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년 (AD 107) : 질산에서 사냥하여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번역문]
55년(107) 가을 9월에 왕은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하여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東海谷)의 관리가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다.
56 년 (AD 108) : 백성들이 굶주리자 사신을 보내 진휼하였다.
[번역문]
56년(108)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자 땅이 벌거숭이가 되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왕은 사신을 보내 진휼하였다.
57 년 (AD 109) : 한나라 안제가 원복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번역문]
57년(109) 봄 정월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을 축하하였다.
59 년 (AD 111) :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번역문]
59년(111)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에 이르기를 『이해 3월에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혹 속하기를 구하였는지 또는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62 년 (AD 114) :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번역문]
62년(114)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은 남해를 순수하였다.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64 년 (AD 116) :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번역문]
64년(116) 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66 년 (AD 118) :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번역문]
66년(118) 봄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에 누리(메뚜기떼)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8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어질고 착한 사람과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자 및 늙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69 년 (AD 121) : 한나라 유주 자사 풍환 등이 침입
[번역문]
69년(121) 봄에 한나라의 유주(幽州) 자사(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수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은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廟)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곤궁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숙신(肅愼)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11월에 왕은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왕은 수성이 군무와 정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70 년 (AD 122) :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번역문]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
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태조대왕 57년(서기 109년) 기록 ‘안제(安帝)가 원복(元服)을 입은 것’중
‘한나라 안제’는 후한 제6대 황제가 된 인물이며, 원복은 관례 때 입는 의관으로, 안제가 관례를 치룬 것입니다.
2) 59년(서기111) 기록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는 것은
후한서에 나온 기록을 삼국사기에 쓴 것입니다. 즉,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중에 있는 기록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서기 111년; 고구려-高句麗, 태조왕-太祖王 59)에 궁(宮-태조대왕의 이름)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구(求)하였다.』을 그대로 삼국사기에 옮겨 쓴 것입니다.
다음,
“통감(通鑑)에 이르기를 『이해 3월에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혹 속하기를 구하였는지 또는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는 기록에서 통감은 자치통감을 말한 것이고
자치통감에는 이해(서기 111년) 3월에 고구려왕이 현도를 쳤다고 되어 있으니 한쪽(후한서)은 복속(항복)을 구했다고 하고
다른쪽(자치통감)은 반대로 ‘쳤다(공략했다)’고 하니 어떻게 된 것인지 알수 없다고 한 것이고,
따라서 ‘어느 하나는 틀린 것이다.’라고 편저자 김부식이 쓴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삼국사기를 쓴 고려 때(서기 1145년-인종 23년)에도 기전체 사서를 정사(正史)로 삼고,
편년체 사서는 부본(참고 사서)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66년(서기 118년) 기록 ‘8월에 효성이 있어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천거’ 한 것은 중국 한나라에서는'효렴제’라는
관리 등용법입니다.
4) 69년(서기 121년) 봄 기록에서 ‘아우 수성’이 나오는데 이분이 바로 태조대왕의 뒤를 이어 대왕이 되신 ‘차대왕’입니다.
5) 69년(서기 121년) 기록 『여름 4월에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수현(遼隊縣)을 쳤다.』는 것은,
유리왕때(2대 왕) ‘부분노’의 계책을 받아들여 선비를 쳐서 속국으로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래도 선비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고구려가 원정할 때 선비를 데리고 나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투기법을 고구려로부터 습득하고 선비족은 중원으로 들어 가게 되고,
나중에 5호 16국의 맹주가 되고, 화북을 통일하며 끝내는 수나라로 이어져서 중국을 마침내 통일합니다.
6) 69년(서기 121년) ‘겨울 10월에 왕은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廟)에 제사’ 지낸 기록을 보면
이때에도 여전히 고구려와 부여가 밀접한 관계임을 알수 있습니다.
고구려왕의 어머니가 부여사람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12월에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는 기록도 후한서의 기록을 전재한 것인데,
이를 보면 아직도 부여가 멸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부여는 고구려 제 3대 임금인 대무신왕(이름 무휼)때 부여왕 대소가 괴유의 칼에 죽임을 당했고,
그 여파로 대소의 막내동생은 부여가 망할 줄 알고 부여를 나와 갈사국왕이 되고,
대소왕의 사촌동생은 나라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하며, 부여사람 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로 투항 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뒤,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가 나라를 들어 태조대왕에게 항복함으로써 동부여는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부여는 북부여로 보입니다. 북부여는 그동안 계속해서 존속하였고
따라서 부여왕이 있고 그 아들 위구태를 보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왔다는 것을 보면
북부여는 강국으로 태조대왕때까지 나라가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70년(서기 122년)년조의 기록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는 기록도 후한서의 기록을 전재한 것이며
여기에 나오는 마한에 대해 편저자 김부식은 그 정체를 모르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중국사람들이 백제를 늘 마한으로 부르고 기록한 것을 김부식이 몰라서 생긴 오해입니다.
(심지어 백제가 망했을 때도 중국 사람들은 백제를 마한이라고 불렀음)
8) 오늘 중국과 관련된 기록은 후한서의 기록을 재단하여 삼국사기에 전재한 것인데
오늘 올린 본문과 관련된 후한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제 영초(安帝 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궁(宮: 태조대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구(求)하였다.
원초(元初) 5년(A.D.118; 高句麗 太祖王 66)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략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 건광 원년(建光 元年)(A.D.121; 高句麗 太祖王 69) 봄에, 유쥬자사 풍환(幽州刺史 馮煥)과 현도태수 요광(玄菟太守 姚光)과
요동태수 채풍(遼東太守 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渠師)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兵馬)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태조대왕)은 이에 사자(嗣子:왕위 계승자) 수성(遂成: 차대왕)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姚光)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遂成)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姚光)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遂成)은 이 틈을 타 험요지(險要地)를 점거하여 [姚光 등의] 대군(大軍)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성곽(城郭)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後漢은] 광양(廣陽)·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탁군(涿郡)·요동속국([遼東]屬國)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姚光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貊人)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 여름에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족(鮮卑[族]) 8천여명과 함께 요수현(遼隊[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현(新昌[縣])에서 추격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공조(功曹)인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인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인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가을에 궁(宮:태조대왕)이 드디어 마한(馬韓)·예맥(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포위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주([幽]州)·현도군([玄菟]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宮)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고구려 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본기- 5(끝부분) (0) | 2011.11.28 |
|---|---|
|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본기- 4 (0) | 2011.11.27 |
|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본기- 2 (0) | 2011.11.25 |
|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1 (0) | 2011.11.24 |
| 고구려 제5대 모본왕 본기 (0) | 2011.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