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4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88, 8. 황소의 난-14)

상 상 2017. 7. 14. 20:51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4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88, 8. 황소의 난-14)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8. 황소의 난

1) 연표(자치통감 요약을 기초로 작성)

 

 

1) 연표 - 14

내용(자치통감 요약)

882

고병을 도통(군 사령관)과 관직에서 파직함.(18)

 

황소는 주온(주전충)을 동주(同州)자사로 삼아 동주를 빼앗도록 하였다(1)

동주자사 미성이 하중으로 달아나고 주온(주전충)이 그곳을 점거하였다(2)

주온(주전충)이 하중(河中)을 노략질 하니 하중절도사 왕중영이 그를 쳐서 패배시켰다.(2)

경원(涇原)절도사 호공소가 죽으니 군에서 요청하여 장균을 경원유후로 삼았다(2).

사타족 이극용이 울주(蔚州) 약탈(2)

공주(邛州)의 아관 천능은 도적되어 약탈, 1만명 모아 공주()와 아주(雅州)를 횡행하며 도륙(3)

우신책장군 제극검을 봉천(奉天), 박야(博野) 절도사로 삼았다..

부방(鄜坊)을 보대(保大)라고 하였다.(3)

대동방어사 혁련탁과 노룡절도사 이가거가 이극용에게 패함.(4)

 

회남(淮南)절도의 요망한 방사 여용지. 절도사 고병 속여 전횡,

'좌우막야' 2만군() 만들어 농단

제도행영도통 왕탁이 서천과 동천, 흥원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영감사(靈感寺)에 주둔하고, 경원군()은 장안 서쪽에, 의무군과 하중군()은 위수(渭水) 북쪽에, 빈녕과 봉상군()은 흥평(興平), 보대와 정난군()은 위교(渭橋), 충무군()은 무공(武功)에 주둔하여, 당군이 사방에서 모였다.

[]황소의 세력은 동주()와 화주(華州)를 벗어나지 못했다.

장안(長安)성 안에서 쌀 1말 값이 30민이었다.

당나라 군은 백성을 붙잡게 되면 그것을 죽 끓여 먹으니 사람의 값은 수백 민이었고

살찐지 마른지로 값을 매겼다.(4)

강서(江西) 무주(撫州)자사 종전이 강서관찰사 고무경을 축출하고, 홍주(洪州) 점거(5),

회남절도사 고병. 당의 병권과 이권에서 해임되자, 당 조정에 공부(貢賦.조세)를 끊어버림

천평유후 조존실을 천평절도사로 삼았다.

[]황소가 흥평(興平)을 공격하니, 빈녕과 봉상군()이 봉천(奉天)으로 후퇴(5)

 

경원유후 장균을 경원절도사로 삼았다.(6)

형남(荊南)감군 주경매. 충용(忠勇)() 만들어, 반목하던 형남절도사 단언모를 선제공격하여 죽이고, 강릉소윤 이수를 형남유후로 삼았다.(628)

()사람 나혼경, 구호승, 나부자가 수천 명을 모아 서천의 도적 천능에게 호응.

건계(乾溪)에서 관군이 천능에 대패하니 아장 양행천이 죄받을까 두려워 백성들 잡아 포로라고 올려 전부 참수시킴(6)

 

종전을 강서관찰사로 삼았는데 이는 고병의 요구였다.(729)

종전은 무주를 떠났는데 남성(南城)사람 위전풍이 다시 무주(撫州) 점거하고,

또 동생 위자창 보내 신주(信州) 점거(729)

[]상양이 의군채(宜君寨)를 공격하였는데, 폭설로 황소군 동사자 2~3.

촉인(蜀人) 한구가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서천의 도적 천능에 호응함.

회남절도사 고병이 마음대로 도적 손단을 선흡(宣歙)관찰사로 삼음

보대유후 동방규를 보대절도사로 삼고 장안동면행영초토사에 충임하였다.(7)

 

정소업을 겸형남절도사로 삼았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