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리]현장이 말하였다.
“기왕의 일을 어찌 추구하여 논의하겠소?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것을]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만 어찌 옛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소?” 막리지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상리]현장이 돌아가 그 실상을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려고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 영주(營州) [2주] 도독의 병사와 거란· 해(奚)· 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또]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餽輸使)로 삼았는데, 하북에서부터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여,
[위정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의 양식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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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당태종이 드디어 고구려 내부 사정을 핑계대고 고구려 침략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맨 먼저,
보장왕 3년(644년 ) 가을 7월 영주도독 장검(張儉)을 시켜 고구려에 침입합니다.
군사는 유주, 영주 2주의 병사와 거란, 해, 말갈 병사이며,
군량은 홍주, 요주, 강주의 3주에서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고 고구려에 침입합니다.
그러나 요수가 넘쳐 장검의 군대는 돌아옵니다.
즉, 북방의 군사를 동원하고 남방의 군량을 배로 조달하여 고구려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위 기사는 신당서와 구당서의 내용을 추려 재단한 것인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2) 신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신라(新羅)가 계속 원병(援兵)을 청하자, 이에 오선(吳船) 4백척에 군량을 실어 보내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유(幽)(주州)· 영(營)(주州)의 군사 및 거란(契丹)· 해(奚) ·말갈(靺鞨) 등을
거느리고 토벌(討伐)케 하였다. 마침 요수(遼水)가 넘쳐서 군사가 돌아 왔다.’
이렇게 되어 있는바, 이는 본문보다 더 상황을 알기 쉽습니다.
-- 여기서 요수가 넘쳐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자기들에게 부끄러운 것은 감추는 춘추필법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수가 넘쳐 돌아온 게 아니고 패해서 돌아온 것을 감추고, 요수를 핑계대고 돌아온 것으로 쓴 것으로 보입니다.
요수가 넘치면 요수 상류로 길을 잡으면 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요수가 넘쳐 돌아왔다는 것은 핑계이고 사실은 고구려 군에게 패해서 돌아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군대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서 나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3) 구당서를 보면...
현장(玄奬)이, “이미 지나간 일을 추론(追論)해서야 되겠는가?” 하였으나, 소문(蘇文)은 끝내 듣지 않았다.[註074]
이에 태종(太宗)은 시신(侍臣)들을 돌아 보며
“막리지(莫離支)는 그의 군주(君主)를 시해하고 대신(大臣)을 다 죽였으며,
용형(用刑)이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대로 죽이므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치어 길가에서도 눈짓을 한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 라고 하였다.
4) 다시 신당서를 보면...
현장(玄獎)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요동(遼東)은 본시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이지만, 천자(天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고려(高[구,句]麗)가 어찌 조명(詔命)을 어길 수 있겠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 현장(玄獎)이 돌아 와서 [사실대로] 아뢰자, 태종(太宗)은, “막리지(莫離支)가 임금을 죽이고 [용형(用刑)을] 함정과 같이 하여
아랫사람을 너무 포학하게 다루니, 원망의 소리가 길에 넘치고 있다. 우리가 출사(出師)하는 데 명분이야 없겠는가?” 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註068]이, “폐하(陛下)의 군사가 요하(遼河)를 건넜다가 승리를 거둔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오나,
만에 하나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군사를 써야 하고, 다시 군사를 쓰게 된다면 그 때에는 안위(安危)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니,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적(李勣)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날 벽연타(薜延陀)[註069]가 변방에 침입하여[註070] 폐하(陛下)께서
추격(追擊)하려 하실 적에 위징(魏徵)이 하도 간(諫)하여서 그만 두었습니다. 만약 추격하였더라면 한필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였을
것인데, 뒤에 다시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한(恨)이 되고 있습니다.”[註071] 고 하였다. 이에 태종(太宗)은, “진실로 그러하다.
다만 한번의 실수를 가지고 그를 원망한다면, 이후에 누가 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겠는가?” 하였다.
○ 신라(新羅)가 계속 원병(援兵)을 청하자,[註072] 이에 오선(吳船) 4백척에 군량을 실어 보내고,[註073]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註074] 등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유(幽)(주州)·영(營)(주州)의 군사 및 거란(契丹)· 해(奚)[註075]·
말갈(靺鞨)등을 거느리고 토벌(討伐)케 하였다. 마침 요수(遼水)가 넘쳐서 군사가 돌아 왔다. 막리지(莫離支)가 두려워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백금(白金)을 [바쳤으나] 태종(太宗)은 받아들이지 않았다.[註076] 사자(使者)가 또, “막리지(莫離支)가 숙위(宿衛)를 시키기 위하여
관원 50명을 보내 왔습니다.” 고 말하자, 태종(太宗)은 화를 내며 사자(使者)에게, “너희들은 고무(高武)에게 [몸을 의탁하여]
처음 벼슬하였는 데도 절의(節義)를 바쳐 죽지 않았으며, 또 역자(逆子)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니 용서할 수 없다.” 고 꾸짖고,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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