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 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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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오늘 본문의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알수 있는 사서가 신당서 동이열전입니다.
신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씌여 있습니다.(때는 보장왕6년, 647년입니다)
‘[이적(李勣-이세적)의 군대는] 남소(南蘇)[성(城)]· 목저(木底)[성(城)]에 진주하였을 때에 오랑캐병(兵)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외성(外城)만을 불태웠다.
7월에 [우(牛)]진달(進達) 등이 석성(石城)을 탈취하고 적리성(積利城)으로 진격하여 수천급의 머리를 베고 모두 돌아왔다.’
2) 삼국사기 오늘 본문과 신당서 동이열전을 종합하여 보면
이세적은 남소성과 목저성에 와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외성(나성)에 불 만 지르고갔으니 또한번 패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도망갈 때 심술이 나니 불 한번 지르고 도망쳐 간 것입니다.
3) 우진달(좌무위대장군 및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도 적성으로 왔으나,
수천명을 베고 달아났으니, 저들은 그 몇배가 죽어 패하니 달아난 것입니다.
4) 따라서, 당나라의 2차 침입도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 것입니다.
5) 12월 기록 ‘왕의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가 당에 들어갔다’는 것은 사죄가 아니고 양국간의 화해 사절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패해서 달아난 자들에게 사죄를 하는 법은 없음)
그런데도 사죄했다고 기록해 놓으니 이건 너무 심한 소설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6) 이로써 당나라의 제2차 침입이 끝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구당서를 보면, 2차 침입의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당서를 지은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일을 제멋대로 소설을 써서, 끼워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가필)
※ 오늘 기사와 관련있는 신당서 동이열전
[이적(李勣)의 군대는] 남소(南蘇)[성(城)][註103]· 목저(木底)[성(城)][註104]에 진주하였을 때에 오랑캐 병(兵)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외성(外城)만을 불태웠다.
7월에 [우(牛)]진달(進達) 등이 석성(石城)을 탈취하고 적리성(積利城)으로 진격하여 수천급의 머리를 베고 모두 돌아왔다.
장(藏)이 아들 막리지(莫離支) 고임무(高任武)를 보내와서 조근(朝覲)하며 사죄(謝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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