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二)는 변진(辰弁) 양 한의 건설과 마한의 혁성(革姓: 성 바뀜)이다.
진한은 순전히 신한 유민의 이주자가 건설한 바이고 변진은 불한과 신한의 양국 유민의 이주자가 공동건설한 바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여기에 덧붙이고자 하는 바는 기씨의 마한이 멸망한 사실이다.
대개 기씨 말엽에는 남에게 토지를 떼어주다가 멸망하였으니,
(기)준이 이미 서쪽 변두리 백 리를 위만에게 떼어주고는 마침내 위만에게 쫓기어 남방에 와서 마한이 되며,
마한이 된 뒤에도 신한 이주민에게 동쪽 변경을 떼어주고
(진한전에 “그 동쪽 변경을 떼어주었다-割其東界與之”란 구절로 알수 있음),
또 불한 신한 양국 이주민에게 동남쪽 변경을 떼어주다가
(이는 역사에 보이지 않았으나 사리-事理로 추정하여 알 수 있음)
마침내 신라 혁거세가 진한과 변진을 연합하여 대항하매
드디어 동쪽 변경과 동남쪽 변경을 함께 잃었으며,
그리고 최종으로 졸본천의 유수한 부호의 과부 소서노(召西奴)가
그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오매
얼마만큼의 황금을 받았던지
미추홀, 한홀(漢忽) 등 서북 백리땅을 떼어주었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북쪽 백리땅을 떼어주었다-割東北百里”라 하였으나
동(東)자는 마땅히 서(西)자로 쓸 것이니 ‘동서양자 상환고’를 참조).
마침내 온조태왕의 가장한 사냥꾼에게 금마국이라는 타향에서 임시로 살았던 서울까지 빼앗기고
기씨(箕氏)왕조 천여 년의 운명도 이로써 마치었다.
이와 같이 마한은 망하여 부여씨(扶餘氏)의 백제가 되고,
진한은 기씨 망하기 전 66년에 혁거세가 이미 6부의 맹주(盟主)가 되었고,
변진은 기씨 망한 후 35년에 수로대왕(首露大王)이 6가라(加羅)의 맹주가 되니,
이곳 백제 신라 가라로 후삼한이라 칭한 바요,
후삼한이 흥하매 중삼한의 역사는 이에 일단락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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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은 기씨 망하기 전 66년에
혁거세가 이미 6부의 맹주(盟主)가 되었고, 변진은 기씨 망한 후 35년에 수로대왕(首露大王)이 6가라(加羅)의 맹주가 되니,
: 이 부분은 조선상고사에서 수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전후 삼한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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