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3,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8, 7. 남조의 침공-4)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 5 년 | 내 용(출처: 신당서 남만전 중 남조전) | 873 | [함통(咸通)] 14년(873년)에 탄작이 다시 촉에 침입하였다. 배를 연결하여 대도하(大度河)를 건넜는데, 자사 황경복(黃景復)이 이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그들] 무리가 대도하를 따라 남하하여, 밤에 상류를 뗏목으로 건넌 군대와 함께 물가의 여러 둔영을 협공하니, 경복이 패주하여 여주(黎州)로 돌아 왔다. 만(蠻: 남조)이 뒤를 밟아 추격하다가 오히려 경복에게 패하였다. 마침 만(蠻: 남조)이 [황경복을] 뒤쫓아 오다가 되돌아가 대도하를 공격하였다. [만(蠻)이] 기(旗)를 누이고 북소리를 멈추며 청하여 말하기를, “탄작이 천자에게 글을 올려 억울한 일을 아뢰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둔영의 병사들이 이를 믿고 싸우지 않았다. 다리가 완성되어 [남쪽에 있던 만이 대도하(大度河)를] 건너와, 여주(黎州)가 함락되었으며. [만이] 마침내 아주(雅州)를 공격하여 정변군(定邊軍)을 치니, 사졸들이 붕궤되어 공주(邛州)로 들어갔다. [이 소식으로] 성도가 크게 진동하여, 사람들은 도망하여 옥루관(玉壘關: 성도의 북쪽에 위치)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성벽으로 올라갔다. 탄작이 사자 왕보성(王保城) 등 40인을 보내 표신(驃信)의 서한을 가지고 가서 절도사 우총(牛叢)에게 전하였는데, 길을 빌려 입조하고자 하니, 촉왕의 옛 궁궐에서 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총이 허락하려 하자, 양경(楊慶)이 간하여 말하기를, “만들은 신의가 없으니, 저들이 예를 낮추고 말을 달콤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속이려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그 사자를 베고, 두 사람만 남겨 서찰을 돌려보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우총이 [만의 사자를] 책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왕의 조상은 육조(六詔) 가운데 가장 작은 이(夷)였다. 천자께서 그 근실함을 기억하시고는 육조를 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주고, 성도에 부용(附庸)이 되게 하여 ‘국(國)’의 명칭을 붙여 주었다. [게다가] 자제가 태학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하여 중화의 풍속을 익히게 하였다. [그런데도] 오늘날 왕명을 스스로 저버렸다. 참새와 뱀, 그리고 개와 말조차도 은덕에 보답할 줄 아는데, 왕은 벌레와 새만도 못하지 아니한가? 근자에 성도가 방비를 미처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게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너희는] 비교(毗橋), 타강(沱江)에서 패하고, 성 가까이 시체를 쌓아 둔 지 4년도 되지 않아 다시 왔다. 지금 나에게는 10만의 무리가 있고, 그 절반은 놔두고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상태이다. 1,000인으로 군(軍)을 삼고, 열 개의 군으로 부(部)를 삼아, 뛰어난 장수들이 그것을 맡고 있다. 대체로 한 부마다 강노(强弩)를 쓰는 병사가 200 있는데, 박부(鎛斧)가 그것을 보좌하며, 또 경궁(勁弓)을 쓰는 병사가 200이 있고, 월은도(越銀刀)부대가 보좌한다. 그리고 장과(長戈)를 쓰는 군사가 2백 있는데 철도(掇刀)가 보좌하며, 또 단모(短矛)를 쓰는 병사가 200 있는데, 연추(連鎚)[부대가] 이를 보좌한다. 또 군대를 4면(面)으로 나누었는데, 각 면마다 철기(鐵騎)가 5백씩 있다. [그리고 우마를 먹일] 꼴과 땔나무, 미속(米粟), 우마(牛馬), 개, 돼지를 모두 거두어 들여 들판을 비우고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또한 양측의 기병대를 가지고 너희의 땔나무와 채소를 빼앗을 수 있다. 나는 해가 뜨면 1부의 병사를 내보내 너희와 싸울 것인데, 부를 2교대로 나누어 해가 중천에 뜰 때 교대할 것이다. 또 해가 지면, 또 한 부가 이르러 밤새 진칠 것이다. 달이 밝으면 싸우고 어두우면 쉴 것이며, 한밤이 되면 교대할 것이다. 무릇 나의 병사들은 5일에 한 번씩 적을 죽일 것인데, 너희들은 밤낮으로 싸워야 할 것이니, 열흘도 못되어 정신이 흐릿하게 되어 장차 죽게 될 것이다. 주현(州縣)에서는 갑옷을 수선하고 무기를 갈아, 앞뒤 양쪽으로 서로 따르게 할 것이다. 모두 만에게 원한이 깊으니, 비록 여자라도 능히 입을 다물고 이를 갈며 적을 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강건한 장부나 열사는 오죽하겠는가? 너희 조상이 일찍이 [서번(西蕃)]에 대해 노비가 되어 섬긴 적이 있으니 너희의 원수가 된다. 지금 도리어 그들에게 신하노릇을 하니, 이 얼마나 원수와 은혜가 어긋난 것인가? 촉왕(蜀王)의 옛 궁궐은 선대의 소중한 궁궐이니, 변방의 만이가 머물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만약 머문다면] 신(臣)이 노하고 사람이 성을 내어 표신(驃信)은 장차 죽을 것이다!” 우총(牛叢)은 오히려 근교의 민가와 누각을 불태우고 군대를 엄중하게 단속하여 굳게 지키는 계책을 썼다. 탄작이 신진(新津)에 이르렀다가 군대를 돌려 검중(黔中)을 침략하였다. 경략사 진광모는 두려워 형남(荊南)으로 달아났다. 마침 (당) 희종이 즉위하여 금오장군 한중에게 절(節)을 가지고 사자로 가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조가] 여주(黎州)를 공격하였는데, (황)경복(景復)이 이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 874 | 건부(乾符) 원년(元年: 874년) [만(蠻)은] 수주(雟州)와 아주(雅州) 사이를 약탈하다가, 여주(黎州)를 깨뜨리고, 공래관(邛崍關)으로 들어와 성도를 약탈하였다. 성도성에서 3일간 문을 걸어 잠그자, 만(蠻: 남조)들은 마침내 가버렸다. 조서를 내려 천평군(天平軍: 치소, 산동성 동평현)의 고병(高騈)을 옮겨 서천절도사를 맡게 하였다. 이에 [고병이] 상주하기를, “만(蠻: 남조)은 작은 오랑캐이니 그 기세를 제압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촉은 길이 험하고 군량이 다하여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좌신책(左神策)에는 장무(長武), 하동(河東)에서 징발한 병사가 많아 그 씀씀이는 쓸데없이 번잡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결국 장무 등의 군대를 파하였다. 고병이 [서천에] 당도하여 한 달도 머무르지 않고, 정예 기병 5천을 가려 뽑아 만을 추격하여 대도하에 이르렀다. 갑옷과 말을 탈취하였고, 추장 50인을 잡아 베었으며, 공래관을 수복하고, 여주를 다시 얻으니, 남조가 달아나 돌아갔다. 고병은 황경복(黃景復)을 불러 대도하의 패배에 대하여 질책하고 그를 베어 군중에 널리 보였다. 망성(望星: 망성관, 오늘날 사천성 무현 서남 45리에 있는 칠성관)과 청계(淸溪) 등의 관에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남조가 두려워하여 고병에게 사자를 파견해 와 화약을 맺었으나, 뒤이어 군대를 내보내 변방을 노략질하였으므로 고병이 그 사자를 베었다. 처음에 안남경략판관 두양이 만(蠻: 남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 처가 종실의 딸이었다. 그래서 추룡이 [두양의 처로 하여금] 서한을 받들고 가서 강화를 구걸하게 하였다. 고병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장차 백만의 무리를 이끌고 용미성(龍尾城)에 이르러 너의 죄를 물을 것이다”하였다. 추룡이 크게 떨었다. 남조가 배반을 한 이후로 천자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그 경내에 이르렀으나, 추룡이 절하려 하지 않아, 사자가 마침내 끊어졌다. 고병은 그들의 풍속이 불법(佛法)을 숭상함을 알고, 승려 경선(景仙)을 보내 사자의 직무를 대신하여 가게하니, 추룡과 그 부하들이 (경선을) 영접을 하여 절을 하였다. 이에 맹약의 일을 정하고 돌아왔다. [남조가] 청평관 추망 조종정(趙宗政)과 질자(質子) 30인을 보냈는데, 이들은 입조하여 맹약하기를 청하고, 형제나 구생(舅甥)의 관계가 되게 해달하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경선을 홍로경, 검교좌산기상시에 임명하였다. 고병은 토번의 상연심(尙延心)과 올말(嗢末)의 노누월(魯耨月) 등과 연계하여 [남조를] 정탐하였다. 그리고 융주(戎州)의 마호(馬湖), 목원천(沐源川), 대도하(大度河)에 세 개의 성을 쌓고 둔영을 늘어놓아 험요지를 방어하였다. 또 건장한 병졸을 선발하여 평이군(平夷軍)을 만드니, 남조의 기세가 꺾였다. 추룡은 [이 일로] 화를 내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는데 위시호(僞諡號)를 경장황제(景莊皇帝)라고 하였다. 아들 법(法)이 왕위를 이었는데 정명(貞明), 승지(承智), 대동(大同)으로 개원하였으며, 스스로 대봉인(大封人)이라 불렀다. 법(法)은 나이가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고 또 술을 좋아하였으며 방종하였다. 진홍과 자주색 빛깔의 비단과 모직으로 옷을 해 입었고, 금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둘렀다. 국사는 대신들에게 맡겨 처결하게 하였다. | 875 | 황소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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