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극용. 장안(長安) 진입, 이극용이 장안으로 들어가니 황소는 패하여 궁실을 불태우고 도주(4월5일) ⇒ 2年4개월 만에 장안(長安) 탈환 황소군은 죽은 사람과 항복한 사람이 아주 많았으며 토벌군은 장안을 사납게 약탈하여, 도적과 다를것이 없었다. 황소는 남전(藍田)으로부터 상산(商山)으로 도주하였는데, 길에다 보물버려, 당군(唐軍)이 이를 빼앗느라 추격안함(4월) 협주를 승격시켜 절도로 삼아 왕중영(盈)을 협주절도사로 삼고, 연주(延州)를 보새군(保塞軍)으로 삼아 보대행군사마 이효공을 보새절도사로 삼았다.(5月) 이극용은 당시 28세로 가장 어렸지만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수복하는데 공로가 으뜸이었고 군사도 가장 강하여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황소가 맹해를 선봉에 서게하여 채주(蔡州)를 공격하니 절도사 진종권이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고 진종권은 황소에게 칭신. 맹해가 진주(陳州)를 치고 항성(項城)에서 진을 쳤는데 진주(州)자사 조주에게 패하여 참수를 당하였다. 황소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 모든 무리를 은수(溵水)에 주둔시켰고(5월) 6월에 진주(州)를 포위하며 공격하였다. 조주가 자주 정에의 병사를 이끌고 나와 황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황소는 더욱 화가 나서 진주의 북쪽에 군영을 세우고 오래 끌 계책을 만들었다. 이때 황소군은 사람을 약탈하여 양식으로 삼았다. 또한 군사를 풀어 하남(河南)·허(許)·여(汝)·맹(孟)·정(鄭)·변(汴)·조(曹)·복(濮)·서(徐)·연(兗) ·산남동도 당(唐)·등(鄧) 등 수십 주(州)를 약탈하였다(6月) ※ 용마채(舂磨寨) : 당시 사람을 잡아 산채로 맷돌에 넣어 뼈까지 먹은 황소의 군영을 지칭 영남소교 유겸이 도적떼를 공격하여 공로를 세우니, 영남동도절도사 위주가 그를 봉주(封州)자사로 삼음.(6월) 하남도 선무(宣武)절도사 주전충이 변주(汴州: 개봉시)에 도착(7월3일). 주전충에게 동북면초토사를 덧붙여 주었다. 안문절도사 이극용을 하동(河東)절도사로 삼았다. 이극용은 낙양에서 유차를 지나 안문에 이르렀다,(7월) 환관 전령자가 권력을 오로지 하니 다른 사람은 그와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성덕유후 왕용을 성덕 절도사로, 위박유후 낙행달을 위박절도사로, 천평유후 주선을 천평절도사로 삼았다.(7월) 이극용이 진양에 도착하니, 진무절도사였던 이국창(이극용의 아버지, 주야적심)에게 조서를 내려 대북절도사로 삼고 대주에 진수하게 하였다.(8월11일) 호남(湖南)을 승격시켜 흠화군으로 삼고 관찰사 민욱을 흠화(欽化)절도사로 삼았다(8월). 감화절도사 시부가 은수(溵水)에 군영을 설치함(9月) 형남유후 진유를 형남절도사로 삼았다.(9월) 소의절도사 맹방립이 치소를 노주에서 형주로 옮기니, 감군 기심회가 이극용에게 군사롤 보내어 군부를 노주에 회복시켜 달라고 청구하였다.(9월) 이극용이 하공아를 파견하였으나 맹방립에게 패하니. 동생 이극수를 파견하여, 노주(潞州)를 빼앗고 자사 이은예를 죽였다.(10月18日) 이후 매년 소의군(軍)과 전투 절동관찰사 유한굉이 10여 만으로 서릉을 나가서 동창을 치려고 하였는데 항주(州)도지병마사 전류가 절강(浙江)을 건너 그들을 대파하니, 유한굉은 주방장으로 위장하고 도주(10월25일) 유한굉이 나머지 무리 4만을 모아 또 사웠는데 전류가 이를 격파하고 그 동생 유한용과 신약을 참수(10월26일). 황소의 봉국방어사 진종권이 허주(許州)를 포위함(11월1일) 충무군(軍) 대장 녹안홍이 하중(河中)에서부터 남하하여, 양(襄)·등(鄧)·금(金) 양(洋)州 약탈 흥원에 도착하여 산남서도절도사 우욱 내쫒고, 스스로 흥원유후라고 하였다.(12월). 절동(浙東)을 승격시켜 의승군으로 하고 관찰사 유한굉을 의승(義勝)절도사로 삼았다. 진주자사 조주가 구원을 요청하니 주급, 시부, 주전충이 모두 군사를 이끌고 그를 구원하였다. 선무절도사 주전충은 황소의 무리들을 녹읍(鹿邑)에서 싸워 그들을 패배시키고, 2천여급을 참수하며 박주(州)를 점거(12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