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온 것입니다.
이렇게 갈사국이 망함으로써 동부여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4) 태조대왕이라는 호칭에 대하여...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태조대왕은 동생인 차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럴 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나 앉은 분을 ‘상왕’이라고 부르는데 고구려때는 ‘태조대왕’이라고 칭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태조대왕이라는 명칭은 살아 생전에 올린 존호이지 이때부터 왕이 시작되었다는 시호가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단재선생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조선상고사의 내용)
『태조대왕을 전사(前史)에는 시호라고 하였으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시호법을 쓰지 아니하고
생사에 그 공적을 찬양하여, `태조(太祖)' 혹은 `국조(國祖)' 라고 하는 존호(尊號)를 올렸으며,
차대왕은 그 공적이 태조대왕 다음 간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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