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 건안· 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사론(史論): 당나라 태종은 뛰어나고 총명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이다.
난을 다스린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만하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成王)·강왕(康王)과 비슷하다.
군사를 쓰는 데 이르러서는 기이한 책략을 내는 것에 끝이 없고 향하는 곳에 적수가 없었는데,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호걸이요 비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 그 성명을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한 바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이 사기에 그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름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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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본문에도 있듯이 고연수 장군은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당태종이 자기는 싸울 뜻이 없으니 고구려 임금에게 화해만 주선해 준다면 돌아가겠다고 해서
고연수 장군은 그래도 큰나라의 황제라는 사람이니 그 말을 믿었고,
따라서 고연수 장군은 회담기간에는 서로 무기를 놓는게 도리이기 때문에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당태종은 그 틈을 타서, 고연수 군의 뒤통수를 친 비열한 수단을 쓴 것입니다.
따라서 고연수 장군은 큰나라의 황제라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항상 분개한 것이고,
큰 나라의 황제라는 사람의 말이라 하여, 그것을 믿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한탄하고
자기의 조국 고구려를 근심하다가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당태종이 한 행동은 큰 나라의 황제라는 큰 사람이 할 수 없는,
이기기 위해서는 쥐새끼의 짓도 마다하지 않은 당나라 황제의 소행에 대해 두고두고 분개하고,
거기에 속은 자신을 한탄하며, 나라의 안위를 근심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2) 본문에 중요한 문구가 있으니
‘신성· 건안· 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는 기록입니다.
즉,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전쟁에는 세 개의 대전(大戰)이 있었는데
신성 대전(大戰), 건안성 대전(大戰), 주필산 대전(大戰)이라는 것입니다.
이중에서 안시성 부근인 이른바 주필산 대전(大戰)만 사서에 자세한 기록이 있고,
신성 대전과 건안성 대전은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주필산 대전만 대략 이겼기 때문에 중국사서에 기록해 놓았고,
신성 대전과 건안성 대전은 대패했기 때문에 기록을 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것을 춘추필법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자랑만 적어놓고 자기들의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거나 없애버리는 수법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나 구당서, 신당서를 봐도
강하왕 도종(道宗)이 신성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갔다는 기록은 있는데,
도종이 신성에서 이겼다는 기록은 없고
도리어 신성과 국내성의 군대 4만이 요동성을 구원하러 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도종이 신성 대전에서 대패 한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장검도 건안성에서 승전했다는 기록 또한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장검에 대한 기록이 사서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아,
장검은 건안성 대전에서 대패하여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당태종의 여러 대신들이 안시성을 피해 오골성으로 가자고 했을 때,
장손무기가 신성과 건안성에 고구려의 무리 10만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태종 군이 오골성으로 간다면 신성과 건안성의 10만씩이나 되는 대군이
자기들의 뒤를 밟을 것이다.(자기들의 배후를 칠 것이다)
그러므로 오골성으로 가서는 않되고 안시성을 치자 이렇게 장손무기가 주장한 것입니다.
당태종도 그 의견이 옳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안시성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패해
자기나라로 비참한 모습으로 달아난 것입니다.
즉, 얼어죽는 군사가 엄청나게 나오는 꼴을 당하면서 도망 간 것입니다.
결국, 당태종이 고구려에 와서 한 것이라고는 병사만 숱하게 죽였지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하제일이라는 수양제도 네 번씩이나 와서 군사만 백만명 이상 죽였고,
당태종도 군사만 숱하게 죽이고 달아났으니
이 세상에 천하제일의 할아버지가 와도 우리선조, 고구려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당태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3) 이 사론(史論)은 삼국시가의 저자(著者) 김부식이 쓴 것입니다.
4) 김부식은 당태종이 군사를 잘 쓴다고 하지만, 안시성에서는 패하였으니
안시성 성주는 당태종보다 더 나은 호걸이며 비상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5) 그렇지만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 선생 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 오늘의 기사와 관련있는 구당서 동이열전
고연수(高廷壽_는 항복한 뒤로부터 늘 한탄만 하다가 곧 죽었다. 혜진(惠眞)은 마침내 장안(長安)에 왔다.
※ 오늘의 기사와 관련있는 신당서 동이열전
[고(高)]연수(延壽)는 항복을 하고 나서 근심으로 [병이 나서] 죽고, 홀로 [고(高)]혜진(惠眞)만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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