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본기- 4

상 상 2011. 11. 27. 21:56

71 년 (AD 123) : 목도루 등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번역문]

71년(서기 123년) 겨울 10월에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72 년 (AD 124) : 가을 9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번역문]

72년(124) 가을 9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80 년 (AD 132) : 수성은 왜산에서 사냥하고 잔치를 열었다.

[번역문]

80년(서기 132년) 가을 7월에 수성은 왜산(倭山)에서 사냥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열었다.

 

이때 관나(貫那) 우태 미유(彌儒),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수성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당신은 헤아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성은 말하였다.

“뒤를 잇는 것은 반드시 맏아들이 하는 것이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왕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엿보겠느냐?”

 

미유가 말하였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으니 당신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로써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86 년 (AD 138) : 수성은 사냥하면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번역문]

86년(서기 138년) 봄 3월에 수성은 질양(質陽)에서 사냥하면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놀고 즐기는데 헤아림이 없었다.

가을 7월에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고 5일 만에 돌아왔다.

 

그 아우 백고(伯固)가 간하였다.

“화복(禍福)에는 문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왕의 아우의 몸으로 모든 벼슬아치의 으뜸이 되어,

지위가 이미 지극하며 공로도 역시 큽니다. 마땅히 충의로써 마음을 지키고, 예절로써 사양하며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위로는 왕덕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부귀가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재난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즐거움을 탐하여 근심거리를 잊고 있으니, [나는] 은밀히 당신을 위하여 위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성은 대답하였다.

“무릇 사람의 심정으로 누가 부귀하고도 환락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얻는 자는 만에 하나도 없다.

지금 내가 즐길 수 있는 형편에 있는데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

[수성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90 년 (AD 142) :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번역문]

90년(서기 142년) 가을 9월에 환도(丸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왕이 밤에 꿈을 꾸는데 한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깨물어 잘랐다. 깨어서 그 길흉 여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호랑이는 백수의 으뜸이고, 표범은 같은 종류의 작은 것입니다.

그 뜻은 왕족으로서 대왕의 후손을 끊으려고 음모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은 불쾌하여 우보 고복장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꿈에 본 것이 있었는데, 점치는 사람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고복장이] 대답하였다.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재앙이 거꾸로 복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집처럼 근심하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시니,

비록 작은 이변이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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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태조대왕 71년(서기 123년) 기록 ‘겨울 10월에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고’라는 기록은

단재선생으로부터 호된 야유를 받은 기록입니다.

 

저번에도 밝혔듯이 ‘패자’라는 직위가 ‘좌보’인데, 패자와 좌보가 같은 것임을 모르고‘패자...를 좌보로 삼고’라고

버젓이 기록을 남겼으니 웃음거리 라고 한 것입니다. 마치 ‘동생 아무개를 아우라고 불렀다’와 같이 동생이 아우인지도 모르고

(같은 뜻인지도 모르고) ‘동생...을 아우라고 불렀다’와 같은 말에 대한 무지(無知)를 나타내었으니 어찌 웃음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단재선생의 말씀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이두와 한역(漢譯)의 이동(異同)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을 만들었다.” “패자(沛者)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

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조선상고사 중에서...)

 

이중에서 바로 “패자 목도루(穆度婁)를 좌보로 삼았다.” 는 대목이 “패자(沛者)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에 해당합니다.

 

2)80년(서기 132년) 기록 중 ‘관나(貫那) 우태 미유(彌儒),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수성(차대왕)의 추종자들(한패)입니다.

 

다음 ‘관나, 환나, 비류나’ 이런 말도 단재선생의 조선 상고사 아니면 알수 없는 말입니다.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관나’는 고구려 5부 중에서 남부를 가리키는 말이며 ‘환나’는 어느 부를 가리키는지 본인는 모르겠습니다.

‘비류나’는 ‘관나’의 별명이므로 남부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음 ‘우태’는 `일치'로 도부(圖簿)와 사령(辭令)을 맡아보며, 이두자로 `을지(乙支)' 혹은 `우태(優台)'라 썼다고 합니다.

 

그 다음 ‘조의’는 ‘당시의 선배 수령(우두머리)’라고 합니다.

 

3) 미유 어지류 양신 세사람은 수성(차대왕)에게 왕위찬탈의 음모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 태조대왕은 나이가 이때 벌써 86세이고

수성(차대왕)도 이미 나이가 62세이니 왕위가 자기(차대왕)에게 안오고 태조대왕의 아들에게 갈 확률이 높아서입니다.

 

사실 태조대왕때 수성은 나라에 세운 공이 매우 커서 군무(군대)와 정사(정치)를 도맡아 보았습니다.

태산같은 공을 세우고도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의 추종자(한패)들이 왕위 찬탈의 음모를 말한 것입니다.

 

미유가 말한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다.”는 말은 대무신왕의 뒤를 이은 민중왕을 말한 것입니다.

 

4) 86년(서기 138년) 기록 중에서 ‘백고’가 나오는데 이분은 차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신대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