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년 (AD 646) :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번역문]
5년(646)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내가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정(李靖)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도종을 돌아다보며 물으니,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 틈을 타서 평양을 빼앗자고 한 말을 소상히 아뢰었다.
황제가 원망하며 “당시의 일은 매우 바빴으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는 것이 딱해 나는 취하지 않는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이전에 황제가 돌아가려 할 때 활집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져서,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지만 그 말은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또 당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여도, 침략하고 업신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 다시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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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여기에 나오는 이정(李靖)이 바로 이위공 문대(李衛公問對)라는 병법서에 나오는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입니다.
이정(李靖)은 당시 중국에서 병법의 대가(大家)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이위공 문대(李衛公 問對)’는 당태종과 이정이 병법에 관해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놀랍게도, 첫 장부터 고구려 침략방법에 대해서 묻고 대답하고 있습니다.(문대-問對)
2) 본문에서 당태종이 직접 말하듯이 고구려를 침략하러 갈때에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즉 중국의 명장 중의 명장과 정예병 중의 정예병을 뽑아 30만 대군을 편성하여
고구려에 침략하였지만 고구려에게 패하여 달아난 것입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도망갈 때 수많은 동상자를 냈고,
동상으로 인한 수많은 병사의 떼죽음을 당하면서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 원인을 이정(李靖)에게 묻고 있습니다.
3) 이에 대하여 이정(李靖)은 강하왕 도종에게 말하게 하고
도종은 안시성을 회피하여 직접 평양을 공격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도종의 대답에 대하여 당태종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안시성을 피해 오골성을 공격하고 나아가서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공격을 반대한 장손무기의 주장을 보면,
당태종 군의 뒤편에 신성과 건안성의 10만 대군이 있어, 당태종 군이 안시성을 피해 남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의 10만 대군이 당태종 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어서 당태종 군의 후면을 친다면 당태종의 전군이 몰살당할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당태종은 한가하게 안시성을 피해 직접 평양에 가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급하게 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태종이 “당시의 일은 매우 바빴으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4) 당태종이 도망갈 때 ‘연개소문에게 활집을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져서,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지만 그 말은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는 문구를 보면
연개소문이 사신으로 하여금 당태종에게 보낸 글에
당태종을 마구 하대(下待)하고 마구 꾸짖는 말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남의 나라에 침략해 온 후 패해 도망간 자이기 때문에
당태종이 우습게 보였고 따라서 당태종을 하대하고 마구 꾸짖는 말을 하였을 것이며
이는 춘추사관으로 보면 괴이하고 황당한 글로 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다.’ 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5) 마지막으로 ‘태종이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명령’ 했다는 문구는
신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지난번 반사(班師-후퇴) 때에 태종(太宗)이 개소문(蓋蘇文)에게 궁복(弓服-활집)을 내려 주었는데,
[개소문(蓋蘇文)은] 이것을 받고도 사자(使者)를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조공(朝貢)을 깎아 버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조공의 실체를 알 수 있는데,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변 민족에게 필요한 물품을 교역의 형식을 빌어, 주었는데
이것을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물건을 준 것이므로
자기들 멋대로 조공이라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주변 민족의 특산품을 받고 주변민족이 필요한 식량과 옷감등의 생활 필수품을교환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변민족에게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면서 주변 민족을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의 본질은 교역이나 주변민족에게는 생활 필수품이고, 이득이 되는 교역이었으므로
중국의 말을 잘 들으면 좀더 주고, 말을 않들으면 지금처럼 깎아버리는(줄이는) 정책을 써서 주변민족을 간접통제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조공이란 힘없는 나라가 힘이 센 중국에게 물건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물물교역이며 오히려 중국이 주변 국가에게 물건을 더 많이 주는(이익을 주는) 거래입니다.
즉, 삼국사기에 수없이 나오는 조공이란 고구려가 중국에게 물건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중국의 물물교역이며, 고구려를 달래느라고 중국이 고구려에게 이득을 주는 국제교역입니다.
※ 오늘 기사와 관련있는 구당서 동이열전
[정관(貞觀)] 20년(A.D.646: 高句麗 寶藏王 5)에 고려(高[구,句]麗)가 사신(使臣)을 보내와 사죄(謝罪)를 하고,
아울러 두 미녀(美女)를 바쳤다. 태종(太宗)은 그 사신(使臣)에게,“돌아가서 너의 군주(君主)에게 일러라.
미색(美色)이란 사람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너희가 바친 [미인(美人)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부모와 형제를 본국에 두고 온 것이 불쌍하고, 그의 몸을 머물러 두어 그의 어버이를 잊게 하고, 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내가 하지 않으리라.”하고 함께 돌려 보냈다.
※오늘 기사와 관련있는 신당서 동이열전
이듬해 봄에 장(藏: 보장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올리고 또 사죄(謝罪)를 하였다.
두 미녀(美女)를 바치자, 태종(太宗)은 돌려 보내라고 조명(詔命)을 내리고, 사자(使者)에게, “미녀(美色)이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친척을 떠나와서 마음 아파하는 것이 불쌍하여 내가 취하지 않겠다.” 고 하였다.
지난번 반사(班師) 때에 태종(太宗)이 개소문(蓋蘇文)에게 궁복(弓服)을 내려 주었는데,
[개소문(蓋蘇文)은] 이것을 받고도 사자(使者)를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조공(朝貢)을 깎아 버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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