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5대 모본왕 본기

상 상 2011. 11. 23. 22:00

0 년 (AD 48) : 모본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모본왕(慕本王)은 이름이 해우<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하였다>이고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죽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람 됨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며 국사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1 년 (AD 48) : 홍수가 나서 산이 무너졌다.

[번역문]

원년(서기 48) 가을 8월에 홍수가 나서 산이 20여 군데 무너졌다.

겨울 10월에 왕자 익(翊)을 왕태자로 삼았다.

 

2 년 (AD 49) : 봄에 한나라와 다시 화친하였다.

[번역문]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4 년 (AD 51) : 왕은 날로 포학해져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번역문]

4년(서기 51)에 왕은 날로 포학해져 앉아 있을 때에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 삼았다.

사람이 혹 움직이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에게 쏘았다.

 

6 년 (AD 53) : 겨울 11월에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번역문]

6년(서기 53) 겨울 11월에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두로는 모본 사람으로 왕의 좌우에서 시중하였는데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우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

 

두로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그를] 눌러 끌어다 앉자, 이에 칼을 뽑아 왕을 죽였다.

마침내 모본원(慕本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모본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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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여기서 고구려 왕계를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본왕이 5대 임금인데

시조가 주몽 → 2대 유리왕 → 3대 대무신왕(유리왕의 3남) → 4대 민중왕(대무신왕의 아우, 즉 유리왕의 아들)

→ 5대 모본왕(대무신왕의 맏아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3대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리다고 하여 숙부(작은 아버지)가 왕을 하고 이제 태자가 왕위를 이은 것입니다.

또한 민중왕이 유리왕의 아들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유리왕의 아들을 살펴보면

맏아들이 태자 도절입니다. 둘째 아들이 태자가 된 해명이며, 셋째 아들이 대무신왕인 무휼입니다.

그 다음이 대무신왕의 아우로써 민중왕이 된 해색주(解色朱)이고

이밖에 물에 빠져죽은 여진(如津)이 있고,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라는 사람도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리왕은 적어도 6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2) 모본왕의 이름이 해우(解憂)<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이 앞의 왕인 제4대 왕 민중왕의 이름도 해색주(解色朱)이어서 부여의 왕 해부루, 북부여의 왕이며

고구려 시조 추모왕(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와 비교해보면 고구려 왕가의 성씨가 '해'씨 같은데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더이상 언급을 못하겠습니다.  

 

3) 다음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다’라는 기사는 눈여겨 봐야 할 기사입니다.

이 기록은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에 있는 것을 옮겨 적은 것인데, 그 원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고(高)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북평은 잘 모르겠으나 옛 중국지도를 보면 북경 동쪽이며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북쪽으로 보이며

어양은 북경에서 동북동 방향으로 약 87km 떨어진 천진시쪽에 있고

상곡은 북경시 중심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약 70km 떨어진 북경시 외곽이며

태원은 북경에서 남서방향으로 약 400km 떨어진 산서성의 성도(省都-우리나라의 도청 소재지)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모본왕 때 지금의 북경을 훨씬 넘어, 중국 내륙 깊숙이 태원시까지 쳐들어 갔음을 알수 있고

고구려가 싸웠던 접경지역이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까지임을 알수 있습니다.

 

3) 그다음, 모본왕이 어떻게 포악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 즉,

『앉아 있을 때에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 삼았다.

사람이 혹 움직이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에게 쏘았다.』는 것과

 

‘두로’라는 사람이 임금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4) 그 다음에 제4대 임금 민중왕에서 시작되어 또다시 왕이 죽어 묻은 곳의 이름을 따서 왕호로 하고 있습니다.

『모본원(慕本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모본왕이라고 하였다.』

왕을 묻은 곳의 이름을 따서 왕의 호칭을 삼은 것은 고구려에만 있는 독특한 풍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