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도사들 간의 전쟁 시작(882년 8월13일) 절동관찰사 유한굉이 동생 유한유와 신약을 파견하여 서릉에 군영을 두고 절서를 도모하니 항주(杭州)자사 동창이 도지병마사 전류를 파견하여 이를 막게 하였는데 전류는 절강(浙江)을 건너 그들을 대파하여 거의 다 죽이니 유한유와 신약은 모두 달아났다.(8월13일) ⇒ 절도사들 간의 전쟁 시작 위박(魏博)절도사 한간이 3만군(軍)으로 하양(河陽)을 공격, 수무(脩武)에서 하양절도사 제길상을 패배시키고, 형주(邢)와 명주(洺州)를 약탈하고 회군 사타(沙陀)족 이국창. 족속을 인솔하고 달단(達靼)에서 대주(代州)로 다시 옮김 ◎ 주온(주전충) 당에 투항(882년 9월17일) [제]황소가 임명한 동주(同州)방어사 주온(뒷날 주전충)은 황소의 군사세력이 날로 위축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곧 망할 것을 알고 동주(州)들어 하중절도사 왕중영에 투항하니, 당은 주온을 동화(同華)절도사로 삼았다.(9월17일) 황소의 화주자사 이상도 왕중영에게 귀부하려고 하였는데 발각되어 황소가 그를 죽이고 동생 황사업을 화주자사로 삼았다. 계주(桂州)군사들이 난동을 부리고. 절도사 장종훈을 축출하고, 전 옹관경략사였던 최작을 영남서도절도사로 삼았다. 평로(平盧) 대장 왕경무가 절도사 안사유를 축출하고 스스로 평로유후가 되었다.(9월) 화주자사 탕군이 난을 일으키고 배반하여 이극용에 붙음(10月1日) 정동당은 장언구를 파견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도적 한수승과 굴행종이 군사를 일으켜 협강(峽江)으로 가는 길을 끊음 진경선이 장몽접을 파견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10월14일) 위박절도사 한간이 다시 천평절도사 조존실을 공격하여 죽임, 천평도장 주선이 무리를 수습하여 운주(鄆州)에서 농성하자 한간이 이기지 못하자 주선을 권지천평유후로 삼았다.(10월) ◎ 주전충 이름 하사 주온을 우금오대장군·하중행영초토부사로 삼고, '주전충'이라는 이름을 하사(10月) 이극용이 흔주(炘)와 대주(代州) 점거하고, 병주와 분주(汾州)를 침략하여 누번감(監)과 전투 평로대장 왕경무를 평로유후로 삼았다. 이때 여러 도의 군사들은 모두 관중에 모여 황소를 토벌하였는데 평로만 오지 않았는데 장준의 설득으로 왕경무도 관중으로 갔다. 절동관찰사 유한굉이 또 왕진을 파견하여 7만 군사를 거느리고 서릉에 주둔하였는데 절서(浙西)의 항주(杭州) 도지병마사 전류가 다시 절강(浙江)을 건너 습격하여 대파.(10월) 황소의 세력이 강하자 이극용을 부름.(10월) 이극용이 사타 1만7천군(軍)을 거느리고 남(嵐)과 석(石) 거쳐 하중(河中)으로 남하(11月) [제]이상의 옛 화주(華州) 군사들이 황사업을 쫓아내고 화음(華陰)진사 왕우를 주군으로 삼아, 화주(州)를 들어 하중절도사 왕중영에 투항하니 왕우를 화주자사로 삼았다.(11월) 천능의 무리들이 촉주(蜀州) 경계까지 침입하니 서천절도사 진경선은 양행천이 공로를 못세우자 압아 고인후를 대신하게 하였다. 고인후가 쌍류(雙流) 서쪽 야교정(野橋箐)에서 천능의 군사 4천을 회유하여 돌려보내니, 천구(穿口)의 11개 영채 5천여 명, 한구의 13개 영채 , 연공(延貢)의 9개 영채를 모두 투항시키고. 천능을 생포하니, 고인후는 출동 6일만에 천능의 무리를 모두 평정한 것임(11月) 고인후를 미주(眉州)방어사로 삼았다.(12月) 하동절도사 정종당이 이극용에 붙었던, 남주(嵐州)자사 탕군을 붙잡아 참수. 혼주와 대주(代州)의 유후인 이극용을 안문절도사로 삼았다.(12월) 정소업을 형남절도사로 삼았으나 단언모가 형남을 점거하고 있어 정소업을 불러들이고 단언모를 형남절도사로 삼았다. 단언모가 감군 주경매에게 죽으니 다시 정소업을 형남절도사로 삼았다. 정소업이 감군 주경매를 두려워하여 부임 못함. 주경매는 압아 진유를 형남지부사로 임명하였다. 이극용이 4만 군사를 거느리고 하중(河中)에 도착하여 동생 이극수를 파견하여 황하를 건너 황소군을 시험하게 하였다. 이극용의 군대가 도착하자 황소의 군대는 이를 꺼려 황소가 승려 10여명을 파견하여 이극용에게 화의를 요구하였으나 이극용은 이를 거절하고 군사를 이끌고 하양에서 황하를 건너 동주에 진을 쳤다.(12월) 소의(昭義)절도 점거한 맹방립은 소의군을 형주(邢州)로 옮기고, 스스로 소의유후라고 하면서 그의 장수 이온예를 노주자사로 삼았다.(12월) 화주(和州)자사 진언이 아들로 하여금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선주를 습격하여 관찰사 두휼을 쫓아내고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12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