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9, 7. 남조의 침공-6)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 6: 남조의 침공(요약) 년 | 내용(출처: 신구당서 남만전 중 남조전) | 859 | 선종(宣宗)이 붕어하여(859년), 사자가 가서 죽음을 알렸다. 이때 풍우 또한 죽어서 탄작(坦綽) 추룡(酋龍)이 즉위하였다. 추룡은 조정이 문상하지 않은 것과 또 조서를 이전 왕에게 내린 것에 화가 나서, 거친 음식으로 사자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마침내 황제를 참칭하고 건극(建極)이라는 연호를 세워 대예국(大禮國)을 자칭하였다. 당 의종(懿宗)은 그 명칭이 현종(玄宗)의 휘(諱)에 가깝다고 하여 조공관계를 끊었다. 이에 남조는 파주(播州)를 함락시켰다. | 860 | 안남도호 이호가 무주(武州)에 주둔하였는데, 함통(咸通) 원년(860)에 남조의 공격을 받자 주(州)를 버리고 달아났다. | 861 | 이듬해(861년) 옹관(邕管)을 공격하니 경략사 이홍원이 병사가 적어 막지 못하고 만주(巒州)로 달아났다. 남조 또한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두종(杜悰)이 사자를 보내 표신(驃信)에게 이름이 묘휘(廟諱)를 범했기 때문에 책명을 행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이름을 바꾸어야 책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서를 내리자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좌사랑중 맹목에게 명하여 절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나, 마침 남조가 수주(雟州)를 함락시켰으므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 862 | 광주(廣州)를 떼어내어 따로 세워 영남동도(嶺南東道)로 삼았다. 그리고 옹주(邕州)는 서도(西道)로 하여, 공주(龔州, 상주(象州), 등주(藤州), 암주(巖州)를 소속 주(州)로 하였다. 이에 채경을 서도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남조가 교주(交州)를 공격하여 안남(安南)을 침범하였다. | 863 | 1월 이날 밤에 남조는 마침내 성을 도륙내었다. 남조가 점차 옹주를 핍박하니, 마침내 여러 도에서 병사를 크게 일으켜 5만을 보냈다.(863년부터 보충을 요함) | 6월 해문(海門)에 임시로 교주(交州)를 설치하여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산동(山東)에서 병사 만 명을 징발하여 수비를 증강하였다. | 864 | 남조가 군대를 돌려 수주(雟州)를 약탈. 서천절도사 소업이 자신에게 딸린 만이의 귀주(鬼主)를 이끌고 대도하(大度河)에서 남조를 맞이하여 패배시켰다. | 865 | 남조가 다시 공격하여 왔다. 자사 유사진이 양림(兩林)지역의 동만(東蠻) 사람들을 약탈하여 모두 내다 팔아 만의 금과 바꾸었다. 그러므로 양림의 동만이 문을 열어 항복하였고, 남조는 수졸(戍卒)을 모두 죽였다. 유사진은 마침내 남조의 신하가 되었다. | 869 | 남조의 왕 추룡은 그 사자를 죽인 것을 원망하여 마침내 침입하였다. | 870 | 1월 추룡이 두재영을 공격하자, 두방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자살하려 하였다. 추룡이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밤에 진영을 거두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남조가 한인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귀와 코를 베고 놓아주었다. 거주민 가운데 나무를 깎아서 귀와 코를 만들어 붙인 자가 열에 여덟은 되었다. | 873 | 남조의 왕 탄작이 다시 촉에 침입하였다. | 874 | 남조는 수주(雟州)와 아주(雅州) 사이를 약탈하다가, 여주(黎州)를 깨뜨리고, 공래관으로 들어와 성도를 약탈하였다. 성도성에서 3일간 문을 걸어 잠그자, 남조는 마침내 가버렸다. 서천절도사에 임명된 고병이 서천에 당도하여 한 달도 머무르지 않고, 정예 기병 5천을 가려 뽑아 남조를 추격하여 대도하에 이르렀다. 공래관을 수복하고, 여주를 다시 얻으니, 남조가 달아나 돌아갔다. 남조가 강화를 하자고 하였으나 고병은 거절하고 토번과 연계하여 남조를 정탐하는 한편 융주(戎州)의 마호, 목원천, 대도하에 세 개의 성을 쌓고 둔영을 늘어놓아 험요지를 방어하였다. 또 건장한 병졸을 선발하여 평이군(平夷軍)을 만드니, 남조의 기세가 꺾였다. | 875 | 황소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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