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단군 이야기의 올바른 이해(1)

상 상 2011. 2. 28. 18:04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조선 상고사)>

 

2. 큰 단군 , 왕검이 창작한 신설(神說)

....(상략)

그러나 평양 ( 平壞 ) 의 옛 이름이 왕검성 ( 王檢城 ) 이요 ,

신라의 선사(仙史)에도 ,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 ( 平壞者仙人 王檢之宅) ”이라고 했고,

위서(魏書)에도 , “지난 2 천 년 전 단군 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나라를 세우고 ,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乃往二千載 前 有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하였으니 ,

 

그러면 조선 고대에 단군 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받들어왔음은 사실이고 ,

왕검을 이두자의 읽는 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이니 ,

대개 ‘임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한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스스로 상제(上帝)의 화신이라 일컫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하고 ,

역대 서울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한 것이다 .

 

‘선인왕검 ( 仙人王檢 ) ’이라 함은 삼국 시대에 수두 교도의 단체를 ‘선배’라 일걷고 ,

선배를 이두로 선인 ( 仙人 ) 혹은 ‘선인 ( 先人 ) ’이라 기록한 것이고

선사(仙史)는 곧 왕검의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

후세에 유 ·불 양교가 서로 왕성해지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

선사도 없어져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

지나의 고서 굴원(屆原)의 초사 ( 楚辭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여기저기 보이는 것으로써 오히려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

 

8. 단군 연대의 고증

전사(前史)에는 단군 왕검 1220년 후에 기자(箕子)의 왕 조선을 기재 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 2편 제 2장에 기술하겠거니와,

이제 사실(史實)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九月山)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抄綠) 한 위서(魏書)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한 구절로 인하여,

아사(阿斯)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 지금의 信川那)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弓忽)이요,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皆忽 : 音 개골)에 있는 산 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아사달은 이두문에 ‘아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 아 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 합이빈(哈爾濱)의 완달산(完達山)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上京)이요,

지금의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안시(安市)의 고허(古噓)인 ‘아리티’가 중경(中京)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南京)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이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元年) 무진(戊辰)을 당요(唐堯) 25년이라 하였지마는,

지나도 주소(周召) 공화(共和 : 기원전 841 년)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년인지를 알수 있으랴 ?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고기(古記)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震檀)으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고쳐서

불전(佛典)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만년, 3천년, 5백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佛祖)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든 말이라 ,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조 초에 권근(權近)이 ,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여 천 년이 지났네(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佛家)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 또한 단군의 시말(始末)을 모르는 말이다 .

 

 

옛날 2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겸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半主權)을 가져

그 처음 에서 끝까지 2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천년만으로 헤아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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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에 있는 글은 단재선생께서 단군 이야기가  단순히 허황된 신화 내지는 불교도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