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8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4, 7. 남조의 침공-1)

상 상 2017. 2. 15. 18:07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8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34,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 1

내 용(출처: 신당서 남만전 중 남조전)

 

대중(大中, 847~859, 唐 宣宗)연간에 이탁(李琢)이 안남경략사가 되었는데, [통치가] 가혹하고 부정이 심하였으니, 사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소금 1()를 소 한 마리와 바꾸어 주니, 이인(夷人)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남조(南詔)의 장수 단추천(段酋遷)이 세를 결집하여 안남도호부를 함락시키고, ‘백의몰명군(白衣沒命軍)’이라 자칭하였다. 남조는 주노구저(朱弩佉苴) 3천 인을 출동시켜 [그곳의] 수비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남조는] 조공이 오히려 해마다 이르렀고, 사행(使行)에 따라오는 자도 많아졌다. 두종(杜悰)이 서천(西川)으로부터 입조하여 표하기를, 만의 시중들을 많이 들이지 말라 하였다. 풍우(豐祐)가 노하여, 바로 질자(質子)를 거두겠다고 거만하게 말하였다.

859

때마침 선종(宣宗)이 붕어하여(859), 사자가 가서 죽음을 알렸다. 이 때 풍우 또한 죽어서 탄작(坦綽) 추룡(酋龍)이 즉위하였다. 추룡은 조정이 문상하지 않은 것과 또 조서를 이전 왕에게 내린 것에 화가 나서, 거친 음식으로 사자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마침내 황제를 참칭하고 건극(建極)이라는 연호를 세워 대예국(大禮國)을 자칭하였다. () 의종(懿宗)은 그 명칭이 현종(玄宗)의 휘()에 가깝다고 하여 조공관계를 끊었다. 이에 [남조는] 파주(播州: 귀주성 준의시)를 함락시켰다.

860

안남도호 이호가 무주(武州: 광서 장족자치구 의주시?)에 주둔하였는데, 함통(咸通, 당 의종) 원년(860)에 만의 공격을 받자 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천자는 이호를 해임하고 왕관(王寬)에게 대신하게 하였다.

861

이듬해(861) 옹관(邕管: 오늘날 광서 장족자치구 옹령?)을 공격하니 경략사 이홍원이 병사가 적어 막지 못하고 만주(巒州: 광서 장족자치구 횡현 서북 만성진 일대)로 달아났다. 남조 또한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조서를 내려 전중감 단문초를 경략사로 삼았는데, [단문초가] 자주 규정을 고치니 무리들이 좋아하지 않아, 호회옥(胡懷玉)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남조는 변방 사람들이 심하게 곤궁하여 약탈하여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고 침입하지 않았다. 두종(杜悰)이 국정을 담당하게 되어 황제를 위하여 계책을 내었는데, 사자를 보내 조문하여 은혜와 신의를 보이고 아울러 표신(驃信)에게 이름이 묘휘(廟諱)를 범했기 때문에 책명을 행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이름을 바꾸어야 책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를 내리자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좌사랑중 맹목에게 명하여 절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나, 마침 남조가 수주(雟州)를 함락시켰으므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안남(安南)의 도림인(桃林人)은 임서원(林西原)에 거주하였다. 칠관동(七綰洞) 수령 이유독(李由獨)이 그들을 지휘하여, 해마다 변방을 지켰다. 이탁(李琢)이 안남에 있을 때, 겨울철 수비병 6천을 파하자고 상주하면서 이유독이면 한 부대를 이루어 만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만의 추장이 딸을 ()유독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니, 칠관동이 [무리를] 들어서 만에게 부속하였는데, 왕관(王寬)이 제어하지 못하였다.

862

[함통] 3(862) 호남관찰사 채습에게 [안남경략초토사] 대신하게 하고 제도(諸道)의 병사 2만을 보내 주둔하여 지키게 하니, 남조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마침 조서를 내려 좌서자(左庶子) 채경(蔡京)에게 영남의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채경은 [채습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방해하여 좌절시켰다. 그리고 말하기를, “남방은 본래 걱정이 없었는데, 무인들이 공을 바라고 병사를 많이 모아 군량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변방의 병사를 돌려보내 재용을 아끼십시오.”라고 하였다. 채습은 [이에 대한] 불가함을 고집하고, 5천의 군사를 남길 것을 원하였으나, 여러 번 표를 올려도 답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남조가 틈을 엿본 지 오래되었음을 세세히 아뢰고, 필사적으로 상()을 올리길 10차례나 하였다. [그러나] 조정이 어리석고 기강이 없어서 이를 살피지 못하였다. 채경이 돌아와 상주하였는데, 황제의 신임을 얻은 바가 커서, 다시 조서를 내려 선위안무사(宣慰安撫使)로 삼았다.

곧이어 광주(廣州)를 떼어내어 따로 세워 영남동도(嶺南東道)로 삼았다. 그리고 옹주(邕州)는 서도(西道)로 하여, 공주(龔州: 현재 광서 장족자치구 평남현), 상주(象州: 치소, 광서 장족자치구 상주현 동남 상고성촌인 계림현), 등주(藤州: 지금의 광서 장족자치구 등현 동북에 위치한 영평현), 암주(巖州: 치소는 광서 장족자치구 래빈현 동북 옛 성터)를 소속 주()로 하였다. 이에 채경을 서도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채경은 속이 좁고 고집이 세며 탐욕이 많은 사람으로 법령의 조문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포훈고착법(炮熏刳斮法)을 만들어 시행하니 아랫사람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다. [결국 그 곳] 군사들에 의해 쫓겨나 등주(藤州)로 달아났다. 황제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 공토사인(攻討使印)을 만들고, 향병과 주변 도()의 군대를 불러 모아 옹주(邕州)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고 군대는 궤멸하였으며, [채경은] 강등당해 애주(崖州: 해남성 담주시 서북에 위치한 의륜현)에서 죽었다. 계관관찰사(桂管觀察使) 정우로 하여금 절도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남조가 교주(交州)를 공격하여 안남(安南)을 침범하니, 채습이 구원을 청하였다. 호주(湖州) 형주(荊州) 계주(桂州)의 병사 5천을 일으켜 옹주(邕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영남의 위주(韋宙)가 상주하기를, “남조는 반드시 옹관(邕管: 광서 남령시?)을 습격할 것입니다. 가까운 곳을 먼저 막지 않고 먼 곳을 도모한다면, 적이 허를 찔러 군량 수송로를 끊고 깊이 침입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채습에게 조를 내려 해문(海門)에 주둔하게 하고, 또 정우(鄭愚)에게 조를 내려 군대를 나누어 막게 하였다. 채습이 군대의 증파를 요청하니, 산남동도(山南東道)의 병사 1,000인을 보냈다. 남조의 추장(酋將) 양사참, 마광고는 병사 6천을 거느리고 성에 근접하여 진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