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6, 7. 남조의 침공-3)

상 상 2017. 2. 20. 18:1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91,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6,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 3

내 용(출처: 신당서 남만전 중 남조전)

869

추룡은 그 사자를 죽인 것을 원망하여 [함통(咸通)] 10(869) 마침내 침입하였다.

 

[그는] 군대를 청계관(靑溪關: 사천성 한원현 서남, 감락현 서북의 화고림산 일대)에 남겨둔 채로, 은밀히 무리를 모아 나무를 베고 길을 열어, 눈덮인 고개를 넘었다. 한 여름 인데도 얼어 죽은 병졸이 2천이나 되었다. 목원(沐源: 사천성 목천현)쪽으로 나와 가주(嘉州; 치소, 사천성 악산시)를 넘보며, [조정에] 복속한 만()을 깨뜨리고, 마침내 목원에 이르렀다. 두방(竇滂)은 연해(兗海: 산동성 연주시 일대)의 병사 5백을 파견하여 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모든 군대가 무너졌다. 추룡은 이에 몸소 장군이 되어 무리 5만을 거느리고 수주에 침입하여, 청계관을 공격하였다. 둔장(屯將) 두재영(杜再榮)이 대도하(大度河)를 버리고 달아나자, 모든 둔이 퇴각하여 북쪽 강변을 지켰다. (: 남조의 왕 추룡)이 여주(黎州)를 공격하였는데, 거짓으로 한인(漢人)의 복색을 하고 강을 건너 건위(犍爲: 사천성 건위현 동남 15리 민강 동안)를 습격,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능주(陵州: 사천성 인수현 일대)와 영주(榮州: 사천성 자공시 일대) 사이를 오가며 건물을 불태우고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남조군이] 가주(嘉州)에 임박하자, 자사 양민(楊忞)은 남조와 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설치하였다. 병사들이 화살을 집중하여 날리니, 만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에] 몰래 상류에서 강을 건너 배후에서 조정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충무장(忠武將) 안경사를 죽이니, 양민은 달아났고, 가주는 함락되었다.

870

이듬해([함통(咸通)] 11, 870) 정월 두재영을 공격하자, 두방이 스스로 군대를 독려하여 싸움에 나섰다. 추룡이 사자 십여 명을 보내 강화를 청하니, 두방이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회담이 반도 진행되기 전에 만(: 남조-南詔)의 뗏목들이 이쪽 강기슭으로 다투어 몰려와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니, 두방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자살하려 하였다. 무령장(武寧將) 묘전서(苗全緖)가 그를 말리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니, (: 남조)이 조금씩 물러났다. 이 틈을 타서 두방이 도망쳤고, 전서는 나중에서야 뒤따라갔다. 여주(黎州: 사천성 한원현 동북부)가 함락되자, 사람들은 산과 골짜기로 달아나 숨었으며 만(: 남조-南詔)이 약탈한 금과 비단은 지고 가지 못할 정도였다. [남조의 군대가 또] 공래관(邛崍關)으로부터 들어와 아주(雅州)를 에워싸고, 마침내 공주(邛州: 사천성 공래시)를 공격하였다. 이해 겨울 두방은 공주성을 버리고 도강(導江: 사천성 중부의 민강)에 방벽을 쳤는데, 쌓아 두었던 물자와 병장기는 모두 잃고 말았다.

 

추룡이 성도로 공격을 진행하여, 미주(眉州)에 이르렀다. 탄작(坦綽) 두원충이 밤낮으로 추룡에게 촉 전체를 취하게 했다. 이 때 서천절도사 노탐이 그 부관 왕언과 환관 장사광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였다. (: 남조의 군사)이 강제로 사자들에게 남면하여 절하게 하였을 뿐, 끝내 추룡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 왔다. (: 남조-南詔)이 신진(新津: 사천성 신진현)에 이르자, 노탐은 다시 부관 담봉사(譚奉祀)를 보내 좋은 말로 거듭 화약을 맺고자하였으나, (: 남조-南詔)은 그를 억류하였다. 노탐은 원군이 아직 모이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여 즉시 천자에게 급히 청하기를, 대사(大使)를 내려보내 [저들과] 우호를 통하게 하여 적이 깊이 침입하는 것을 늦추자고 하였다. [이에] 의종(懿宗)이 태복경 지상(支詳)을 화만사(和蠻使)로 삼아 급파하였다.

 

(: 남조-南詔)은 본디 계책이 없어서, 기회를 틈타 진격하여 끝까지 가지 못하고, 다만 개미가 먹이를 모으고 파리가 먹이를 찾아 분주히 날아다니듯이, 작은 이익을 노략질하는데 익숙할 뿐이다. 따라서 도처에 군영을 남겨놓았다. 그런 까닭에 촉() 지역의 노약자들이 서로 잡아끌고 부축하며 모두 성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도는] 성곽 안의 거리와 거주지가 꽉 차서, 한 호()가 차지하는 땅이 자리 하나의 크기를 넘지 못했다. 비라도 내리면 키와 동이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비를 가렸다. 성 안의 우물이 고갈되자, 마하지(摩訶池)의 물을 공동으로 마셨는데,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모래를 광주리에 담아 [여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다. 사람이 죽어도 관을 갖추지 못하니, 구덩이를 파서 공동으로 묻었다. 전 노주자사(瀘州刺史) 양경복은 노탐(盧耽)을 위하여 공격용 기구와 투석용 돌을 만들고 성의 병장기를 견고하게 설치하였으며, 여덟 명의 장수가 각각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 참빗처럼 촘촘한 울타리 를 세우고, 밤에는 횃불을 늘어놓아 성을 비추니 수비를 위한 설비들이 웅장하고 새로웠다. 또 날랜 병사 3천을 가려서 돌장(突將)이라 이름 붙이고, 장도(長刀)와 거과부(巨檛斧)를 사용하게 하였다. 좌우로 나누어 번갈아 쉬게 하면서 날마다 군대에 예속시키니, 병사들의 마음에 투지가 넘쳐흘렀다. 추룡은 쌍류(雙流: 사천성 쌍류현)로부터 천천히 행군하였는데, 속으로는 동성(董成)의 치욕을 갚고자 하여, 상개(上介)를 자신의 군영에 보내와 일을 의논했으면 한다라고 노탐을 속였다. [이에] 노탐이 절도부사(節度副使) 유반을 보내 두원충과 만나 강화를 의논하게 하였다. 두원충이 망령되이 말하기를, “황제가 노탐을 만나고자 하니, 수레를 구비하되 보삽(葆翣: 오색빛깔의 깃털, 황제가 사용하는 것) 으로 덮개를 했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유반(柳槃)이 결정할 수 없어서 돌아왔다. 만이 3백 기에게 장막을 지워 보내 큰소리로 말하기를, “() 촉왕(蜀王)의 청사에 장막을 펼쳐, 표신의 행재소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노탐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속히 가버렸다.

 

(: 남조-南詔)이 조금씩 전진하여 외성에 이르렀다. 이때에 유혁사(游弈使) 왕주(王晝)가 원병 3천을 거느리고 비교(毗橋: 사천성 신도현 남쪽 10리 비하 위에 위치, 성도를 방어하는 요충)에 진을 쳤다. 두방 또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도강(導江)으로부터 와서 장차 대군과 팽팽히 맞서려 하였다. 그러나 싸우는데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조금 이기지 못할 듯 싶자 즉시 [후퇴하여] 광한(廣漢: 사천성 광한시 일대)을 지켰다. [두방은] 자기가 정변을 잃은 것 때문에 성도가 함락되기를 바랐는데,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마침 조서가 내려 강등당해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군에서 끝내 공을 세울 수 없었다.

 

노탐의 부장 이자효(李自孝)란 자는 자사 유사진(喩士珍)과 친하였다. 유사진이 만(: 남조-南詔)에 신속하자, ()자효가 몰래 적과 내통하여 성 아래에 갈대와 벼를 심자고 노탐을 설득하였다. [이는] 물을 고이게 하여 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는데, 부내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 남조-南詔)이 성을 공격하자, ()자효가 성의 한쪽 담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대장기를 세워 스스로를 표시하였다. 대장기가 서있는 곳마다 만(: 남조-南詔)이 번번이 공격하니, [결국] 부하들에게 발각되었으며 노탐은 자효를 죽여 군중에 널리 알렸다.

 

성의 왼쪽에는 누각으로 된 민간의 상가건물이 있었는데, (: 남조-南詔)[그 위에 올라가] 성안을 굽어보며 활을 쏘아댔다. 노탐이 용사를 모집하여 불태우니 병장기도 함께 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