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0, 7. 남조의 침공-7)

상 상 2017. 3. 3. 17:5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40, 7. 남조의 침공-7)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2: 당의 내부모습- 1

내 용(출처: 자치통감- 요약)

852

왕자홍이 계산에 있는 도적들을 토벌 평정하였다(2)

빈념절도사 백민중을 서천절도사로 삼았다(48)

호남(湖南)에서 단련부사 풍소단이 형주(衡州)의 도적, 등배를 토벌, 평정하다고 보고(4)

 

당항이 다시 변경어지럽히자, 필함을 빈녕절도사에 제수(78).

하동절도사 이업이 사람들을 풀어 잡로를 약탈 살인하여 북방이 흔들리자 노균을 하동절도사로 삼고 이업은 의성절도사로 옮겼다.(76)

 

노균이 위주를 부사로 부르니 위주가 추장들을 타이르고 당인들에게 오랑캐를 약탈하지

말도록하자 잡로들은 안정되었다.(7)

 

요족들이 창주(사천성)와 자주(資州: 사천성)을 노략질하였다.(8)

빈녕절도사 필함이 당항들을 불러 타일러서 항복시켰다고 보고(10)

853

당 선종 원구단에 제사 지내고 사면령을 내림(117)

화주에서 보고하기를 도적이 하규를 겁탈하고 관중에 눈이 적다고 한다

 

전국의 세금 925만여민,

그중 조세 550만여민, 술전매 82만여민, 소금전매 이익 278만여민(853)

854

당 선종과 한림학사 위오의 대화 근래 외간에서는 내시의 권세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대답하였다. “폐하의 위엄과 결단은 예전의 조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황상은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였다. “모두는 아직 아니오! 모두는 아직 아니야! 오히려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있소. 경은 대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오?” 대답하였다.

만약 외정과 더불어 논의하면 태화연간에 일어났던 변고가 생길까 두려우니 그 중에 재능과 실별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그와 더불어 모의하는 것만 못합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이것은 말책(末策)이오. 황색 옷을 입고 녹색 옷을 입은 사람에서부터 비색 옷을 입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를 느끼지만 겨우 자주빛 옷을 입으면 서로 하나가 되오.”

 

황상은 또 일찍이 영호도와 더불어 환관을 다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영호도는 지나쳐서 무고한 사람에게 미칠까 두려워하고 은밀히 주문을 올려서 말하였다. ”다만 죄를 짓게 되면 내버려 두지말고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점차 줄어들어서 다 없어지기에 이릅니다.“

환관이 몰래 그 주문을 보았고 이로말미암아 더욱 조정의 인사와는 더불어 서로 미워하여 남사(조정의 관부)와 북사(환관의 관사)는 물과 불 같았다. (10)

855

성덕(成德)절도사 왕원규가 죽어서 그 아들 절도부사 왕소정을 세웠다고 하자(85514),

왕소정을 성덕유후로 삼았다(123), 왕소정을 성덕절도사로 삼았다.(519)

빈녕절도사 필함에게 빈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하황이 처음 귀부하였지만 당항이 평정되지 않아 빈녕군(邠寧軍)을 영주로 옮겼었는데 이때에 남산(南山), 평하(平夏)가 편안해지고, (), (), () 3의 군량이 충분해졌으니 치소로 돌려 보낸 것이다.(3)

 

조서를 내렸다 주현의 차역(差役)이 고르지 않아 지금부터 매 현마다 사람의 빈부와 부역의 경중에 의거하여 차과부(差科簿)를 만들고, 자사에게 보내어 검사하고 서명하기를 마치면 현령의 청사에 자물쇠로 채워두고, 역사(役事)가 있을 때마다 현령에게 맡겨서 부(簿)에 의거하여 차출토록하라.”

 

왕소정을 성덕절도사로 삼았다(519)

절동(浙東)에서 군대가 난을 일으키고 관찰사 이눌을 내쫓았다.

이눌은 성격이 조급하여 장사(壯士)들을 예절로 대하지 않아 난을 일으킨 것이다.(7)

 

회남절도사 두종은 기근이 들어 백상들이 대부분 흩어져 없어지는데도 놀이와 잔치에 빠져 최현을 회남절도사로 충당하였으며 821일 두종을 태자태부 분사로 삼았다.

 

이눌의 벼슬을 깎아내려 낭주자사로 삼고 감군 왕종경을 곤장 40대를 쳐서 공릉으로 유배 보냈다.

이어서 조서로 무신(武臣)이 법을 어기면, 감군(監軍.환관)도 처벌하라고 함(929)

예부시랑 심순을 절동 관찰사로 삼았다.

 

강계영이 예전에 경원절도사가 되어 관전 2백만민을 멋대로 사용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강계영은 집안의 재물로 그것을 보상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당 선종은 강계영이 하황을 개척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허락하였다.(11)

 

강계영의 벼슬을 깎아내려 기주장사로 삼았다.(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