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28대 보장왕 (34), 당나라의 3차 침입(2)

상 상 2012. 4. 9. 18:15

가을 7월에 서울에 사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으로부터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가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갈마두게 하고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8 년 (AD 649) :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번역문]

8년(649)에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조서를 남겨 요동 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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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보장왕 7년(648년) 봄 정월에 설만철, 배행방의 군사 3만을 편성하고

여름 4월에 그들 휘하의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먼저 침공해서 몇발짝 뛰더니 패해서 달아나니,

9월에 설만철, 배행방이 직접 고구려에 침공합니다.

 

그들은 고구려 박작성에 침입하였으나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이 굳게 지키고

후원군 3만이 들이닥치니 박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또다시 도망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3만이 침공했는데 박작성의 군사와 후원군 3만이 앞뒤로 공격하니 여지없이 패하여 달아난 것이겠습니다.

30만과 당태종이 직접 왔어도 안되는 것을, 겨우 3만과 허접한 장군으로 될 턱이 없습니다.

 

3) 다음해 30만 대군을 동원하려고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비축합니다.

 

4) 보장왕 8년(649년)에 당태종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로써 당나라의 침략이 끝납니다.

 

5) 따라서 고구려는 수양제를 물리쳐 수나라를 거꾸려 뜨렸고,

당태종을 물리쳐 당태종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당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군이라고 극구 칭찬하지만,

고구려를 침략해서는 패배라는 엄청난 굴욕을  맛 보았으며,

고구려 침략때에 입은 병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고구려야말로 그 당시 천하 제1의 영웅이고 중국 영웅을 힘으로 꺾은 빛나는 전승국입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는 그 당시 중국의 영웅 둘을 거꾸려 뜨리고 위대한 승리를 하여

천하무적이며, 천하제일의 영웅임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 오늘 기사와 관련있는 구당서 동이열전

 

태종(太宗)은 또 강남(江南)[註116]에 명(命)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합주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註117]를 보내어

용감한 병사(兵士)를 모집시키고, 협주자사(莢州刺史) 이도유(李道裕)를 보내어 군량(軍糧) 및 기계(器械)를 운반하여

오호도(烏胡島)[註118]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려(高[구,句]麗)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시행하지 못하고, 태종(太宗)은 죽었다.

 

※ 오늘 기사와 관련있는 신당서 동이열전

 

[설(薜)]만철(萬徹)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서 박작성(泊灼城)[註107]에 진주(進駐)하여 40리 밖에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가 두려워서 모두 성(城)을 버리고 달아났다.

대추(大酋) 소부손(所夫孫)이 저항하여 싸웠으나, 만철(萬徹)이 격퇴시켜 그의 목을 베고,

드디어 성(城)을 포위하여 원병(援兵) 3만명을 무찌르고 돌아왔다.[註108]

 

34) ○ 태종(太宗)이 장손무기(長孫无忌)와 계획하기를,

“고(高)[구(句)]려(麗)는 우리 군사의 침입에 지쳐서 호구(戶口)가 줄고 수확(收穫)이 없는데도,

개소문(蓋蘇文)이 성책(城柵)만 증설하여 하민(下民)들은 굶주려서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으니, 그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년에 3십만 군대를 징발하고 공(公)이 대총관(大總管)이 된다면, 한번의 출전(出戰)으로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註109]

이어서 검남(劍南)[도(道)]에 조명(詔命)을 내려 많은 배를 만들게 하였다.[註110]

 

한편 촉인(蜀人)이 재화(財貨)를 강남(江南)으로 수송하기를 원하므로, 그 액수를 계산하여 배를 만들되,

배 한척당 비단 1천 2백필을 받아 들였더니, 파(巴)· 촉(蜀)이 크게 소란하고,

공주(邛州)[註111]· 미주(眉州)[註112]· 아주(雅州)[註113] 등 3주(州)의 요(獠)[註114]가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농서(隴西)[註115]와 협내(峽內)[註116]의 군사 2만을 동원하여 평정하였다.

 

35) ○ 일찍이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공취(攻取)하기로 결정하고, 협주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와

내주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註117]에게 명하여 군량과 병기를 삼산포(三山浦)와 오호도(烏胡島)[註118]에 비축하게 하는 한편,

월주도독(越州都督)[부(府)]에 명하여 거선(巨船)과 우방(偶舫)을 만들어 대기하게 하였다.

마침 태종(太宗)이 죽자,[註119] 모두 중단되었다. [고(高)]장(藏)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