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 동이전

25.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

상 상 2012. 2. 8. 18:33

차 례

 

1. 조선

 

○ 명사(明史)[註001]

외국열전(外國列傳_[註002]

 

조선(朝鮮)[註003]

 

○ 조선(朝鮮)은 기자(箕子)에게 봉(封)하여 준 나라이다.[註004] 한(漢)나라 이전에는 조선(朝鮮)[註005]이라 하였다. 일찍이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註006]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무제(漢武帝)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註007] 한말(漢末)에 부여(扶餘) 사람 고씨(高氏)[註008]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쳤다. 고구려(高句麗)라고도 하는데,[註009] 평양(平壤)[註010]에 자리잡고 있었으니 곧 낙랑(樂浪)의 [땅]이었다. 그 뒤,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註011]

 

○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註012]이 고씨(高氏)를 대신하여 [일어나] 신라(新羅)· 백제(百濟)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도읍을] 옮겨[註013] 동경(東京)이라 불렀고,[註014]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註015] 그 나라는 북으로 거란(契丹)[註016]과 인접하였고, 서쪽에는 여직(女直),[註017] 남쪽에는 일본(日本)[註018]이 있었다.

 

○ 원(元)의 지원(至元) 연간(A.D.1335~1340; 高麗 忠肅王 復位 4~忠惠王 復位 1)에 서경(西京)이 내속(內屬)되자[註019]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를 설치하고[註020] 자령(慈嶺)[註021] 끝으로 경계를 삼았다.

 

○ 명(明)이 건국하였을 때 고려(高麗)의 왕은 왕전(王顓)[註022]이었다. 태조(太祖) 즉위 원년(A.D.1368;高麗 恭愍王 17)에 사신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내렸다.[註023] [홍무(洪武)] 2년(A.D.1369; 高麗 恭愍王 18)에는 [중국에 사는] 그 나라의 유우민(流寓民)을 돌려보내 주었다.[註024] 전(顓)이 표문(表文)을 올려 즉위를 하례(賀禮)하면서 방물(方物)을 보내오고, 아울러 [자신을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봉(册封)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註025] 황제는 부새랑(符璽郞)[註026] 설사(偰斯)[註027]에게 조서(詔書)와 금인(金印)· 고문(誥文)을 주어 보내면서 전(顓)을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册封)하고, 역서(曆書)와 금기(錦綺)도 하사하였다.[註028]

 

○ 그 해 가을에 전(顓)이 총부상서(總部尙書)[註029] 성유득(成惟得)(준득,准得)[註030]과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註031] 김갑량(金甲兩)(우,雨)[註032]을 보내 감사의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였다.[註033] 또 제복제도(祭服制度)를 청하므로[註034] 황제는 공부(工部)[註035]에 명하여 만들어 주도록 하였다.[註036] 유득(惟得)(준득,准得) 등이 귀국할 즈음에[註037] 황제가 넌지시, “왕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성곽은 잘 정비되어 있는가, 무기는 쓸만한가, 궁실은 크고 볼만한가?”[註038] 라고 물었다.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동해가에 있는 신들은[註039] 오직 불교를 숭상하고 믿을 뿐 다른 데에는 겨를이 없습니다.”[註040]라고 말했다. 이에 새서(璽書)를 내려 유고(諭告)하여 말하기를,[註041] “옛날 왕공(王公)은 험요(險要)를 두면서도 병(兵)을 저버린 적이 없었소. 백성은 먹는 것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註042] 나라는 정령(政令)을 내는 기관이 반드시 있어야 하오. 지금 인민(人民)이 있으면서도 성곽이 없으면 백성들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소? 무비(武備)가 잘 정비되지 않으면 나라의 체통이 흔들리고, 땅을 경작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식생활에 곤란을 받을 것이오. 또 궁실은 있으면서 관청이 없으면 존엄을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것이오. 위의 몇 가지는 짐(朕)이 매우 마땅치 않게 여기는 바이오. 대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예제(禮制)와 군비(軍備)에 있는 것이오.[註043] 진실로 이 두가지 일을 제쳐놓고 오로지 부처만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양(梁) 무제(武帝)의 일[註044]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오. 왕(王)의 나라 북쪽으로는 거란(契丹)[註045]· 여진(女眞)[註046]이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왜(倭)[註047]가 가까이 있으므로 군비를 갖추는 일을 왕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註048] 라 하고 육경(六經)[註049]· 사서(四書)[註050]· 통감(通鑑)[註051]을 하사하였다.[註052] 이로부터 공물을 헌상하는 [사절이] 자주 왔고, 원단(元旦)과 성절(聖節)에도 사신을 보내와 조하(朝賀)하였다. 이것은 매년 관례가 되었다.[註053]

 

○ [홍무(洪武)] 3년(A.D.1370; 高麗 恭愍王 19) 정월,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의 산천에 제사지내게 하였다.[註054] 이 해에 과거령을 반포하고 고려에도 조서(詔書)를 내리니,[註055] 전(顓)이 감사의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치면서, 원(元)으로부터 받은 금인(金印)도 봉납(奉納)하였다.[註056] 중서성(中書省)[註057]에서 말하기를, “고려의 공사(貢使)들이 [돈이 될] 사물(私物)을 많이 지니고 들어오니, 당연히 세금을 물려야 합니다.[註058] 또 중국 물건을 많이 가지고 국경을 나서니 이를 금하는 것이 옳습니다.”[註059] 라고 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註060]

 

○ [홍무(洪武)] 5년(A.D.1372; 高麗 恭愍王 21)에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태학(太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황제가 말하기를, “입학하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다만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와야 하니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강제로 보내지 마시오.”[註061] 라고 하였다. 공사(貢使)[註062] 홍사범(洪師範)[註063]· 정몽주(鄭夢周)[註064] 등 150여명[註065]이

경사(京師)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39명이었는데, 그 중에 사범(師範)도 끼여 있었다.[註066] 황제는 이를 불쌍히 여겨 원(元)나라의 추밀사(樞密使)[註067]였던 연안답리(延安答里)[註068]를 보내어 자주 입공(入貢)하지 말도록 유고(諭告)하였다.[註069] 그러나 전(顓)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註070] 강인유(姜仁裕)[註071]를 다시 보내와 말을 바쳤고,[註072] 하정단사(賀正旦使)[註073] 김서(金湑)[註074] 등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註075] 황제는 이들을 모두 돌려 보내면서[註076] 중서성(中書省)의 신료(臣僚)에게 말하기를, “고려(高麗)에서 공물을 보내는 일이 너무 잦기 때문에 그 인민(人民)이 피폐하여지고, 바다를 건너오므로 난파와 익사를 걱정하게 된다. 마땅히 옛 제후(諸侯)의 예(禮)를 따라 3년마다 한번씩 조빙(朝聘)토록 하고,[註077] 공물(貢物)도 오직 그 나라 산물(産物)만으로 하되, 지나치게 사치스럽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짐(朕)의 뜻을 분명히 깨닫도록 일러주라.”[註078] 라고 하였다.

 

○ [홍무(洪武)] 6년(A.D.1373; 高麗 恭愍王 22)에 전(顓)이 [김(金)]갑량(甲兩)(우,雨)[註079] 등을 보내어 말 50필을 바쳤는데, 중도에서 2필을 잃어 버리자, 갑량(甲兩)(우,雨)이 이를 상주(上奏)·진납(進納)하면서 사마(私馬)로 보충하였다. 황제는 그의 불성실을 미워하여 물리쳤다.[註080] [홍무(洪武)] 7년(A.D.1374; 高麗 恭愍王 23)에 감문호군(監門護軍)[註081] 주의(周誼)[註082]· 정비(鄭庇)[註083] 등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면서 표문을 올려 해마다 한번씩 조공하되,[註084] 조공하는 길은 정료(定遼)[위(衛)][註085]를 경유하는 육로(陸路)로 하고 바다를 건너지 않으며,[註086] 공물은 [태부감(太府監)][註087]으로 보내겠다고 청하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말하기를, “원(元)나라 때에는 태부감(太府監)이 있었으나 본조(本朝)에서는 두어 본 적이 없고, 언사(言辭)가 불성실합니다.” 고 하니, 황제는 그 공물을 되돌려 보내도록 명하였다.[註088] 이 해에 전(顓)이 권신(權臣) 이인인(李仁人)(임,任)[註089]에게 시해되었다.[註090] 전(顓)은 아들이 없어 총신(寵臣) 신돈(辛旽)[註091]의 아들 우(禑)[註092]를 아들로 삼았기 때문에 인인(仁人)(임,任)은 우(禑)를 즉위시켰다.

 

○ [홍무(洪武)] 8년(A.D.1375; 高麗 廢王 禑 1)에 우(禑)가 판종부사(判宗簿事)[註093] 최원(崔原)(원,源)[註094]을 보내어 부고(訃告)를 해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앞서 공사(貢使) 금의(金義)[註095]가 칙사(勅使)[註096]인 채빈(蔡斌)[註097]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지금 사왕(嗣王)인 우(禑)가 의(義)를 주살(誅殺)하고[註098] 그의 가산을 적몰하였소.”[註099] 라고 했다. 황제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하여 원(原)(원,源)을 가두어 둔 채,[註100]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弔問)하고 제사(祭祀)하도록 하였다.[註101]

 

○ [홍무(洪武)] 10년(A.D.1377; 高麗 廢王 禑 3)에 사신이 와서 죽은 왕 전(顓)의 시호(諡號)를 청하자,[註102] 황제는, “전(顓)이 피살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시호를 청하고 있으니, 이는 황제의 명을 빌어 그 백성을 진무(鎭撫)하고자 하는 것일 뿐 더러 그 시역(弑逆)의 흔적을 감추려는 것이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소. 앞서 가두어 두었던 사신은 돌려 보내오.”라고 하였다. 이에 [최(崔)]원(原 원,源)은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그 해 여름에 다시 주의(周誼)를 보내와 말과 방물을 바쳤으나,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겨울에 또 다시 사신을 보내어 명년(明年)의 정단(正旦)을 하례(賀禮)하도록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왕(高麗王) 단(顓)은 시해되고 간신들이 정권을 가로채고 있으니,[註103] 춘추(春秋)의 의(義)로 보아 난신(亂臣)은 반드시 [죄를 물어] 죽여야 하는 것임[註104]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전후에 걸쳐서 차례로 온 사신들은 모두 사왕(嗣王)이 보냈다고 하니,[註105] 중서성(中書省)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그 사왕(嗣王)이 어떠하며 정령(政令)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정령(政令)이 전과 같고 사왕(嗣王)이 유폐되어 있지 않다면[註106] 전왕(前王)이 말한대로 해마다 말 1천필을 바치게 하고,[註107] 명년(明年)에는 금 1백근, 은 1만냥, 좋은 말 1백필, 가는 베 1만필을 바치게 하라.[註108] 그리고 잡아 두었던 요동(遼東) 사람을 모두 돌려 보내 주어라.[註109] 왕위가 옳고 정령(政令)이 잘 시행되고 있음이 확인되면 짐(朕)이 의심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들을 반드시 토벌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註110]

 

○ [홍무(洪武)] 11년(A.D.1378; 高麗 廢王 禑 4) 4월, 우(禑)가 다시 [주(周)]의(誼)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註111]

[홍무(洪武)] 12년(A.D.1379; 高麗 廢王 禑 5) 요동(遼東)을 지키는 장수[註112] 반경(潘敬)[註113]· 엽왕(葉旺)[註114] 등에게 칙명을 내려 변방의 방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였다. 그 해 겨울에 우(禑)가 이무방(李茂芳)[註115] 등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으나, 약속한 것과 같지 않다고 하여 물리쳤다.[註116]

 

○ [홍무(洪武)] 13년(A.D.1380; 高麗 廢王 禑 6) 요동(遼東)에서 보낸 고려(高麗) 사신 의(誼)가 경사(京師)에 이르자,[註117] 황제는 [반(潘)]경(敬) 등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고려(高麗)는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또 칙사(勅使)를 살해했다. 앞서는 굳이 입공(入貢)할 것을 청(請)하고도 시기를 지키지 않더니, 이제 [주(周)]의(誼)를 보내어 거짓된 문사(文辭)로 속이고 있는 것을 보면 뒷날 반드시 [우리] 변방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내조(來朝)하려는 자는 길을 막아 통과시키지 말라.”[註118] 고 하였다. 그리고는 의(誼)를 경사(京師)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註119]

 

○ [홍무(洪武)] 16년(A.D.1383; 高麗 廢王 禑 9)에 공물을 보내 왔으나 물리쳤다.[註120] [그리고] 예부(禮部)에 명(命)하여 조공의 시기를 어긴 것과 배신(陪臣)들의 오만한 죄를 문책하도록 하고, 진실로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면 지난 5년 동안 약속을 어기어 보내지 않았던 공물을 모두 보내 오도록 하였다.[註121]

 

○ [홍무(洪武)] 17년(A.D.1384; 高麗 廢王 禑 10) 6월에 우(禑)가 사복정(司僕正)[註122]·최연(崔涓)[註123]과 예의판서(禮儀判書)[註124] 김진의(金進宜)[註125]를 보내어 말 2천필을 바쳤다. 아울러 말하기를, “금(金)은 고려(高麗)에서 산출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대신 보내기로 하고,[註126] 그 밖의 것은 모두 약속대로 바치겠습니다.” 라고 했다. 요동수장(遼東守長) 당승종(唐勝宗)[註127]도 [고려을 위해] 이를 청해오니,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註128] 그러나 [왕(王)]전(顓)의 시호(諡號)를 청해 온 것과 [우(禑)가] 왕위를 승습(承襲)하고자 하는 것은 윤허(允許)하지 않았다.[註129]

 

○ [홍무(洪武)] 18년(A.D.1385; 高麗 廢王 禑 11) 정월에 공사(貢使)[註130]가 오자 황제는 예부(禮部)의 대신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려(高麗)가 누차 약속을 지킨다고 하여도 짐(朕)은 번번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래도 청원(請願)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세공(歲貢)을 요구한 것이고, 이는 그들의 성위(誠僞)를 시험하기 위함이지 이것으로 부(富)를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제 그들이 조명(朝命)을 따르고 있으니 마땅히 그 조공하는 횟수를 줄여 3년에 한번씩만 조공케 하고 말 5십필을 바치게 하고,[註131] 21년 정단(正旦)에 바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註132] 7월에 우(禑)가 표(表)를 올려 왕(王)의 작위를 승습함과 아울러 고왕(故王)의 시호를 청하므로, 명을 내려 우(禑)를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册封)하고, 고왕(故王) 전(顓)에게는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註133]

 

○ [홍무(洪武)] 19년(A.D.1386; 高麗 廢王 禑 12) 2월에 사신을 보내어 포(布) 1만필과 말 1천필을 바쳤다.[註134] 9월에는 하례(賀禮)의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註135] 그 후의 공물 헌상은 번번히 정해진 분량을 초과하였으며,[註136] 3년이 되지 않아도 이르렀다. [그 해] 겨울에 조서(詔書)를 내려 지휘첨사(指揮僉事)[註137] 고가노(高家奴)를 고려(高麗)에 보내어[註138] 기포(綺布)[註139]로 말을 사들이도록 하였다.[註140] [홍무(洪武)] 20년(A.D.1387; 高麗 廢王 禑 13) 3월에 고가노(高家奴)가 돌아와 고려(高麗)에서 말값을 사양하는 표문을 올렸다고 아뢰었다.[註141] 그러나 황제는 그 액수만큼 값을 치루어 주도록 칙유(勅諭)하였다.[註142] 앞서 원말(元末)에 심양(遼陽)[註143]· 번양(藩陽)[註144] 지방에서 병난(兵亂)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高麗)로 옮겨 간 일이 있었다.[註145] 이 때에 이르러서 말을 사는 기회에 황제가 명을 내려 그들을 찾아내도록 하니,[註146] 마침내 요양(遼陽)· 번양(藩陽) 지방의 유망민(流亡民) 3백여명이 돌아오게 되었다.[註147]

12월에 호부(戶部)[註148]로 하여금 고려왕(高麗王)에게 자문(咨文)하기를, “철령(鐵嶺)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開元)[로(路)]에 속하였으니[註149] 요동(遼東)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高麗)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그리하여]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註150]라고 하였다.

 

○ [홍무(洪武)] 21년(A.D.1388; 高麗 廢王 禑 14) 4월에 우(禑)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철령(鐵嶺)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 왔으니, 과거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자,[註151]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高麗)가 예전에는 압록강(鴨綠江)으로 경계를 삼았으면서도 이제와서 철령이라 꾸며 말하니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朕)의 말로서 효유(曉諭)하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써 쓸데없는 상쟁(相爭)의 원인을 낳지 않게 하라.” 고 하였다.[註152]

 

○ [홍무(洪武) 21년(1388)]8월에 고려(高麗)의 천호(千戶)[註153] 진경(陳景)[註154]이 내항(來降)하며 말하기를, “올해 4월, 우(禑)가 요동(遼東)을 침범하기 위하여 도군상(都軍相)[註155] 최영(崔瑩)[註156]과 이성계(李成桂)[註157]로 하여금 서경(西京)[註158]에 군대를 집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성계(成桂)는 진경(陳景)으로 하여금 애주(艾州)[註159]에 주둔하도록 했으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군대를 후퇴시키고 말았습니다. 왕(王)이 노하여 성계(成桂)의 아들을 죽이니, 성계(成桂)는 군대를 돌려 왕성(王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과 [최(崔)]영(瑩)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라고 하였다.[註160] [진(陳)]경(景)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내항(來降)하였던 것이다.[註161] 황제는 요동(遼東)에 칙유(勅諭)하여 수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고, 이어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註162] 10월에 우(禑)가 그의 아들 창(昌)[註163]에게 양위(讓位)할 것을 [허락해 주도록] 청원하자,[註164] 황제가 말하기를, “앞서 그 왕(王)(우왕,禑王)이 유수(幽囚)되었다고 들었다. 이것은 성계(成桂)의 책략이 분명하니 잠시 기다리며 그들의 동정을 살피기로 하겠다.” 라고 하였다.[註165]

 

○ [홍무(洪武)] 22년(A.D.1389; 高麗 廢王 昌 1)에 권국사(權國事)[註166] 창(昌)이 상주(上奏)하여 입조(入朝)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註167] 이 해에 [이(李)]성계(成桂)는 창(昌)을 폐위시키고 정창국(定昌國)(부,府)원군(院君) 요(瑤)를 즉위시켰다.[註168] [홍무(洪武)] 23년(A.D.1390; 高麗 恭讓王 2) 정월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였다.[註169]

 

○ [홍무(洪武)] 24년(A.D.1391; 高麗 恭讓王 3) 3월에 고려(高麗)에 가서 말을 사오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註170] 8월에 권국사(權國事) 요(瑤)가 사들인 말 1천 5백필을 올려 보내자,[註171] 황제는 말하기를,“삼한(三韓)의 군신들이 정의(正義)에 반(叛)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 요즈음만 해도 두 번이나 되지만,[註172] 지금 왕위를 이은 왕요(王瑤)는 왕씨(王氏)의 후손이니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註173] 12월에 요(瑤)가 그의 아들 [왕(王)]석(奭)을 보내어 이듬해 정단(正旦)을 조하(朝賀)하도록 하였는데,[註174] 석(奭)이 미처 돌아가기 전에 성계(成桂)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그 나라를 차지하고,[註175] 요(瑤)를 원주(原州)에 내쳐서 살게 하였다.[註176] 왕씨(王氏)는 오대십국(五代十國) 때부터 수백년 동안 나라를 이어 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다.[註177]

 

○ [홍무(洪武)] 25년(A.D.1392; 朝鮮 太祖 1) 9월, 고려(高麗)의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註178] 조반(趙胖)[註179] 등이 그 나라 도평의사(都評議司)[註180]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왔는데, [주문(奏文)에서]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공민왕(恭愍王)이 훙거(薨去)한 후부터 사자(嗣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신 이인인(李仁人)(임,任)이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에게 국사를 맡겼으나,[註181] [정사에] 어둡고 [성격이] 난폭하며 살생을 좋아하여 군사를 일으켜 변방을 침범하기에 이르렀습니다.[註182] 이에 대장(大將) 이성계(李成桂)가 [변방을 침범함은] 옳지 못하다고 하여 회군(回軍)하였더니,[註183] 우(禑)는 죄를 지을까 두려워서 그의 아들인 창(昌)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습니다.[註184] [그래도]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공민왕(恭愍王)의 비(妃) 안씨(安氏)에게 계청(啓請)하여 종친(宗親)인 [왕(王)]요(瑤)를 택해 국사를 맡겼습니다.[註185] 그러나 4년이 지나도록 [정사에] 어둡고 포악하여 참언(讒言)만 믿어 훈구(勳舊)의 대신들을 죽였으며, 그의 아들 석(奭)도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요(瑤)는 사직(社稷)을 맡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註186] 이제 안씨(安氏)의 명(命)으로 요(瑤)를 사제(私第)에 물러나 있게 하였습니다.[註187]

왕씨(王氏) 계통의 후예로는 흥망(興望)에 오를 만한 사람이 없고 중외(中外)의 인심은 한결같이 성계(成桂)에게 쏠리고 있는지라, 신(臣) 등이 나라의 기로(耆老)들과 상의하여 그에게 국사를 맡아 주도록 다같이 추대했사오니, 오로지 성주(聖主)의 윤허(允許)를 바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註188] 황제는 고려(高麗)가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중국(中國)이 다스릴 수 없으므로 예부(禮部)로 하여금 유시(諭示)케 하기를, “과연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인심(人心)에 화합할 수 있으며, 변경을 침범하지 않고 사신이 왕래할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그대 나라의 복이니 내가 또 무엇을 책망하겠소.” 라고 하였다.[註189]

겨울에 성계(成桂)가 황태자의 훙거(薨去)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註190] 아울러 국호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황제는 이에 그 나라의 옛 칭호에 따라서 조선(朝鮮)이라 부르게 했다.[註191]

 

○ [홍무(洪武)] 26년 (A.D.1393; 朝鮮 太祖 2) 2월, 사신을 보내어 말 9천 8백여필을 진상 하므로[註192] 저사(紵絲)[註193] 면포(綿布)[註194] 1만 9천 7여필을 보내어 갚아 주도록 하였다.[註195] 6월에 표(表)를 올려 사례하고, 말과 방물(方物)을 바쳤다. 아울러 옛 공민왕(恭愍王)의 금인(金印)을 돌려 보내면서[註196] 자신의 이름을 단(旦)이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註197] 이 달에 요동(遼東)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註198]가 상주(上奏)하기를, “조선국(朝鮮國)에서 여직인(女直人) 5백여명을 불러 들여 몰래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침략해 들어오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註199]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禍)와 복(福)이 무엇인가를 칙유(勅諭)하니, [이(李)]단(旦)이 칙유(勅諭)를 받들고 두려워하여 사죄하고 공물(貢物)을 바쳤다. 아울러 도망해 간 군민(軍民) 3백 8십여명을 잡아서 요동(遼東)으로 돌려보내 주었다.[註200] [홍무(洪武)] 27년 (A.D.1394; 朝鮮 太祖 3) 단(旦)이 아들을 보내와 조공하였다.[註201]

 

○ [홍무(洪武)] 28년 (A.D.1395; 朝鮮 太祖 4) 유순(柳珣)(구,玽)[註202]을 사신으로 보내어 이듬해 정단(正旦)을 조하(朝賀)하도록 했는데, 황제는 표문(表文)의 언사(言辭)가 오만하다고 하여 힐책하였다.[註203] 순(珣)(구,玽)이, “표문(表文)[註204]은 바로 문하평리(門下評理)[註205] 정도전(鄭道傳)[註206]이 지은 것입니다.” 라고 하자, 드디어 [정(鄭)]도전(道傳)을 잡아 들이게 하고, 순(珣)(구,玽)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註207] [홍무(洪武)] 29년 (A.D.1396; 朝鮮 太祖 5)에 표문을 지은

정총(鄭總)(탁,擢)[註208] 등 세사람을 잡아 보내며, “표문은 사실 총(總)(탁,擢) 등이 지은 것이요, 도전(道傳)은 병(病)으로 갈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註209] 황제는 총(總)(탁,擢) 등이 방국(邦國)을 어지럽히고 두 나라의 관계를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않았다.[註210] [홍무(洪武)] 30년 (A.D.1397; 朝鮮 太祖 6) 겨울, 또 다시 표문이 잘못되었다고 나무라며 그 사신을 구류시켰다.[註211]

 

○ 건문(建文) 년간(年間)(A.D.1399~1402; 朝鮮 定宗 1~ 太宗 2) 초, 단(旦)이 표문을 올려 [자신은] 연로하므로 아들 방원(芳遠)(돈,暾)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니 허락하였다.[註212] 성조(成祖)가 즉위한 후 궁인(官人)을 파견하여 즉위조칙(即位詔勅)을 반포하였다.[註213]

 

○ 영락(永樂) 원년(A.D.1403; 朝鮮 太宗 3) 정월에 방원(芳遠)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註214] 4월에 다시 배신(陪臣)[註215] 이귀령(李貴齡)[註216]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면서 방원(芳遠)의 부(父)[註217]가 병을 얻어 용뇌(龍腦)[註218]· 침향(沉香)[註219]· 소합(蘇合)[註220]· 향유(香油)[註221] 등의 약재가 필요하므로 포(布)를 가지고 구입하겠다고 주청(奏請)하였다.[註222] 이에 황제는 태의원(太醫院)[註223]에 명을 내려 그 약재를 하사하고 포(布)는 돌려 주었다.[註224] 방원(芳遠)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문을 올리며[註225] 면복(冕服)[註226]과 서적(書籍)[註227]을 보내달라고 청하였다.[註228] 황제는 중국(中國)의 예제(禮制)를 따르려 함을 가상히 여겨[註229] [왕)王)의] 금인(金印)· 고명(誥命)[註230]· 면복(冕服)· 구장(九章)[註231]· 규옥(圭玉)[註232]· 패옥(珮玉)[註233]과 왕비(王妃)의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註234]· 하피(霞帔)[註235]· 금추(金墜)[註236] 및 경적(經籍)[註237]· 채폐(綵幣)[註238]· 표리(表裏)[註239]를 하사하였다.[註240] 이로부터 공헌(貢獻)이 일년에 4~5차례에 이르렀다.[註241]

 

○ [영락(永樂)] 2년(A.D.1404; 朝鮮 太宗 4) 12월, 방원(芳遠)의 아들 [이(李)]제(禔)[註242]를 세자(世子)로 삼는다는 조서를 내리니, [이는] 그 청을 따른 것이다.[註243] [영락(永樂)] 5년(A.D.1407; 朝鮮 太宗 7) 12월, 공마(貢馬) 3천필이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하므로 호부(戶部)에 명하여 견포(絹布) 1만 5천필을 보내어 그 값을 치르어 주도록 하였다.[註244]

 

○ [영락(永樂)] 6년(A.D.1408; 朝鮮 太宗 8)에 세자(世子) 제(禔)가 내조(來朝)하였으므로[註245] 직금문기(織金文綺)를 하사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황제가 친히 지은 시(詩)를 사여(賜與)하였다.[註246] 이 때 조선(朝鮮)에서 후궁(後宮)으로 보내 온 여자 중에서 네 사람을 비빈(妃嬪)으로 삼았다.[註247] 그 해 가을, 배신(陪臣) 정탁(鄭擢)[註248]을 보내어 그의 부왕(父王) 단(旦)의 상(喪)을 부고(訃告)해 왔다.[註249] [이에] 관사(官司)에 명하여 조상(弔喪)하여 제사지내도록 하고, 강헌(康獻)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註250]

 

○ [영락(永樂)] 16년(A.D.1418; 朝鮮 太宗 18) 세자(世子) 제(禔)는 불초한데, 셋째 아들 [이(李)]도(祹)[註251]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학문에 힘써서 나라 사람들의 촉망을 받고 있으니, 그를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주청(奏請)하였다.[註252] 이에 황제가 왕(王)이 선택한 대로 허락한다는 조칙(詔勅)을 내리자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그와 더불어 자신은 이미 늙었기 때문에 도(祹)에게 국사(國事)를 맡기려 한다고 진정(陳情)하니,[註253] 이에 광록소경(光祿少卿)[註254] 한확(韓確)[註255]과 홍려승(鴻臚丞)[註256] 유천(劉泉)[註257]에게 명하여 도(祹)를 봉(封)하여 조선국왕(朝鮮國王)으로 삼았다.[註258]

이 무렵 황제가 이미 북경(北京)으로 천도하여[註259] 조선(朝鮮)과 더욱 가까와지니, 사대(事大)의 예(禮)가 더욱 공손하여 졌다. 조정에서도 또한 각별한 예(禮)로 대우하였으니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註260]

 

○ [영락(永樂)] 20년(A.D.1422; 朝鮮 世宗 4) 방원(芳遠)이 졸(卒)하여[註261] 공정(恭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註262]

[영락(永樂)] 21년(A.D.1423; 朝鮮 世宗 5) 7월, 도(祹)가 적자(嫡子) [이(李)]향(珦)[註263]을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주청(奏請)하니, 이를 승락하였다.[註264] 이에 앞서, 도(祹)에게 말 1만필을 보내도록 칙명(勅命)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 수량만큼 도착했으므로[註265] 백금(白金)과 기견(綺絹)을 하사하였다.[註266]

 

○ 선덕(宣德) 2년(A.D.1427; 朝鮮 世宗 9) 3월, 중관(中官)[註267]을 파견하여 백금(白金)과 저사(紵紗)[註268]를 하사하고, 별도의 칙령(勅令)을 내려 말 5천필을 진상(進上)하도록 하였으니, 변방의 군용(軍用)으로 쓰기 위함이었다.[註269] 9월에 수량대로 도착하였다.[註270]

 

○ [선덕(宣德)] 4년(A.D.1429; 朝鮮 世宗 11) 도(祹)에게 서적을 하사하며[註271] 말하기를, “희귀한 새와 짐승은 짐(朕)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니, 헌상하지 마시오.”[註272] 라고 하였다. 뒤에 또 도(祹)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금과 옥으로 만든 기물(器物)은 그대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중지하고, 토산물로써 성의를 보이면 될 것이오.”[註273] 라고 하였다.

[선덕(宣德)] 8년(A.D.1433; 朝鮮 世宗 15) 도(祹)가 자제(子弟)를 보내어 태학(太學)이나 요동학(遼東學)에 유학(留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청(奏請)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오경(五經)[註274] 사학(四書)[註275]· 성리(性理)[註276]· 통감강목(通鑑綱目)[註277] 등 각종 서적을 보내 주었다.[註278]

 

○ 정통(正統) 원(元)(즉위,即位)년(A.D.1436; 朝鮮 世宗 18) 3월, 조선부녀(朝鮮婦女) 금흑(金黑) 등 53명을 방면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註279] 금흑(金黑) 등은 선덕(宣德) 초에 경사(京師)에 왔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환관(宦官)을 시켜 돌려보낸 것이다.

[정통(正統)] 3년(A.D.1438; 朝鮮 世宗 20) 8월, 도(祹)에게 원유관(遠游冠)[註280]· 강사포(絳紗袍)[註281]· 옥패(玉佩)[註282]· 적석(赤舄)[註283]을 하사하였다.[註284] 이보다 앞서 건주(建州)[위(衛)] 추장(酋長)[註285] 동창(童倉)[註286]이 조선(朝鮮) 땅으로 피신하여 가 살다가 다시 건주(建州)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註287] 조선(朝鮮)에서는, “지난날 그들이 궁핍하여 신(臣)에게 귀순해 오므로 臣이 잘 대해 주었더니, 이제 와서 은혜를 저버리고 건주(建州)의 이만주(李滿住)[註288]의 지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공모하여 변경을 어지럽힐까 염려됩니다.”[註289] 라고 하였다. 건주(建州)의 추장은 말하기를, “거느린 부족(部族)을 조선(朝鮮)이 추격하여 죽여서 겨우 1백 70여가(家)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라고 하였다.[註290] [정통(正統)] 5년(A.D.1440; 朝鮮 世宗 22)에 도(祹)에게 조서를 내려 그들을 돌려보내 주도록 하였다.[註291] ○ [정통(正統)] 7년(A.D.1442; 朝鮮 世宗 24) 5월에는 도(祹)에게 유시(諭示)하여 말하기를, “압록강(鴨綠江) 일대의 동녕(東寧) 등의 위(衛)[註292]가 몰래 왕경(王境)에 접근하였는데, 그들 중 많은 세인(細人)들이 왕국(王國)에 도망하여 와서, 혹은 국인(國人)을 유혹하거나 협박하여 간 자가 있으니 한인(漢人)· 여직(女直)[註293]人을 가리지 말고 오는대로 곧장 경사(京師)로 보내 주시오.”[註294] 라고 하였다.

일찍이 와랄(瓦剌)[註295]가 여직(女直)의 여러 부락(部落)에 몰래 명령을 내려, 조선(朝鮮)을 유혹하여 중국(中國)에 등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도(祹)는 이를 거부하고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려 주었다. 황제는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이를 권면하는 조칙을 내림과 동시에 채폐(綵幣)를 하사하였다.[註296]

 

○ [정통(正統)] 9년(A.D.1444; 朝鮮 世宗 26) 봄, 왜(倭)가 [조선(朝鮮)의] 변방을 침범하므로, 도(祹)가 장수에게 명하여 포획한 50여명을 경사(京師)로 묶어 보내왔다.[註297] [정통(正統)] 10년(A.D.1445; 朝鮮 世宗 27)에도 남은 무리를 잡아 보내오니, 황제는 연이어 권면하는 칙유(勅諭)를 내리고 더욱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註298]

 

○ [정통(正統)] 13[4]년(A.D.1448; 朝鮮 世宗 30) 겨울, 사신에게 명하여 조선(朝鮮)과 야인여직(野人女直)의 군대를 징발(徵發)하여 요동(遼東)에 집결케 한 후, 북방의 외적을 정벌하도록 하였다.[註299] 이 때 영종(英宗)이 북방의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자,[註300] 성왕(郕王)이 즉위하고[註301] 관인(官人)을 파견하여 그 나라에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다.[註302]

 

○ 경태(景泰) 원(元)년(A.D.1450; 朝鮮 世宗 32) 말 5백필(匹)을 보내 오면서 상주(上奏)하기를, “칙명(勅命)을 받고[註303] 말 2~3만필(匹)을 모으고자 하였으나 얼마전부터 이웃해 있는 오랑캐들이 기회를 틈 타 말과 가축들을 끌고 가거나 죽여서 한꺼번에 다 모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 조칙(詔勅)하기를, “외적이 지금은 조금 잠잠하니 이미 도착한 말은 그 값을 쳐서 주고, 아직 도착되지 않은 말은 중지하여 보내지 마시오.”[註304] 라고 하였다.

 

○ 이 해 여름, [이(李)]도(祹)가 졸(卒)하여 조제(弔祭)케 하고 장헌(莊憲)이라는 시호를 내리는 한편, 그의 아들 [이(李)]향(珦)을 국왕으로 봉하였다.[註305] 때마침 요동(遼東)에서 상주(上奏)하여 보고하기를, “개원(開原)[註306]· 심양(瀋陽)에 외적이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갔는데,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여직(女直)[註307]들의 소행으로 여직 두목(女直 頭目)인 이만주(李滿住) 등이 길을 인도하여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李)]향(珦)에게 칙유하여 [명군(明軍)과] 서로 협공하여 그들을 격살토록 하였다.[註308] 그 해 가을, 다시 말 1천 5백여필을 보내오니 면복(冕服)을 내리는 한편 말 값을 쳐서 주었다.[註309] 겨울에 향(珦)과 그의 비(妃) 권씨(權氏)에게 고명(誥命)을 내리고, 그의 아들 홍위(弘暐)[註310]를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

 

○ [경태(景泰)] 2년(A.D.1451; 朝鮮 文宗 1) 겨울, 건주 두목(建州 頭目)이 몰래 조선(朝鮮)과 통교(通交)하므로, 향(珦)에게 경계하여 그들과의 왕래를 끊게 하였다.[註311] [경태(景泰)] 3년(A.D.1452; 朝鮮 文宗 2) 가을, 향(珦)이 졸(卒)하였다고 부고(訃告)를 알려 오자, 환관(宦官)을 파견하여 조제(弔祭)케 하고 공순(恭順)이라는 시호를 내리는[註312] 한편, 유(瑈)[향(珦)]의 아들 홍위(弘暐)로 하여금 뒤를 이어 즉위하도록 했다.[註313] 홍위(弘暐)는 3년 동안 재위(在位)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어릴 때부터 병약하다 하여 그의 숙부 [이(李)]유(瑈)[註314]에게 국사를 맡기겠다고 청원하였다.[註315]

[경태(景泰)] 7년(A.D.1456; 朝鮮 世祖 2)에 손위(遜位)하겠다는 표문을 올리므로 유(瑈)를 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삼았다.[註316] 유(瑈)가 그의 아들 [이(李)]장(暲)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겠다고 청하므로,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註317]

 

○ 천순(天順) 3년(A.D.1459; 朝鮮 世祖 5) 변방의 장수가, “건주(建州) 삼위(三衞)[註318]의 도독(都督)들이 조선(朝鮮)과 몰래 결탁하고 있으니, 중국(中國)의 우환이 될까 두렵습니다.” 라고, 상주하므로 유(瑈)에게, “무모한 일을 그만 두지 않으면 후회를 남길 것이오.” 라고 칙유(勅諭)하였다.[註319] 이에 유(瑈)가 변명하므로 다시 칙유하기를, “선덕(宣德)(A.D.1426~1435; 朝鮮 世宗 8~17)· 정통(正統) 연간(A.D.1436~1449; 朝鮮 世宗 18~31)에 조선(朝鮮)이 그들과 서로 싸우기에 원한을 풀고 싸움을 그만두도록 칙유(勅諭)하였소. 애초부터 서로 통교(通交)하지 말며, 상을 주거나 관직을 내리지도 말게 하였었소. 그들이 이미 [중국] 조정의 관직을 받았는데, 왕(王)이 또다시 상과 관직을 주는 것은 곧 [중국] 조정과 겨루려는 것이오. 왕은 늘 예절과 의리를 지키더니, 이런 문과식비(文過飾非)가 어디 있소? 이 후로는 마땅히 사사로운 왕래를 끊어 명예를 보전토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註320]

 

○ [천순(天順)] 4년(A.D.1460; 朝鮮 世祖 6) 에 다시 유(瑈)에게 칙유하여 말하기를, “왕(王)의 상주(上奏)에 의하면, 모련위(毛憐衞)[註321] 도독(都督) 낭복아합(郞卜兒哈)[註322]이 통모(通謀)하여 난을 일으키자고 선동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법대로 조치했다고 하였소. 그러나 법이란 나라 안에서 시행하는데 그칠 뿐이지, 어찌 이웃 지역에까지 적용시킬 수 있겠소? 낭복아합(郞卜兒哈)에게 죄가 있다면 조정의 해당 관서에서 처리하도록 상주(上奏)해야 옳을 것인데, 경솔하게 살해(殺害)하고 어찌 그의 아들 아비차(阿比車)[註323]의 복수를 염려하시오? 듣기에 아비차(阿比車)의 어미가 아직 살아 있다 하니 마땅히 요동도사(遼東都司)에 급히 보내어 아비차(阿比車)로 하여금 데리고 가도록 하여 원한을 풀게 하시오.” 라고 하였다.[註324]

 

○ [천순(天順)] 5년(A.D.1461; 朝鮮 世祖 7) 건주위(建州衞) 야인(野人)이 의주(義州)로 침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하니, [이(李)]유(瑈)는 조정의 명령으로 약탈해 간 것을 돌려주게 하여 달라고 상주하였다.[註325] 병부(兵部)에서 의논하기를,

“조선(朝鮮)도 앞서 낭복아합(郞卜兒哈)을 꾀어내어 죽인 다음 또 다시 도지휘(都指揮) 올극(兀克)[註326]을 꾀어 들인 뒤 군사를 풀어 그의 가속(家屬)을 잡아갔으니, 지금 야인(野人)들은 사실상 그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조선(朝鮮)에, ‘도둑이 침입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자초(自招)한 것이니 오로지 본분(本分)과 법(法)을 지키면 변방의 소란은 그칠 수 있으리라’는 유시(諭示)를 함이 옳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황제는 그렇게 하였다.[註327]

 

○ 성화(成化) 원(元)년(A.D.1465; 朝鮮 世祖 11) 겨울, 배신(陪臣) 이문형(李門炯)[註328]이 내조(來朝)하다가 중도에서 졸(卒)하자 관(棺)을 급여하여 치제(致祭)케 함과 아울러 채폐(綵幣)를 내려 그 가족을 위로하였다.[註329]

이 때 조선(朝鮮)에서는 기이한 물건을 자주 보내왔는데,[註330] [성화(成化)] 3년(A.D.1467; 朝鮮 世祖 13) 봄에는 유(瑈)에게 칙유(勅諭)하여 상공(常貢)을 잘 갖추어 보내고 진기한 것을 [보내는 것을] 일삼지 말도록 하였다.[註331]

이 무렵, 조정(朝廷)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건주(建州)를 정벌하면서[註332] 유(瑈)에게 칙명(勅命)을 내려 정벌군을 도와 공략하도록 하였다.[註333] 이에 유(瑈)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註334] 강순(康純)[註335]에게 1만여명의 군대를 통솔케 하여 파견하니, 압록(鴨綠)· 발저(潑豬)[註336] 두 강(江)을 건너 구선부(九獮府)[註337]의 여러 성(城)를 쳐부수어 많은 적을 죽이고 사로잡았다.[註338]

 

○ [성화(成化)] 4년(A.D.1468; 朝鮮 世祖 14) 정월에 관인을 파견하여 포로를 바치니, 호송한 사람에게 후하게 사여(賜與)하고 이를 장려(獎勵)하는 칙유(勅諭)를 내렸다.[註339] 이 해에 유(瑈)가 졸(卒)하니[註340] 혜장(惠莊)이라는 시호를 내리고,[註341] 태감(太監)[註342] 정동(鄭同)[註343]과 최안(崔安)[註344]을 파견해서 세자(世子) [이(李)]황(晄)을 봉하여 왕(王)으로 삼고, 비(妃) 한씨(韓氏)에게 고명(誥命)을 내렸다.[註345] 사행(使行)이 떠나고 난 뒤에 순안요동어사(巡按遼東御使)[註346] 후영(侯英)[註347]이 상주(上奏)하기를, “요동(遼東)은 해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註348] 그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았는데 지금 또 흉년이 들어 군민(軍民)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태감(太監) 정동(鄭同) 등과 그 수행인원(隨行人員)이 지나가는 역(驛)[註349]마다 소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臣)이 생각하기로는 얼마전만 해도 한림원(翰林院)[註350]에 있는 사람 중에서 학행(學行)과 문망(文望)이 있는 인물을 선발하여 사행(使行)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의 [정(鄭)]동(同)과 [최(崔)]안(安)은 다 조선(朝鮮) 사람으로 분묘(墳墓)와 종족(宗族)이 모두 [조선에] 있으니, 그 나라의 왕(王)을 만나면 굽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므로 이는 중국(中國)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일이 됩니다. 바라옵건대 이미 내리신 명령을 중지하고 한림원(翰林院) 중에서나 급사중(給事中)[註351] 또는 행인(行人)[註352]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발하여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註353]라고 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후(侯)]영(英)의 말이 참으로 옳다. 앞으로는 상뢰(賞賚)에는 내신(內臣)을 보내고, 책봉(册封)을 위한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는 정신(廷臣) 중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註354]

 

○ [성화(成化)] 6년(A.D.1470; 朝鮮 成宗 1) [이(李)]황(晄)[註355]의 병이 위독하고 그가 낳은 아들도 어리므로, 그의 형인 고(故) 세자(世子) 장(暲)[註356]의 아들 혈(娎)[註357]에게 국사(國事)를 맡기게 해 주도록[註358] 배신(陪臣)을 보내어 요청해 왔다.[註359] [황(晄)이] 졸(卒)하자 양도(襄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李)]혈(娎)에게 사위(嗣位)케 하면서 혈(娎)의 아내 한씨(韓氏)를 왕비(王妃)로 봉했다.[註360] [성화(成化)] 10년(A.D.1474; 朝鮮 成宗 5)에 혈(娎)의 아버지인 세자(世子) 장(暲)을 국왕(國王)으로 추증(追贈)하여 시호를 양간(懹簡)이라 하고, 어머니 한씨(韓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는데, 이는 청한대로 허락한 것이다.[註361]

 

○ [성화(成化)] 11년(A.D.1475; 朝鮮 成宗 6) 4월에 혈(娎)이 상주(上奏)하여 건주(建州) 야인(野人)들이 모련(毛憐) 등의 위(衞)를 규합하여 변경을 쉴 사이 없이 침입하여 소란스럽게 하고 있으니, 황제의 명령으로 경계하여 삼가하도록 해 달라고 하였다.[註362]

[성화(成化)] 12년(A.D.1476; 朝鮮 成宗 7) 10월에 혈(娎)이 계처(繼妻) 윤씨(尹氏)를 [왕비(王妃)로] 봉해 줄 것을 청하므로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내렸다.[註363] 그 때 외국과의 병기(兵器) 무역(貿易)은 금하고 있었는데,[註364] 혈(娎)이(13년),

“소방(小邦)은 북(北)으로 야인(野人)과 맞붙어 있고,[註365] 남으로는 왜도(倭島)와 이웃하고 있어서 오병(五兵)[註366]에 소용되는 것은 하나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활의 재료로 쓰이는 우각(牛角)[註367]은 상국(上國)에 의뢰해야만 합니다. 고황제(高皇帝)[註368] 때에 화약(火藥)· 화포(火礮)도 내린 적이 있었던만큼[註369] 이제 활에 쓰이는 우각(牛角)을 수매(收買)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하여 다른 이민족(異民族)과 같이 금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註370] 라고 주청(奏請)했다. 이에 병부(兵部)에서 의논하여 해마다 활에 쓰이는 우각(牛角) 50[부,副]를 수매(收買)토록 하였다.[註371] 뒤에도 수요에 부족하다 하여 분량을 정하지 말아 줄 것을 청하므로 그 곱절을 수매(收買)해 가도록 허락하였다.[註372]

 

○ [성화(成化)] 15년(A.D.1479; 朝鮮 成宗 10) 10월에 혈(娎)에게 군사를 출동시켜 건주(建州) 여직(女直)을 협격하도록 명(命)하였다.[註373] 혈(娎)이 마침내 우찬성(右贊成)[註374] 어유소(魚有沼)[註375]를 파견하였으나 군사를 거느리고 만포강(滿浦江)[註376]에 다다르자 얼음이 녹아 뒷날을 기약하였다.[註377] 재차 좌의정(左議政)[註378] 윤필상(尹弼商)[註379]과 절도사(節度使)[註380] 금교(金嶠)[註381] 등을 보내어 강을 건너 진격하여 토벌케 하였다.[註382]

 

○ [성화(成化)] 16년(A.D.1480; 朝鮮 成宗 11) 봄에 배신(陪臣)을 파견하여 전리품을 보내 왔다.[註383] 황제는 내관(內官)에게 명(命)하여 조칙(詔勅)을 가지고 가서 그들이 조상의 빛나는 공적을 계승하였음을 포장(褒獎)하고 금폐(金幣)를 내리도록 하였다.[註384] 지휘관에게도 선례(先例)와 같이 포상하였다.[註385] 뒤에 칙사(勅使)가 귀환할 때 그의 신하인 허희(許熙)[註386]를 보내어 반송(伴送)하였다.[註387] 허희(許熙)가 돌아가는 길에 개주(開州)[註388]에 이르자 건주(建州)의 기병(騎兵) 2천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 호송병 30여명과 말 2백 30여필을 약탈해 갔으며 다른 물건도 많이 잃었다.[註389] 이에 대해 영국공(英國公)[註390] 장무(張懋)[註391]와 이부상서(吏部尙書) 윤민(尹旻)[註392] 등은, 요동(遼東) 지방에 해마다 군대를 동원했기 때문에 가볍게 군대를 움직일 수 없으니 이러한 사정을 혈(娎)에게 유시(諭示)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주하였다. 요동(遼東)을 방비하는 신하에게 변방의 경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고, 또한 역관(譯官)에게 명(命)하여 약탈당한 것을 끝까지 추적하여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는 한편, [허(許)]희(熙)에게는 백금(白金)과 채폐(綵幣)를 내려서 위로하고 안심시켰다.[註393]

 

○ [성화(成化)] 17년(A.D.1481; 朝鮮 成宗 12) 에 혈(娎)이 “계비(繼妃) 윤씨(尹氏)는 실덕(失德)하여 폐위시켰으니 부실(副室) 윤씨(尹氏)를 다시 봉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주청(奏請)하므로, 그대로 해 주었다.[註394]

[성화(成化)] 19년(A.D.1483; 朝鮮 成宗 14) 4월에 혈(娎)의 맏아들 [이(李)]융(㦕)[註395]을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註396]

 

○ 홍치(弘治) 7년(A.D.1494; 朝鮮 成宗 25) 12월에 혈(娎)이 卒하니 강정(康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註397] 이듬해 4월에 [이(李)]융(㦕)을 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삼고, 그의 처(妻) 신씨(愼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註398]

[홍치弘治)] 12년(A.D.1499; 朝鮮 燕山君 5)에 융(㦕)이, “본국인(本國人)이 누차 금법(禁法)을 어기고 몰래 해도(海島)에 숨어 살며 군민(軍民)을 꾀어내어 점차 그 세력이 커지고 있으니 본국이 스스로 찾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상국(上國)의 지방에 관계될 때에는 관리를 시켜 추포(追捕)토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이 무렵 요동(遼東)을 수비하는 관리 역시 융(㦕)의 말과 같이 상주(上奏)해 왔기 때문에 보고대로 허락하였다.[註399] [홍치(弘治)] 15년(A.D.1502; 朝鮮 燕山君 8) 겨울에 융(㦕)의 맏아들 [이(李)]황( ) [註400]을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註401]

 

○ 정덕(正德) 2년(A.D.1507; 朝鮮 中宗 2) 융(㦕)이 세자(世子) 황이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國事)를 아우인 [이(李)]역(懌)[註402]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奏請)해 왔고,[註403]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역(懌)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註404] 예부(禮部)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懌)에게 국사(國事)만을 맡게 하고, 융(㦕)이 졸(卒)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 주기로 하였다.[註405] 앞서 배신(陪臣) 노공필(盧公弼)[註406] 등이 조공(朝貢)하기 위해 경사(京師)에 와서 역(懌)을 봉해 주기를 거듭 주청(奏請)하였었는데 조정(朝廷)의 의논(議論)으로 윤허(允許)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註407] 12월에 융(㦕)의 모비(母妃)가 역(懌)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上奏)하였다.[註408] 이에 예부(禮部)에서, “융(㦕)은 고질(痼疾)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懌)은 친제(親弟)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臣民)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상주하였다.[註409] 황제는 이에 역(懌)의 사위(嗣位)를 윤허하고, 내관(內官)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勅命)과 아울러 그 비(妃) 윤씨(尹氏)의 고명(誥命)을 내렸다.[註410]

 

○ 당초 [이(李)]성계(成桂)가 스스로 왕위에 즉위할 때 재상(宰相) 이인인(李仁人)(임,任)과는 본시부터 같은 혈족(血族)이 아니었는데,[註411] 영락(永樂) 연간(A.D.1403~1424; 朝鮮 太宗 3~世宗 6)에 해악(海嶽)을 제사지낼 때 내린 축문(祝文)에 성계(成桂)를 인인(仁人)(임,任)의 아들이라 하였고,[註412] 『조훈(祖訓)』[註413] 또한 ‘인인(仁人)의 아들 성계(成桂)가 이름을 단(旦)으로 고쳤다’[註414]고 기록하였다. 뒤에 성계(成桂)의 아들 방원(芳遠)이 이를 밝히는 주문(奏文)을 올리니, 태종(太宗)이 그 개정을 허락하였다.[註415] 이 때에 이르러『대명회전(大明會典)[註416]』을 찬수(撰修)하면서 조선국(朝鮮國)에 대한『조훈(祖訓)』을 그대로 열기(列記)하였던 것이다.[註417] 조공(朝貢)왔던 사신이 이를 구입하여 가지고 돌아가니,[註418] 역(懌)은 선조의 세계(世系)를 갖추어 밝히는 소(疏)를 올리며 그의 선조(先朝)에서 시역(弑逆)한 사실이 없음을 변명(辨明)하고 고쳐줄 것을 바랬다.[註419] 예부(禮部)에서 의논하기를, “『대명회전(大明會典)』이 본조(本朝)의 제도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외국에 관한 사항은 정녕 소략(疏略)하게 기록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하물며 성계(成桂)가 나라를 세운 것은 황조(皇祖)의 칙명(勅命)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이 인인(仁人)(임,任)의 후손과 관련이 없음은 태종(太宗)의 조칙(詔勅)으로도 증명되니[註420] 그 청원(請願)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註421] 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허가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 정덕(正德) 15년(A.D.1520; 朝鮮 中宗 15) 겨울에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역(懌)의 아들 [이(李)]호(峼)[註422]를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다. 역(懌)에게는 금백주옥(金帛珠玉)을 하사하고 진기한 물건과 동남(童男)·동녀(童女)를 찾아 진상(進上)하도록 하였다.[註423] [정덕(正德)] 16년(A.D.1521; 朝鮮 中宗 16)에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예관(禮官)이 아뢰기를, “천자(天子)가 처음 천조(踐祚)[註424]하여서는 중국(中國)의 체통을 바르게 세워야 하며 외유(外諭) 민족이 업신여길 단서가 될 일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역(懌)에게 청유(請諭)하여 [진기한 물건과 동남(童男)·동녀(童女)을 진상하라 함은] 조정(朝廷)의 뜻이 아니었으니, 보낸 내관(內官)을 소환하여 그러한 것을 구하지 말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이를 따랐다.[註425]

 

○ 가정(嘉靖) 2년(A.D.1523; 朝鮮 中宗 18) 8월에 사로잡은 왜이(倭夷)를 보내면서 중국인(中國人)으로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 8명도 함께 돌려보내 주므로 백금(白金)과 면저(綿紵)를 하사 하였다.[註426]

[가정(嘉靖)] 8년(A.D.1529; 朝鮮 中宗 24) 8월에 배신(陪臣) 유부(柳溥)[註427]가 아뢰기를, “나라의 개조(開祖)인 이단(李旦)은 본국(本國) 전주인(全州人)입니다. 28세조(世祖) 한(瀚)[註428]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는데, 신라(新羅)가 망하자 6세손(世孫) 긍휴(兢休)[註429]는 고려(高麗)에 들어 갔습니다. 13세손(世孫)인 안사(安社)[註430]는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南京) 천호소달로화적(千戶所達魯花赤)이 되었습니다.[註431] 원(元)나라 말 병란이 일어나자 안(安)[사(社)]의 증손인 자춘(子春)[註432]이 아들 성계(成桂)와 더불어 피난하여 동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지정(至正)(A.D.1341~1367; 高麗 忠惠王 復位 2~恭愍王 16) 신축년(辛丑年)은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해당하는 해로서 홍건적(紅巾賊)[註433]이 국경을 넘어 침입해 오자 성계(成桂)가 이 홍건적을 격퇴하여 공을 세워서 무반(武班)의 직책을 받았는데,[註434] 그 때만 해도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공민왕(恭愍王)이 후사(後嗣)가 없어 몰래 기른 총신(寵臣)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아들로 삼았는데, 그 만년(晩年)에 폐신(嬖臣) 홍륜(洪倫)[註435]과 내수(內豎) 최만생(崔萬生)[註436]에게 시해(弑害)당하니, 권신(權臣) 이인인(李仁人)(임,任)이 륜(倫)과 만생(萬生)을 주살(誅殺)하고 우(禑)를 즉위시키고는 성계(成桂)를 발탁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습니다.[註437]

우(禑)가 성계(成桂)를 보내어 요동(遼東)을 침공케 하였으나 성계(成桂)가 명령을 듣지 않고 회군(回軍)하니, 우(禑)는 두려워 하여 그의 아들 창(昌)에게 양위하였습니다. 그러나 창(昌)은 위성(僞姓)으로 폐위되고 왕씨(王氏)의 후예인 정창군(定昌君) [왕(王)]요(瑤)가 왕위를 되찾아 인인(仁人)(임,任)을 밖으로 귀양보냈습니다. 요(瑤) 역시 무도하니 나라 사람들이 성계(成桂)를 추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황제(高皇帝)에게 주청하여 그를 세워 왕으로 삼고 이름은 단(旦)으로 고쳤습니다. 요(瑤)는 별저(別邸)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다가 천수(天壽)를 마치게 하였으니 진실로 시해(弑害)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 영락(永樂)(A.D.1403~1424; 朝鮮 太宗 3~世宗 6)· 정덕(正德) 연간(A.D.1506~1521; 朝鮮 中宗 1~16)에도 여러번 주청(奏請)하여 모두 윤허(允許)를 받았으나[註438] 지금에 이르도록 개정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대명회전(大明會典)』을 중수(重修)하고[註439] 있으니 억울함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이에 황제는] 사관(史館)[註440]에게 [이 글을] 보내어 편찬(編纂)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註441]

 

○ [가정(嘉靖)] 18년(A.D.1539; 朝鮮 中宗 34) 2월에 예종(睿宗)[註442]을 태묘(太廟)에 부향(祔享)하고[註443] 명당(明堂)[註444]에 배향(配享)하는 예식(禮式)을 베풀자, 역(懌)이 하례(賀禮)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황제는 특별히 봉천문(奉天門)[註445]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고 예부(禮部)에서 사연(賜宴)하였다.[註446]

 

○ [가정(嘉靖)] 23년(A.D.1544; 朝鮮 中宗 39) 겨울에 역(懌)이 졸(卒)하였다.[註447] [가정(嘉靖)] 24년(A.D.1545; 朝鮮 仁宗 1) 정월에 부고(訃告)가 오니[註448] 공희(恭僖)라는 시호를 내렸다.[註449] 조칙(詔勅)으로 그의 아들 [이(李)]호(峼)[註450]를 즉위케 하였으나,[註451] 호(峼)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졸(卒)하여[註452] 영정(榮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註453] 9월에 호(峼)의 아우인 권국사(權國事) [이(李)]환(峘)[註454]이 사신을 보내어 사제(賜祭)와 사시(賜諡)에 대하여 감사하고 아울러 봉작(封爵)을 승습하기를 청원하니 조칙(詔勅)하여 허가해 주었다.[註455]

 

○ [가정(嘉靖)] 25년(A.D.1546; 朝鮮 明宗 1) 에 환(峘)이 사신을 보내어 바다로 온 외국인(外國人) 6백여명을 이송(移送)하여 변방에 이르니 금폐(金幣)를 내렸다.[註456] [가정(嘉靖)] 26년(A.D.1547; 朝鮮 明宗 2) 정월에 환(峘)이 자문(咨文)을 보내어,

“복건인(福建人)이 종래에는 바다를 건너 본국(本國)에 온 사람이 없었는데[註457] 일본(日本)으로 시역(市易)을 나가게 되면서부터 풍랑을 만나 표류한 자를 붙잡은 것이 [이제까지] 모두 1천명이 넘습니다. 이들은 모두 무기와 화물(貨物)을 휴대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중국(中國) 화포(火砲)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왜인(倭人) 역시 그러하니 병란(兵亂)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될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니,[註458] 황제는 조(詔)를 내려, “근년에 연해(沿海) 지방의 간민(奸民)들이 금법(禁法)[註459]을 어기는 일이 많은데,

복건(福建) 지방이 더욱 심하여 때때로 외국(外國)에 잡히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다. 해도관원(海道官員)[註460]은 순안어사(巡按御使)[註461]로 하여금 단속케 하라. 그리고 [조선(朝鮮)]국왕(國王)에게는 은폐(銀幣)를 내려 그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 고 하였다.[註462]

 

○ [가정(嘉靖)] 31년(A.D.1552; 朝鮮 明宗 7) 겨울에 홍무(洪武) (A.D.1368~1398; 고려 恭愍王 17~朝鮮 太祖 7)· 영락(永樂) 연간(A.D.1403~1424; 朝鮮 太宗 3~世宗 6)에 하사한 악기(樂器)[註463]가 떨어지고 부서졌으므로 악기를 구한다는 주청(奏請)이 있었다. 연이어 악관(樂官)을 경사(京師)로 보내어 배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註464]

 

○ [가정(嘉靖)] 35년(A.D.1556; 朝鮮 明宗 11) 5월에 왜선(倭船) 4척이 절강(浙江) 지방에서 패배하고 돌아가다가 표류하여 조선(朝鮮) 해안으로 들어가니,[註465] 환(峘)이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격멸시켰다. 그리고 중국인(中國人)으로서 포로가 된 사람과 왜(倭)를 도왔던 자 30여명을 잡아 보내 주었다.[註466] 아울러 동지절(冬至節)을 하례(賀禮)하니, 황제는 새서(璽書)로써 포장(襃獎)하는 칙유(勅諭)를 내렸다.[註467] [가정(嘉靖)] 38년(A.D.1559; 朝鮮 明宗 14) 11월에 상주(上奏)하기를,

“금년 5월에 왜구(倭寇)가 배 25척을 몰고 해안을 침범한 지라 신(臣)이 장수 이탁(李鐸)[註468] 등에게 명하여 거의 전멸시키고, 중국 사람 진춘(陳春)[註469] 등 3백여명과 왜구(倭寇)을 불러 들여 그 앞잡이가 되었던 진득(陳得)[註470] 등 16명을 잡았는데 모두 궐하(闕下)에 바칩니다.”[註471] 하니, 다시 이를 장려(獎勵)하는 칙서를 내리고 은폐(銀幣)를 후하게 내려 주는[註472] 동시에 [이(李)]탁(鐸) 등에게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註473]

 

○ [가정(嘉靖)] 42년(A.D.1563; 朝鮮 明宗 18) 9월에 환(峘)이 또 다시 글을 올려[註474] 그의 선대(先代)가 이인인(李仁人)(임,任)의 후손이 아님이 밝혀져 지금 중수(重修) 중인『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비록 개정이 되었다[註475]고 하지만 시조(始祖) 단(旦)의 아버지 자춘(子春)의 이름을 기록하여 달라고 하였다.[註476] 이에 황제가『대명회전(大明會典)』에 부록(附錄)하도록 하였다.[註477]

 

○ 융경(隆慶) 원(元)년(A.D.1567; 朝鮮 明宗 22) 6월에 관인(官人)을 보내어 즉위조(即位詔)를 반포하였다.[註478] 이 무렵 황제가 태학(太學)[註479]에 거동하고자 하였는데, 와 있던 사신이 더 머무르며 [태학(太學)에서의] 행례(行禮)에 참관케 하여 달라고 청하므로 이를 허락 하였다.[註480] 이 해 겨울에 환(峘)이 졸(卒)하니 공헌(恭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註481] 그의 조카인 [이(李)]연(昖)에게 봉작(封爵)을 승습토록 하였다.[註482]

 

○ 만력(萬曆) 원(元)년(A.D.1573; 朝鮮 宣祖 6) 정월에 목종(穆宗)[註483]의 존호(尊號)와 양궁(兩宮)의 휘호(徽號)[註484]를 올리는 의례(儀禮)가 있자, 연(昖)이 하례(賀禮)하는 표문(表文)과 방물(方物)· 마필(馬匹)을 바쳤다.[註485]

이 때 연(昖)이 여러번『황명회전(皇明會典)』을 사여(賜與)해 주기를 청원해 왔는데, 이는 그의 선조 강헌왕(康憲王) 단(旦)의 누명을 씻기 위함이었다.[註486] [만력(萬曆)] 16년(A.D.1588; 朝鮮 宣祖 21) 정월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이 완성되었는데,[註487] 때마침 공사(貢使) 유(愈)(유,兪)홍(泓)[註488]이 경사(京師)에 머무르고 있다가 그 책을 사급(賜給)하여 앞서 받은 명령을 마무리짓도록 해 주기를 청원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註489]

 

○ [만력(萬曆)] 17년(A.D.1589; 朝鮮 宣祖 22) 11월에 배신(陪臣) 기금(奇芩)(영,苓)[註490] 등이 동림절(冬臨節)을 하례(賀禮)하기 위해 입조(入朝)하여 상주(上奏)하기를, “올해 6월 대유구국(大琉球國)[註491]의 선박이 풍랑을 만나 해안에 왔기에 그 남녀(男女)를 모두 경사(京師)에 압송하여 왔으니, 문증(文證)을 주어 석방 귀향시켜 주시기 바랍니다.”[註492] 라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註493]

 

○ [만력(萬曆)] 19년(A.D.1591; 朝鮮 宣祖 24) 11월에 상주(上奏)하기를, “왜추(倭酋)인 관백(關白)[註494] 평수길(平秀吉)[註495]이 내년 3월에 쳐들어 오겠다고 호언하였습니다.” 라고 하므로, 병부(兵部)에 조칙(詔勅)하여 해안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도록 하였다.[註496] 평수길(平秀吉)이란 자는 살마주(薩摩州) 출신이다.[註497] 처음에는 왜(倭)의 관백(關白) [직전(織田)]신장(信長)[註498]을 섬겼는데, 신장(信長)이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자,[註499] 수길(秀吉)이 마침내 신장(信長)의 군대를 통솔하여 스스로 관백(關白)이라 하고, 60여주(餘州)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註500]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의 대마도(對馬島)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무렵 왜이(倭夷)가 왕래하면서 서로 무역하고 있었다.[註501]

 

○ [만력(萬曆)] 20년(A.D.1592; 朝鮮 宣祖 25) 하(夏) 5월에 수길(秀吉)이 마침내 장수(將帥) [소서(小西)]행장(行長)[註502]과 [가등(加藤)]청정(淸正)[註503] 등을 분견(分遣)하니, [이들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부산진(釜山鎭)으로 들이닥쳐[註504] 임진강(臨津江)을 몰래 건넜다.[註505] 이 당시 조선(朝鮮)은 태평시대가 오래 계속되어 군대는 전쟁을 익히지 않았는 데다가 연(昖) 또한 유흥에 빠져 방비를 게을리하였다.[註506] 이 때문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갑자기 쳐들어 와 난을 일으키자 적을 보기만 해도 놀라 모두 흩어져 버렸다. 연(昖)은 왕성(王城)을 버리고[註507] 둘째 아들 혼(琿)[註508]에게 국사(國事)를 맡긴 채[註509] 평양(平壤)으로 달아났다.[註510] 얼마 안되어 다시 의주(義州)로 달려와[註511] 내속(內屬)하기를 원했다.[註512]

 

○ [만력(萬曆) 20년(1592)]7월에 병부(兵部)에서 의정(議定)하되 험요(險要)한 곳에 주차(駐箚)하면서 천병(天兵)[註513]을 기다리도록 하고, 전국에 통문(通文)하여 근왕(勤王)[註514]병(兵)을 불러 모아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였다.[註515] 이 때 왜병(倭兵)은 이미 왕경(王京)에 들어 와서 분묘를 파헤치고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사로잡고,[註516] 부고(府庫)를 약탈하여[註517] 8도(道)가 거의 함락되니 아침 저녁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구원병을 청하는 사신이 길을 이었다.[註518]

조정(朝廷)의 의견은 조선(朝鮮)이 중국(中國)의 울타리 구실을 하는 번국(藩國)이므로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는 곳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註519] 그리하여 행인(行人) 설반(薜潘)(번,藩)[註520]을 파견하여 연(昖)에게 대의(大義)로써 다시 일으킬 것을 유시(諭示)하고, 10만 대군이 곧 도착한다고 공언(公言)하게 하였다.[註521] 그런데 왜병(倭兵)이 벌써 평양(平壤)에 도착하였기 때문에[註522] 조선(朝鮮)의 군신(君臣)들은 더욱 급박해져서 애주(愛州)로 나와 피난하였다.[註523] 유격(遊擊)[註524] 사유(史儒)[註525] 등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平壤)에 갔으나 전사하였고,[註526] 부총병(副總兵)[註527] 조승훈(祖承訓)[註528]은 군대를 통솔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이를 돕다가 겨우 죽음만 면하고 돌아왔다.[註529] 중국(中國) 조정(朝廷)이 크게 놀라[註530] 송응창(宋應昌)[註531]을 경략(經略)[註532]으로 삼았다.[註533]

 

○ [만력(萬曆) 20년(1592)]8월에 왜병(倭兵)이 풍덕군(豊德郡)[註534] 등지에 침입하였으나 병부상서(兵部尙書)[註535] 석성(石星)[註536]은 계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사람을 보내 왜군(倭軍)의 동정을 정탐하자는 논의가 있자[註537] 이 때 가흥(嘉興) 사람[註538] 심유경(沈惟敬)[註539]이 초모(招募)에 응해 왔다.[註540] 유경(惟敬)은 시중(市中)의 무뢰한(無賴漢)이었다.[註541]

이 때 수길(秀吉)은 대마도(對馬島)에 머물면서 그가 분견(分遣)한 장수 행장(行長) 등이 요해처(要害處)를 지키는 것을 성원하고 있었다.[註542] 유경(惟敬)이 평양(平壤)에 이르니[註543] 접대하는 예법이 아주 보잘 것 없었다.[註544] 행장(行長)이 능청스럽게,[註545]

“천조(天朝)에서 다행히 진군(進軍)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우리도 오래지 않아 꼭 돌아갈 것이오. 대동강(大同江)으로 경계를 삼아서 평양(平壤) 서쪽은 모두 조선(朝鮮)에 속(屬)하게 될 것이오.”[註546]라고 하니, 유경(惟敬)은 들은 대로 보고하였다. 조정(朝廷)의 의견에 왜(倭)는 속임수가 많아 믿을 수 없으니 [송(宋)]응창(應昌) 등에게 진군(進軍)토록 재촉해야 한다고 하였다.[註547] 그러나 [석(石)]성(星)은 유경(惟敬)에게 매우 미혹되어 그를 유격(遊擊)으로 임명하고 군전(軍前)에 나아가되[註548] 가을[註549]금행(金行) 동안에 결행하도록 했다.[註550]

 

○ [만력(萬曆) 20년(1592)]12월에 이여송(李如松)[註551]을 동정제독(東征提督)[註552]으로 삼았다. 이듬해 정월에 여송(如松)은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싸움에 나아가게 하여[註553] 평양(平壤)에서 대승을 거두었다.[註554] 행장(行長)은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달아나 용산(龍山)으로 돌아가니,[註555] 잃었던 황해(黃海)· 평안(平安)· 경기(京畿)· 강원(江原) 4도(道)가 모두 수복되었다.[註556] [가등(加藤)]청정(淸正) 또한 패주(敗走)하여 왕경(王京)으로 돌아갔다.[註557] 여송(如松)은 이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날쌘 기병(騎兵)으로 급히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렀다가 싸움에 패하여 물러나[註558] 개성(開城)에 주둔하였다.[註559] 이 사실은 [이(李)]여송전(如松傳)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註560]

 

○ 당초 여송(如松)이 출정할 때 서사(誓師)하면서 [심(沈)]유경(惟敬)을 죽이려 하다가 참군(參軍)[註561] 이응시(李應試)[註562]가 말리는 말을 듣고 중지한 적이 있었는데,[註563] 이 싸움에 패하고는 기세가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이(李)]응창(應昌)은 [강화(講和)가] 빨리 이루어지도록 도모하였고,[註564] 왜군(倭軍) 역시 군량이 모자라[註565] 귀국할 뜻이 있는지라[註566] 봉공(封貢)의 의논이 일어나게 되었다.[註567] 응창(應昌)은 왜(倭)가 유경(惟敬)에게 보낸 서한을 보고[註568] 유격(遊擊) 주홍모(周弘謨)[註569]로 하여금 유경(惟敬)과 함께 왜(倭)에 가서 그들이 왕경(王京)을 돌려주고 왕자(王子)를 돌려 보내면 약속과 같이 귀환(歸還)토록 해 주겠다고 설득하도록 하였다.[註570]

 

○ 왜(倭)가 과연 4월에 왕성(王城)을 버리고 퇴각하니 이 때에 이르러 한강(漢江) 이남 1천여리의 조선(朝鮮) 고토(故土)가 다시 안정되었다.[註571] 병부(兵部)에서, “마땅히 왕(王)으로 하여금 환국(還國)하여 지키게 하고, 우리 각진(各鎭)의 군대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피로하였으니 철수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므로 이를 허가하였다.[註572] 이에 응창(應昌)이 상소(上疏)하기를, “부산(釜山)이 비록 남쪽 바다 끝에 있다고 하지만 조선(朝鮮)의 강역입니다. 왜(倭)가 만약 우리의 철군을 엿보고 있다가 갑자기 다시 침범한다면 조선(朝鮮)은 지탱할 수 없을 뿐더러 앞서 세운 공도 모두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군대를 나누어 보내 함께 지키는 것이 상책이긴 하지만 철군하는 의논이 있으니 마땅히 조금 머무르게 해서 왜군(倭軍)이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지키게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註573] 병부(兵部)에서 의정(議定)하여 강절병(江浙兵) 5천명을 머물게 하되[註574] 요충지에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그리고 연(昖)에게는 장정을 모아 훈련시키고 군대를 충실히 하여 외국(外國)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말도록 유시(諭示)하였다.[註575]

 

○ 조금 뒤 심유경(沈惟敬)이 부산(釜山)에서 왜사(倭使)와 함께 돌아와 강화(講和)를 청하였다.[註576] 그러나 왜군(倭軍)은 함안(咸安)· 진주(晋州)를 차례로 침범하고[註577] 전라도(全羅道)에 육박하였다.[註578] 한강(漢江) 이남에서 다시 소문이 나돌기를 왕경(王京)과 한강(漢江)으로 경계가 된다고 하였다.[註579] [이(李)]여송(如松)이 전라도(全羅道)는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으로서 남원부(南原府)는 그 인후(咽喉)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요해처(要害地)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註580] 얼마 후 왜(倭)가 과연 여러 갈래로 침범해 오므로 우리 군대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사로잡았다.[註581] 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註582] 장보지(張輔之)[註583]와 요동도어사(遼東都御使)[註584] 조요(趙燿)[註585] 등은 한결같이 강화(講和)와 조공(朝貢)의 조건을 가볍게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註586]

 

○ [만력(萬曆)] 21년(A.D.1593; 朝鮮 宣祖 26) 7월에 왜군(倭軍)이 부산(釜山)에서 서생포(西生浦)로 이동하고,[註587]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돌려 보내왔다.[註588] 이 당시 군대가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서 나가 있는 데다가 철군한다는 소문도 있어서 군사를 오래 묶어 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註589] [송(宋)]응창(應昌)이 유정(劉綎)[註590]의 [사(四)]천병(川兵)[註591]과 오유충(吳惟忠)[註592]· 낙상지(駱尙志)[註593] 등의 남병(南兵)[註594] 및 계(薊)·요병(遼兵)[註595]을 합쳐 모두 1만 6천명을 잔류시키자고 건의하니, 이를 청허(聽許)하여 정(綎)을 경상도(慶尙道)의 대구(大丘)에 나누어 포진케 하였다. 그리고 월향(月餉)[註596] 5만량(萬兩)[註597]은 호부(戶部)와 병부(兵部)에서 지급토록 하였으나,[註598] 이미 탕고(帑庫)를 열어 군비(軍費)로 쓴 것이 벌써 수백만량(數百萬兩)이나 되었다.[註599] 정신(廷臣)이 말하기를, “내치(內治)는 소홀히 하면서 외치(外治)에 힘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잔류한 천병(川兵)은 정(綎)이 훈련시키도록 하고, 군량은 그 나라에서 스스로 공급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유충(惟忠)의 군대는 철수하고, 정(綎)의 군대는 남아서 지키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註600] 조선(朝鮮)의 세자(世子)[註601] 임해군(臨海君) [이(李)]진(珒)[註602]에게는 전라(全羅)·경상도(慶尙道)에 머물라[註603]는 유시(諭示)를 내리고,[註604] 고양겸(顧養謙)[註605]을 경략(經略)으로 삼았다.[註606]

 

○ [만력(萬曆) 21년(1593)]9월에 연(昖)이 삼도(三都)[註607]가 이미 수복되고 강역(疆域)이 복구되었음을 사은(謝恩)하는 표문을 올렸다.[註608] 그러나 이 당시 왜(倭)가 부산(釜山)을 점거하고 있는지라 석성(石星)은 더욱 한결같이 강화 교섭을 주장하였다.[註609] 9월에 병부주사(兵部主事)[註610] 증위방(曾偉芳)[註611]이 말하기를, “관백(關白)의 대병(大兵)은 이미 돌아갔지만 [소서(小西)]행장(行長)은 남아 기다리고 있어서 우리 군대가 철수하지 않을 것을 알고 감히 하나의 화살이라도 더 버리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돌아가 관백(關白)에게 보고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하고자 하지만 바람이 불리하게 불고 겨울이 되어 추위에 고생할 것이므로 강화가 되어도 돌아가고 강화가 되지 않아도 돌아갈 것입니다. 앞서 심유경(沈惟敬)이 왜군(倭軍)의 진영에서 강화 교섭을 했는데도 함안(咸安)· 진주(晋州)가 차례로 함락되었으니, 강화를 꾀하게 되면 내년에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희망일 뿐입니다. 따라서 강화가 빨리 된다는 것은 곧 공격도 빨리 된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강화가 되어도 오고 강화가 되지 않아도 쳐들어 올 것입니다. 마땅히 조선(朝鮮)에 명령하여 스스로 지키게 하고 죽은 사람은 조제(弔祭)하고 유족(遺族)은 위문케 하면서 병력을 기르고 군량을 쌓아 스스로 강해지기를 도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註612] 황제는 이 말을 옳게 여겨서[註613] 연(昖)에게 칙유(勅諭)한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註614]

 

○ [만력(萬曆)] 22년(A.D.1594; 朝鮮 宣祖 27) 정월에 연(昖)이 김수(金晬)(수,睟)[註615] 등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사은(謝恩)하였다.[註616] 예부랑중(禮部郞中)[註617] 하교원(何喬遠)[註618]이 상주(上奏)하기를,

“수(睟)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왜구(倭寇)가 창궐(猖獗)하자 조선(朝鮮)에서는 손을 쓸새도 없이 6만여명이나 희생되었소. 왜(倭)의 언사(言辭)가 오만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심유경(沈惟敬)은 왜(倭)와 교통(交通)하면서 화친(和親)이라 하지 않고 번번히 걸항(乞降)이라는 말을 쓰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만력(萬曆) 19년(A.D.1591; 朝鮮 宣祖 24) 중국인으로서 포로가 되었던 허의(許儀)(의후,儀後)[註619]가 보내온 내지서(內地書)[註620]와 왜이(倭夷)가 유정(劉綎)에게 보낸 답서(答書)[註621] 및 여러 해 동안 침구(侵寇)해 온데 대한 대응책[註622]으로 특칙(特勅)을 내리시어 봉공(封貢)을 급히 중지시키기를 바랍니다.”[註623]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는] 병부(兵部)에 조칙(詔勅)하여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신(廷臣)들이 다같이 상소하여 모두 봉공(封貢)을 중지하고 싸워서 지키는 방법을 의논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註624] 8월에 [고(顧)]양겸(養謙)이 강화(講和)·봉공(封貢)에 대하여 이렇게 상주(上奏)하였다. “공로(貢路)는 영파(寧波)[註625]로 하는 것이 좋고 관백(關白)을 일본왕(日本王)으로 봉(封)하는 것이 옳으니, [소서(小西)]행장(行長)을 타일러서 왜군(倭軍)을 이끌고 모두 돌아간 후에 봉공(封貢)을 약속과 같이 하도록 해야 합니다.”[註626]

 

○ [만력(萬曆) 22년(1594)]9월에 연(昖)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註627] 황제는 이에 군신(群臣)의 반대를 물리치고 어사(御使)[註628] 곽실(郭實)[註629] 등을 파직시킨 후, 소서비(小西飛)[註630]에게 입조(入朝)하도록 조칙(詔勅)하고[註631] 많은 관인(官人)을 소집, 친히 의논하여 3개항[註632]을 결정하였다.

첫째 왜적(倭敵)을 통어하여 모두 돌아가게 하고, 둘째 봉국(封國)을 했다 하여 진공(進貢)을 연결시키지 말 것이며, 셋째 조선(朝鮮)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것 등이었다. 왜(倭)의 사신(使臣)들이 이 조건을 모두 따르겠다[註633]고 보고하였다. 황제는 좌궐(左闕)[註634]에 다시 유시(諭示)하여 거듭 의논하여 단단히 결말을 짓도록 하였다.[註635]

 

○ [만력(萬曆) 22년(1594)]12월에 봉공(封貢)이 의논 확정되자[註636] 임회후(臨淮侯)[註637] 이종성(李宗城)[註638]을 정사(正使)[註639]로 삼고 도지휘(都指揮)[註640] 양방형(楊方亨)[註641]을 부사(副使)[註642]로 삼아 심유경(沈惟敬)을 대동하고[註643] 일본(日本)에 가게 하면서, [일본국(日本國)]왕(王)[註644]에게는 금인(金印)을 급여(給與)하고,[註645] [소서(小西)]행장(行長)에게는 도독첨사(都督僉事)[註646]를 제수(除授)하게 하였다.[註647]

 

○ [만력(萬曆)] 23년(A.D.1595; 朝鮮 宣祖 28) 9월에 [이(李)]연(昖)이 둘째아들 혼(琿)을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상주(上奏)하였다.[註648] 앞서 연(昖)의 서장자(庶長子)인 임해군(臨海君) [이(李)]진(珒)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놀라고 근심하여 병을 얻었지만,[註649] 둘째아들인 광해군(光海君) [이(李)]혼(琿)은 흩어진 군민(軍民)을 끌어 모아 현저한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주청(奏請)한 것이다.[註650] 예부상서(禮部尙書)[註651] 범겸(范謙)[註652]이 말하기를, “대통(大統)을 잇는 것이 대의(大義)이고 장유(長幼)는 분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니 분수에 어긋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영락(永樂) 연간(A.D.1403~1424; 朝鮮 太宗 3~世宗 6)의 공정왕(恭定王)[註653]의 선례를 들어 거듭 주청(奏請)하였지만 예신(禮臣)의 상주(上奏)에 의하여 허락하여 주지 않았다.[註654]

 

 

○ [만력(萬曆)] 24년(A.D.1596; 朝鮮 宣祖 29) 5월에 연(昖)이 또다시 상소(上疏)하여 혼(琿)을 후사(後嗣)로 세워 줄 것을 청원했으나 예부(禮部)가 불가(不可)함을 고집하는지라 의정(議定)한 바와 같이 조칙(詔勅)하였다. 이 무렵 이 나라가 저위(儲位)를 세우지 않아 국내외(國內外)의 의혹을 사고 있으니, 상서(尙書) 범겸(范謙)은 조선(朝鮮)이 봉책(封册)을 바꾸는 일을 위해 3번이나 상소(上疏)[註655]하여 고집한다고 말했다.[註656] 그 해 9월에 책봉사(册封使)가 일본(日本)에 이르렀다.[註657] 앞서 심유경(沈惟敬)은 부산(釜山)에 이르러[註658] 사사로이 수길(秀吉)에게 망옥(蟒玉)[註659]·익선관(翼善冠)[註660]· 지도(地圖)[註661]·무경(武經)[註662]·양마(良馬)[註663]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註664] 이종성(李宗城)이 욕심이 많고 음란하다하여 왜군(倭軍) 장수에게 쫓겨나자 새서(璽書)를 버리고 밤중에 도망하였다.[註665] 이 일이 뒤에 보고되니 체포하여 심문하였다.[註666] 이에 [양(楊)]방형(方亨)으로 정사(正使)를 삼고,[註667] 유경(惟敬)은 신기영(神機營)[註668]의 벼슬을 주어 부사(副使)로 삼았다.[註669] 이렇게 하여 책봉사(册封使)가 이르니[註670] 관백(關白)은 조선(朝鮮) 왕자(王子)가 사례(謝禮)하러 오지 않고 단지 두 사람을 보내는 데[註671] 그쳤을 뿐 아니라 백토주(白土綢)[註672]를 받들고 상례(賞禮)토록 한 것에 노하여 그 사행(使行)의 접견을 거절하였다.[註673] 유경(惟敬)에게 말하기를, “만약 2왕자(王子)[註674]· 3대신(大臣)[註675]· 3도(都)[註676]· 8도(道)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천조(天朝)[註677]와의 모든 약속을 지켜서 환부(還付)하였을 것이다. 지금 벼슬이 낮은 사람[註678]을 사신으로 하여 보잘 것 없는 물품[註679]을 가지고 와서 하례(賀禮)하려 하니 소방(小邦)[註680]을 욕보이는 것이냐? 아니면 천조(天朝)를 욕되게 하는 것이냐?[註681] 그 곳 조선(朝鮮)에 석만자(石曼子)[註682]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으니, 천조(天朝)의 처분을 기다려 철수하여 귀환하겠다.”[註683] 라고 하였다. 이튿날 공물(貢物)을 올리고[註684] [조선(朝鮮)에서] 파견한 사신이 표문(表文) 2통만 가지고[註685] 책봉사(册封使)를 따라 바다 건너 조선(朝鮮)으로 돌아갔다.[註686] 조정(朝廷)의 의견으로 조선(朝鮮)에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아 검토하니, 그 한통은 사은(謝恩)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한 통은 천자(天子)가 조선(朝鮮)을 처분(處分)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註687]

 

○ (25년 2월) [註688] 당초 [양(楊)]방형(方亨)이 거짓 보고하기를, 지난해 부산(釜山)에서 바다를 건너가니 왜(倭)가 대판(大阪)[註689]에서 책봉(册封)을 받아서 곧 화천주(和泉州)[註690]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왜(倭)는 한창 조선(朝鮮)을 비난하며[註691] 부산(釜山)의 군대는 그대로 머무르게 하고,[註692] 사은(謝恩)의 표문(表文)을 뒤에까지도 보내지 않아 방형(方亨)은 맨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註693] 이에 이르러 유경(惟敬)이 비로소 표문(表文)을 내놓았는데,[註694] 문체(文體)를 살펴보니 조잡하기 짝이 없고, 앞서 풍신(豐臣)[수길(秀吉)]의 도서(圖書)을 함부로 사용하였으며, 정삭(正朔)을 받들지도 않고 인신(人臣)의 예(禮)를 갖추지도 않았다.[註695] 그리고 관전(寬奠)[註696] 부총병(副總兵) 마동(馬棟)[註697] ‘[가등(加藤)]청정(淸正)이 병선(兵船) 2백소(百艘)를 거느리고 기장영(機張營)[註698]에 진을 치고 있다’라고 보고하자, 방형(方亨)은 비로소 사실의 진상을 바로 토설(吐說)하면서[註699] 유경(惟敬)에게 죄를 미루고 석성(石星)이 손수 쓴 여러 통의 서신(書信)을 제출하였다.[註700] 이에 황제는 매우 노하여 석성(石星)[註701]과 심유경(沈惟敬)을 체포하여 심문토록 명(命)하였다.[註702]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註703]에게 계(薊)·요(遼)[註704] 지방을 총독(總督)[註705]시키고, 마귀(麻貴)[註706]를 비왜대장군(備倭大將軍)[註707]으로 전보(轉補)하여 조선(朝鮮)을 경리(經理)[註708]토록 하였다. 또한 첨도어사(僉都御使)[註709] 양호(楊鎬)[註710]를 천진(天津)[註711]에 주재시켜서[註712] 경비(警備)를 맡도록 하고, 양여남(楊汝南)[註713]· 정응태(丁應泰)[註714]에게는 찬화군전(贊畫軍前)을 삼았다.[註715]

 

○ [만력(萬曆)] 25년(A.D.1597; 朝鮮 宣祖 30) 5월에 [형(邢)]개(玠)가 요양(遼陽)[註716]에 이르자,[註717] [소서(小西)]행장(行長)[註718]은 성루(城樓)를 세우고 [가등(加藤)]청정(淸正)[註719]은 파종(播種)하는가 하면, 도이(島夷)들은 물을 저장하면서 조선(朝鮮) 지도(地圖)를 구하고 있는지라 개(玠)는 결국 군사를 움직이기로 했다. 마귀(麻貴)[註720]는 압록강(鴨綠江)을 향해 동쪽으로 출발하는 휘하의 병사가 겨우 1만 7천명이었으므로 증원병을 요청하였다. [형(邢)]개(玠)는 조선(朝鮮) 군대가 오직 수전(水戰)에만 익숙하다고 상소(上疏)하여 사천(四川)· 절강(浙江)의 병정을 모집하고, 아울러 계주(薊州)· 요양(遼陽)·선부(宣府)· 대동(大同)· 산서(山西)· 섬서(陜西)의 보병(步兵) 및 복건(福建)· 오송(吳淞)의 수군(水軍)을 정비해 두도록 하며, 유정(劉綎)[註721]에게는 사천병(四川兵) 및 한병(漢兵)을 통솔하여 공격명령을 기다리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註722] [마(麻)]귀(貴)가 은밀히 보고하기를,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왜(倭)의 수비가 미비한 틈을 타 부산(釜山)을 덮치면 [소서(小西)]행장(行長)은 사로 잡을 수 있고, [가등(加藤)]청정(淸正)은 패주(敗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개(玠)는 좋은 계책이라 여겨 양원(楊元)[註723]에게 남원(南原)에 진을 치게 하고, 오유충(吳惟忠)[註724]은 충주(忠州)에서 진을 치도록 격서(檄書)를 띄웠다.[註725]

 

○ [만력(萬曆) 25년(1597)]6월에 왜(倭)의 병선(兵船) 수천소(數千艘)이 부산(釜山)에 정박하여 조선(朝鮮)의 군수(郡守) [중랑장(中將軍)] 안홍국(安弘國)[註726]을 죽이고 양산(梁山)· 웅천(熊川)으로 차츰 육박해 오자, [심(沈)]유경(惟敬)은 영병(營兵) 2백명을 거느리고 부산(釜山)을 들락거렸다. 개(玠)가 겉으로는 위로하고 도와주는 체하면서 양원(楊元)에게 명하여 기습 체포하게 하니 묶이어 [마(麻)]귀(貴)의 진영에 이르렀다. 유경(惟敬)이 잡히게 되니 향도(嚮導)가 비로소 끊어졌다.[註727]

 

○ [만력(萬曆) 25년(1597)]7월에 왜(倭)가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탈취한 후 경주(慶州)에 들어가고 한산도(閑山島)[註728]를 침공하니, 통제사(統制使)[註729] 원균(元均)[註730]의 군대가 궤멸하면서 끝내 한산도(閑山島)를 잃고 말았다.[註731] 한산도(閑山島)는 조선(朝鮮)의 서해(西海) 어귀에 있는 섬으로 오른쪽으로는 남원(南原)을 가리고 있어서 전라도(全羅道)의 바깥 울타리가 되었다. 그런데 한 번 수비를 그르치고 보니 연안(沿岸) 해역(海域)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 천진(天津)· 등주(登州)· 내주(萊州)에도 돛만 올리면 쳐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수군 3천명이 처음으로 여순(旅順)[註732]에 도착하였다. 한산도(閑山島)가 함락되자, 경략(經略)은 서경(西京) 서쪽의 한강(漢江)과 대동강(大同江)을 수비하여 왜군(倭軍)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억제함과 동시에 조운(漕運)하는 길을 방비하도록 격서(檄書)를 띄웠다.[註733]

 

○ [만력(萬曆) 25년(1597)]8월에 [가등(加藤)]청정(淸正)이 남원(南原)을 포위하고 밤을 타서 기습 공격하니 수장(守將) 양원(楊元)이 달아나고 말았다. 이 때 전주(全州)에는 진우충(陳愚衷)[註734]이 있어 남원(南原)과는 겨우 1백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남원(南原)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고도 우충(愚衷)은 감히 구원하지를 못하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주성(全州城)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마귀(麻貴)는 유격(遊擊)[註735] 우백영(牛伯英)[註736]을 보내어 도와주게 하고, 우충(愚衷)의 군대와 함께 공주(公州)에 진을 치게 했다. 왜군(倭軍)이 마침내 전라(全羅)· 경상도(慶尙道)를 침범한 후 왕경(王京)으로 육박하여 들어왔다. 왕경(王京)은 조선 팔도(朝鮮 八道)의 중심이 되는데, 동쪽으로는 조령(鳥嶺)과 충주(忠州)에서 막아야 하고, 서쪽으로는 남원(南原)과 전주(全州)의 도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원(南原)· 전주(全州)] 2성(城)이 떨어진 후로는 동·서쪽 모두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우리 군사는 숫자도 적고 약하기 때문에 후퇴하여 왕경(王京)을 지키며 한강(漢江)을 요해처(要害處)로 의지하여야 했다. 그러나 마귀(麻貴)는 [형(邢)]개(玠)에게 청원하여 왕경(王京)을 버리고 압록강(鴨綠江)으로 물러나 지키자고 하였다. 해방사(海防使)[註737] 소응궁(蕭應宮)[註738]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어 평양(平壤)에서 급히 왕경(王京)으로 쫓아와 이를 만류하였다. 마귀(麻貴)가 군사를 동원하여 직산(稷山)[註739]을 지키니, 조선(朝鮮) 역시 도체찰사(都體察使)[註740] 이원익(李元翼)[註741]을 보내어 조령(鳥嶺)을 거쳐 충청도(忠淸道)로 나오는 적의 선봉(先鋒)을 저지하였다. 개(玠)가 직접 왕경(王京)에 이르니 인심(人心)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형(邢)]개(玠)가 참군(參軍)[註742] 이응시(李應試)[註743]를 불러 계책을 묻자, [이(李)]응시(應試)는 조정의 기본 방침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개(玠)가 말하기를, “겉으로는 싸우면서 안으로는 화의(和議)하고자 하고, 평면으로는 토벌하되 이면으로는 초무(招撫)한다(양전음화陽戰陰和, 양초음무陽剿陰撫)[註744]는 방침이니, 정부(政府)의 여덟 글자로 된 비밀 계획은 누설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자, 응시(應試)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수월한 일입니다. 왜(倭)가 우리를 배반한 것은 [황제의] 처분(處分)에 기대를 걸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함부로 양원(楊元)을 죽이지 않은 것은 여전히 처분(處分)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곧 사람을 보내어 ‘심유경(沈惟敬)은 죽지 않았다’고 그들을 깨우친다면 물러날 것입니다.”[註745] 아울러 이대간(李大諫)[註746]을 [소서(小西)]행장(行長)에게, 풍중영(馮仲纓)[註747]을 [가등(加藤)]청정(淸正)에게 보내기를 청하니, 개(玠)가 그대로 따랐다.

 

○ [만력(萬曆) 25년(1597)]9월에 왜(倭)가 한강(漢江)에 이르자 양호(楊鎬)는 장정명(張貞明)[註748]에게 유경(惟敬)의 수서(手書)를 들려 보내어, 그들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조용히 [황제의] 처분(處分)을 기다리는 성의에 어긋난다고 책망하였다. 행장(行長)과 정성(正成)[註749] 또한 청정(淸正)의 경솔한 행동을 나무라자 정읍(井邑)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마귀(麻貴)가 드디어 청산(靑山)[註750]· 직산(稷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고를 올리니, 소응궁(蕭應宮)이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왜군(倭軍)은 유경(惟敬)의 수서(手書)로 퇴각한 것이요, 청산(靑山)· 직산(稷山)에서는 한번도 어울려 싸운 적이 없는데 무슨 공을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형(邢)]개(玠)와 [양(楊)]호(鎬)가 노한 나머지 응궁(應宮)의 비겁함을 꾸짖고, 유경(惟敬)을 석방하지 않은 채 모두 체포하였다.[註751]

 

○ [만력(萬曆)] 25년(A.D.1597; 朝鮮 宣祖 30) 11월에 개(玠)가 병정을 많이 뽑아 모으니 황제는 내탕금(內帑金)[註752]을 풀어 호궤(犒饋)하고, 개(玠)에게 상방검(尙方劍)[註753]을 내리는 한편, 어사(御使) 진효(陳效)[註754]에게 그 군대를 감찰토록 하였다. 개(玠)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삼협(三協)[註755]으로 편성하였다. [양(楊)]호(鎬)는 [마(麻)]귀(貴)와 함께 좌(左)·우협(右協)을 거느리고 충주(忠州)· 조령(鳥嶺)에서부터 동안(東安)[註756]을 향하여 경주(慶州)로 내달아 [가등(加藤)]청정(淸正)을 집중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대간(李大諫)을 [소서(小西)]행장(行長)에게 보내어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구원하러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게 하는 한편, 중협(中協)을 파견하여 선성(宣城)[註757]에 진을 치게 해서 동(東)으로는 경주(慶州)를 돕고, 서(西)로는 전라도(全羅道)의 왜(倭)를 견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은 군사로는 조선(朝鮮) 군대와 합류하여 순천(順天) 등지를 공격하는 체하여 [소서(小西)]행장(行長)이 동쪽을 구원하는 것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 [만력(萬曆) 25년(1597)]12월에 [군대가] 경주(慶州)에서 집결하였다. 마귀(麻貴)는 황응사(黃應賜)(양,暘)[註758]를 [가등(加藤)]청정(淸正)에게 파견하여 뇌물을 주고 화의(和議)를 맺고는 많은 군사를 이끌고 그의 진영을 갑자기 공격하였다. 이 때 왜군(倭軍)은 울산(蔚山)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성(城)은 산세(山勢)의 험준함을 이용하였으며, 성(城) 가운데를 흐르는 한 줄기 강(江)이 부채(釜寨)[註759]로 통하고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거쳐 부산(釜山)과 통하였다. 귀(貴)는 울산(蔚山)을 집중 공격하고자 하여도 부산(釜山)에 있는 왜군(倭軍)이 언양(彦陽)을 거쳐 구원하러 올까 두려워 한 나머지 의병(疑兵)을 많이 벌려 놓았다. 한편으로 또 장수를 파견하여 그들의 물길을 끊은 뒤[註760] 왜군(倭軍)의 보루(保壘)로 육박하여 들어갔다. 유격장(遊擊將) 파채(擺寨)[註761]이 얼마 안되는 기병(騎兵)으로 왜군(倭軍)을 유인하여 복병이 있는 곳까지 끌여들여 4백여명을 목베고 그 용장(勇將)을 사로잡았다.[註762] 이긴 기회를 타서 두 곳의 요책(要柵)을 공략하여 빼앗으니, 불에 타 죽은 왜군(倭軍)이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도산(島山)[註763]으로 달아나 세 곳의 요새(要塞)를 연달아 구축하였다. 이튿날 유격(遊擊) 모국기(茅國器)[註764]가 절강병(浙江兵)을 이끌고 선봉으로 올라가 연거푸 무찔러 목베거나 사로잡은 왜병(倭兵)이 매우 많았다. 이에 왜군(倭軍)은 성책(城柵)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도산(島山)은 울산(蔚山) 높이만 하고 석성(石城)이 대단히 견고하여 위로 공격하던 우리 군사의 손상이 많았다. 여러 장수들이 이를 두고 의논하기를, “왜(倭)가 물의 공급이 쉽지 않고 군량을 잇기가 어려워지면 앉아서 곤란을 당하게 되니, [가등(加藤)]청정(淸正)은 싸우지 않고도 잡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양(楊)]호(鎬) 등도 이를 옳다고 여기고 군사를 나누어서 10일을 밤낮으로 포위하였다. 굶주림이 심해진 왜군(倭軍)이 거짓으로나마 항복을 해오는 체하자 공격을 늦추어 주었더니, 얼마 안되어 [소서(小西)]행장(行長)의 많은 구원병이 들이닥쳐 군대의 후방을 에워싸려고 하였다. 그러자 호(鎬)가 명령을 하달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몰아 서쪽으로 달아나니 여러 군진(軍陣)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왕경(王京)으로 돌아오니 죽은 사졸(士卒)이 2만이나 되었다. 황제가 이 보고를 받고 몹시 노하여 호(鎬)를 파직시켜 심문케 하고[註765] 천진순무(天津巡撫)[註766] 만세덕(萬世德)[註767]으로 교체시켰다. 상세한 사실은 [양(楊)]호열전(鎬列傳)에 있다.

 

○ [만력(萬曆)] 26년(A.D.1598; 朝鮮 宣祖 31) 정월에 형개(邢玠)가 앞서의 전투에서는 수군(水軍)이 적어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하여 강남(江南)의 수병(水兵)을 더욱 많이 모집하여 해운(海運)으로 지구전(持久戰)을 펼 계책을 의정(議定)하였다. 2월에 도독(都督)[註768] 진린(陳璘)[註769]은 광주(廣州)의 병(兵)을, 유정(劉綎)은 사천(四川)의 병(兵)을, 등자룡(鄧子龍)[註770]은 절강(浙江)과 직예(直隷)의 병(兵)을 이끌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당도하였다. 개(玠)는 군대를 3협(協)으로 나누어 수륙(水陸) 4로(路)[註771]로 하고, 로(路)마다 대장((大將)을 배치하였다. 중로(中路)는 [이(李)]여매(如梅),[註772] 남로(南路)는 [마(麻)]귀(貴), 서로(西路)는 [유(劉)]정(綎), [수(水)]로(路)는 [진(陳)]린(璘)이 맡아서 각기 자기의 관할 신지(汛地)를 지키면서 기회를 노려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왜(倭)역시 소굴을 세 군데로 나누니, 남로(南路)는 [가등(加藤)]청정(淸正)으로 울산(蔚山)에 주둔하고, 서로(西路)는 [소서(小西)]행장(行長)으로 율림(栗林)· 예교(曳橋)에 주둔하여 몇겹의 보루를 쌓았으며, 중로(中路)는 석만자(石曼子)[註773]가 맡아 사주(泗州)[註774]에 주둔하였다. 행장(行長)의 수군(水軍)이 번갈아 쉬면서 군량을 운반하러 드나들기를 빠른 말 달리 듯 하였다. 우리 군대가 기일(期日)을 약정하고 일제히 진군하는데 얼마 후 요양(遼陽)에서 이여송(李如松)이 패하여 죽었다는 보고가 있어 [이(李)]여매(如梅)를 돌아오게 하여 그 자리에 부임시키고, 중로(中路)는 동일원(董一元)[註775]으로 교체하도록 조칙(詔勅)하였다.

[정(丁)]응태(應泰)가 [양(楊)]호(鎬)의 죄상을 케게 되니, [이(李)]연(昖)이 이를 건단(乾斷)에 회부하여 진무(鎭撫)를 독려해 주어 적을 토벌하는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 응태(應泰)는 호(鎬)가 지난 날 조선(朝鮮)으로 하여금 성(城)을 쌓도록 한 것으로 호(鎬)의 죄(罪)를 성립시키면서, “견고한 성곽을 가지고 바라던 바를 성취하게 되면 조선(朝鮮)에 대한 [중국(中國)의] 뒷 날의 우환거리를 만드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연(昖)이 해명하자, 황제는,

“여러 해를 두고 군대를 동원하고 군량을 보내는 것은 그대 나라가 평소에 충성스러웠고 신의가 있었기 때문이요. 사람들의 구설(口舌)에 혼자 두려워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다.[註776]

 

○ [민력(萬曆)] 26년(A.D.1598; 朝鮮 宣祖 31) 9월에 군대를 여러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유정(劉綎)은 [소서(小西)]행장(行長)의 진영으로 바짝 다가가 행장(行長)과 화호(和好)의 회합을 가질 것을 약속하고는 이튿날 성을 공격하여 92명을 목베었다. 진린(陳璘)의 수군(水軍)은 [왜선(倭船)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왜선(倭船) 1백여척을 부수었다. 행장(行長)이 몰래 기병(騎兵) 1천여명을 출동시켜 반격하니, 정(綎)은 불리하여 퇴각하고 린(璘) 역시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마귀(麻貴)는 울산(蔚山)에 이르러 많은 왜군(倭軍)을 목베고 사로잡았으나, 왜군(倭軍)이 거짓으로 퇴각하면서 그를 유인하니, 귀(貴)는 빈 보루(保壘)에 들어갔다가 복병이 일어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동일원(董一元)은 진주(晋州)로 진격하여 이긴 기세를 타서 강을 건너 성채 2개를 연달아 불질렀다.

왜군(倭軍)이 후퇴하여 사주(泗州)의 낡은 진터에 의지하자, 죽을 힘을 다해 싸워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새로 구축한 성채로 육박하였다. 그 성채는 삼면이 강을 끼고 한 면은 뭍으로 통하였는데,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만들었고, 바다의 배가 성채 아래 정박하는 것이 1천여척을 헤아렸다. 김해(金海)와 고성(固城)에도 성채를 축조하여 좌(左)·우익(右翼)을 삼고 있었다.

 

○ [만력(萬曆) 26년(1598)]10월에 동일원(董一元)이 장수를 보내어 사면에서 섬을 공격하면서 화기(火器)[註777]를 사용하여 성채문(門)을 쳐부수니,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나아가 책(柵)을 뽑아 내었다. 이 때 갑자기 진영 안에서 화약이 폭발하여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註778] 왜군(倭軍)이 이 기회를 타고 돌진해 오고, 고성(固城)의 왜군(倭軍) 또한 들이닥치니, 군사들은 결국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달아나 진주(晋州)로 돌아왔다. 황제가 이 보고를 받고 두 유격(遊擊)을 참수(斬首)하여 진영에 돌리게 하고,[註779] 일원(一元) 등은 대죄입공(帶罪立功)[註780]하도록 하였다. 이 달에 복건도어사(福建都御史) 김학증(金學曾)[註781]이, 7월 9일 평수길(平秀吉)이 죽어서 여러 곳에 있는 왜군(倭軍)이 모두 귀국할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註782]

 

○ [만력(萬曆)] 26년(A.D.1598; 朝鮮 宣祖 31) 11월에 [가등(加藤)]청정(淸正)이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마귀(麻貴)는 드디어 도산(島山)· 유포(酉浦)[註783]에 들어갔고, 유정(劉綎)은 예교(曳橋)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석만자(石曼子)가 배를 이끌고 [소서(小西)]행장(行長)을 구원하려 하자, 진린(陳璘)이 이를 맞이하여 쳐부수어 패배시켰다.[註784] 여러 곳의 왜군(倭軍)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註785] 왜(倭)가 조선(朝鮮)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는데도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이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관백(關白)[註786]이 죽고서야 화란(禍亂)이 비로소 종식되었다.[註787]

 

○ [만력(萬曆)] 27년(A.D.1599; 朝鮮 宣祖 32) 윤(閏) 4월에 왜(倭)를 평정하였다는 조칙(詔勅)을 천하에 포고(布告)하였다.[註788] 그리고 [이(李)]연(昖)에게는 다음과 같이 칙유(勅諭)하였다. “왜노(倭奴) 평수길(平秀吉)이 방자하게도 부도(不道)한 짓을 하여 그대의 나라를 유린하였소. 짐(朕)은 왕(王)이 대대로 지극한 충성과 신의를 가졌음을 생각하고 매우 가슴아파하며 7년 동안 이 왜적을 평정하는데 전념하였소. 당초에는 가벼운 징벌로 포용의 덕을 계속하여 보이려 했으나 끝내는 혹독하게 토벌하고 말았소. 대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나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나로서는 부득이한 것이었소. 강역이 안정되고 난리가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탕평(蕩平)한 정치를 베풀어야 할 것이오. 신령(神靈)이 흉악한 무리의 방자함을 미워하여 그 괴수를 몰래 죽이는지라, 우리 군사가 이 기회를 이용해 쫓겨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惡人의 괴수들을 모조리 쳐 죽여 바다의 모퉁이가 평온하여 졌다는 승전(勝戰)을 알리는 보고가 와서야 근심과 괴로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소. 왕(王)은 비록 구물(舊物)을 돌려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새로 만든 것과 다름없으니, 쇠잔한 것은 분기시키고 피폐한 것을 일으키는데 갑절의 힘을 쏟아야 할 것이오. 왜(倭)는 비록 도망하여 돌아갔지만 그 무리는 아직도 남아 있소. 이제 형개(邢玠)에게는 군사를 정돈하여 경사(京師)로 돌아오도록 하고, 만세덕(萬世德) 등은 소용(所用)되는대로 남겨 변방을 분산하여 지키도록 하겠소. 왕(王)은 마땅히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지난날의 치욕을 잊지 말도록 하시오. 지극한 충성과 효성만이 옛날 경사(慶事)를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오.”[註789]

 

○ [만력(萬曆) 27년(1599)]5월에 [형(邢)]개(玠)가 동정선후사의십사(東征善後事宜十事)[註790]를 조목별로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다.

一. 수비병은 남기되 기병(騎兵)· 보병(步兵)· 수군(水軍) 모두 합쳐 3만 4천명 남짓으로 하고, 말은 3천필(匹)로 할 것.

一. 월간(月間) 군량을 책정하되 매년 은(銀) 91만 8천냥(兩) 남짓으로 할 것.

一. 본색(本色)을 정하되 필요에 따라 쌀과 콩을 적용(適用)하기로 하고, 요동(遼東)· 천진(天津)· 산동(山東) 등지에서 매년 13만석(石)을 공급토록 분담시킬 것.

一. 중로(中路) 해방도(海防道)를 머물러 있게 할 것.

一. 향사(餉司)에서 헤아려 처리하도록 할 것.

一. 장수(將帥)를 중용(重用)할 것.

一. 순포(巡捕)를 새로 설치할 것.

一. 관할 지역을 분담시킬 것.

一. 군사 훈련을 꾀할 것.

一. 당사국에 책임을 지울 것.

이상의 조목에 대하여 정신(廷臣)들이 의논하기를,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지치게 하고 물자를 소모하여 이제 비로소 쉬게 되었으니, 마땅히 안으로 근본을 튼튼히 하여야 옳으며, 또다시 군사를 번거롭게 하고 물자를 소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 나라는 병란(兵亂)이 일어난 후부터 왜군(倭軍)의 소란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우리 군사에게도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전후(戰後) 처리에 대한 것은 그 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 먼저 그들의 군량이 남는가 모자르는가를 헤아린 뒤 비로소 우리 군대의 철수와 잔류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말을 더 사들이고 표병(標兵)을 더 보태며 순포(巡捕)를 새로 설치하는 것이나 향부(餉府)의 관리를 두어 관리케 하는 것들은 모두 정지시키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니,[註791] 황제는 독무(督撫)가 국왕(國王)을 만나 [상의한 후] 참작하여 상주(上奏)토록 명령하였다.

 

 

○ [만력(萬曆)] 27년(A.D.1599; 朝鮮 宣祖 32) 8월에 [이(李)]연(昖)이 방물(方物)을 바치고 대공사(大工事)를 도왔기에 전례대로 포상하였다.[註792] 10월에 수군 8천명을 머물게 하여 수비를 돕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註793] 그 곳에서 철수한 관병(官兵)은 요양(遼陽)에 주둔시켜 난리에 대비토록 하였다. [만력(萬曆)] 28년(A.D.1600; 朝鮮 宣祖 33) 4월에 의주(義州) 등지의 창고에 남겨 둔 쌀과 콩을 요양(遼陽)으로 옮길 것을 청하자,[註794] 호부(戶部)에서 의논하기를, “운송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바로 그 나라에 주어 그들의 쇠잔하고 피로함을 구휼하여 황제의 어지심을 환히 드러내 보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므로,[註795] 조칙(詔勅)으로 좋다고 하였다.

 

○ [만력(萬曆)] 29년(A.D.1601; 朝鮮 宣祖 34) 2월, 병부(兵部)에서 경독조진칠사(經督條陳七事)[註796]를 올렸다.

一. 병사(兵士)를 훈련시키도록 할 것. 고려인(高麗人)[註797]은 강하고 사나워서 추위나 고통을 잘 견디지만 장삼대수(長衫大袖)로는 훈련을 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속오(束伍)의 법(法)[註798]으로 가르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一. 요해처(要害處)를 수비토록 할 것. 조선(朝鮮)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부산(釜山)은 대마도(對馬島)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고, 거제(巨濟)는 그 다음으로 중요하니 많은 군대를 두어 각각 지키게 하고, 아울러 울산(蔚山)· 개산(開(한,閑)山) 등지도 모두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一. 요새를 정비토록 할 것. 왕경(王京)은 북으로 여러 겹의 산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넓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충주(忠州)는 좌우로 조령(鳥嶺)· 죽령(竹嶺)이 양(羊)의 창자처럼 꼬불꼬불 둘러싸여 있으니, 한 사람으로써 도적을 막을 수 있는 요새입니다. 현재 진영과 보루의 옛 터전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급히 수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一. 성곽(城廓)과 해자(垓字)를 건설토록 할 것. 조선(朝鮮) 전역에서 열에 아홉은 성곽이 없습니다. 평양(平壤) 서북쪽의 압록강(鴨綠江)· 패강(浿江)[註799] 두 강이 모두 남쪽으로 바다와 통하고 있는데, 만약 왜(倭)가 따로 군대 일부만 파견하여 평양(平壤)을 점거한다면 왕경(王京)을 구원할 길이 막히고 말 것이니, 모든 둔취(屯聚)한 곳을 수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一. 무기와 장비를 만들도록 할 것. 왜(倭)가 지상전투(地上戰鬪)는 유리하면서 해전(海戰)에서 불리했던 것[註800]은 전함(戰艦)의 규모가 무겁고 커서 공격에 이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호(福唬)[註801]를 본뜬 배 1백 10척을 건조하여 기병(奇兵)으로 삼는 한편, 신기백자화전(神機百子火箭)[註802]도 만들게 해야 할 것입니다.

一. 기이한 재주를 가진 인물을 찾도록 할 것. 조선(朝鮮)은 대대로 벼슬을 귀하게 여기고 노역(勞役)을 천하게 여겨 [기술자에 대한] 일체의 벼슬길을 막아버린 까닭에, 가끔 그들이 왜(倭)나 적국(敵國)으로 달아나 그 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이에 마땅히 격식을 깨뜨리고라도 그들을 찾아 채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一. [중국의] 내치(內治)를 가다듬을 것. 나라의 동쪽과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등주(登州)와 여순(旅順)으로 문호(門戶)를 삼으며, 진강(鎭江)으로 인후(咽喉)를 삼고 있으니, 구원군을 모두 철수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견고히 하는 것은 조선(朝鮮) 또한 견고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조선(朝鮮)에 조칙(詔勅)하여 힘써 행하도록 하였다.[註803]

 

○ [만력(萬曆)] 29년(A.D.1601; 朝鮮 宣祖 34) 9월에 [조선(朝鮮)에서] 상주(上奏)하여 하사(下賜)받은 고명(誥命)·면복(冕服)[註804]이 전란을 만나서 없어졌다고 하며 더 보내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註805] 이 무렵 왜국(倭國)에서는 내란(內亂)이 일어났으며,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지(平義智)는 모든 항복한 사람을 조선(朝鮮)으로 돌려보내면서 서(書)를 보내어 강화(講和)하기를 빌었다. 그러면서 수길(秀吉)의 장수 가강(家康)이 수십만석(石)의 군량을 운반하여 군대를 일으킬 물자로 쓴다고 공언(公言)하며 조선(朝鮮)을 위협하였다. 조선(朝鮮)과 대마도(對馬島)는 한자락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고, 섬에는 오곡(五穀)이 생산되지 아니하여 조선(朝鮮)에서 준 미곡(米穀)에 의지하여 왔다. 전란이 일어난 뒤부터는 무역(貿易)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강화(講和)하기를 위협하였다. 수길(秀吉)이 죽고 우리 군대가 모두 철수하자 조선(朝鮮)은 왜(倭)를 두려워하다 시피 했고, 왜(倭)와 국교(國交)를 통하고자 하여도 중국(中國)에 스스로 죄를 짓게 됨을 두려워 하였다. 12월에 연(昖)이 도왜(島倭)가 강화(講和)하기를 원하는데 대하여 결정해 주기를 청하여 왔다.[註806] 병부(兵部)에서, “먼 곳에서의 남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총독(總督) [만(萬)]세덕(世德)에게 상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므로,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註807]

 

○ [만력(萬曆)] 30년(A.D.1602; 朝鮮 宣祖 35) 11월에 연(昖)이 말하기를, “왜사(倭使)가 자주 와서 강화(講和)를 강요하지만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조금씩 드러나니, 장수를 뽑아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본국(本國)의 군사훈련과 방비를 함께 살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註808] 황제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장사(將士)를 남겨 훈련을 시켰고, 법도를 마련한 것이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파견할 필요가 없소.” 라고 하며, 그 나라 사신에게 명하여 [국왕(國王)을] 훈계하고 격려하는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게 하였다.[註809]

 

○ [만력(萬曆)] 33(2)년(A.D.1605; 朝鮮 宣祖 38) 9월에 [이(李)]연(昖)이 [이(李)]혼(琿)을 봉하여 세자(世子)를 삼을 것을 또다시 청해왔지만, 예부(禮部)에서는 여전히 장자(長子)를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견지하였다.[註810] [만력(萬曆)] 35년(A.D.1607; 朝鮮 宣祖 40) 4월에 연(昖)이 [덕천(德川)]가강(家康)[註811]이 강화(講和)를 바란다는 보고를 해 오자, 병부(兵部)에서는 국왕(國王)이 스스로 알아 처리하도록 허가할 따름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부터 강화(和議) 교섭이 끊임없이 이어져 3년 뒤에는 마침내 교역(交易)을 계획하게 되었다.[註812]

 

○ [만력(萬曆)] 36년(A.D.1608; 朝鮮 宣祖 41) 에 [이(李)]연(昖)이 졸(卒)하였다. 광해군(光海君)[註813] [이(李)]혼(琿)이 스스로 국사(國事)를 맡아 본다고 일컬으면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부고(訃告)하는 한편, 증시(贈諡)를 청해 왔다.[註814] 황제는 그가 제멋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며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그 나라 신민(臣民)의 공의(公議)를 보고하도록 하였다.[註815] 이 무렵 우리 대청(大淸)의 군대가 여러 부(部)를 정복하여 차츰 조선(朝鮮)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병부(兵部)에서는 그 나라 왕에게 군비(軍備)를 철저히 갖추고 변방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의정(議定)하였다. 아울러 요좌(遼左)의 총독(總督)·순무(巡撫) 및 각진(各鎭)의 장수로 하여금 관인(官人)을 [청(淸)으로] 파견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도록 하자는 뜻을 널리 알리게 하는 조칙(詔勅)을 내리도록 청하니 황제가 그대로 따랐다.[註816] 10월에 [이(李)]혼(琿)을 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삼으니 그 나라 신민(臣民)의 청에 따른 것이다.[註817]

 

○ [만력(萬曆)] 37년(A.D.1609; 朝鮮 光海君 1) 2월에는 [이(李)]연(昖)의 시호(諡號)를 소경(昭敬)이라 하고, 관인(官人)을 파견하여 [이(李)]혼(琿) 및 그의 비(妃) 유씨(柳氏)[註818]에게 고명(誥命)을 내려 주었다.[註819] 당초 조선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중국(中國)의 힘을 빌어 수복할 수 있었는지라 왜(倭)는 부산(釜山)을 버리고 도망가서도 몰래 그 강역(疆域)을 넓히고자 하여 이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해상(海上)에서는 왜(倭)가 부산(釜山)을 얻고 조선(朝鮮)이 왜(倭)와 더불어 통교(通交)하게 되었다는 헛소문이 나돌았다.[註820]

 

○ [만력(萬曆)] 41년(A.D.1613; 朝鮮 光海君 5) 9월에 총병관(總兵官) 양종업(楊宗業)[註821]이 이 사실을 보고 하였다. 혼(琿)이 이를 해명하는 소(疏)를 올리므로[註822] 황제는 그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는 위로의 조칙(詔勅)을 내렸다. [만력(萬曆)] 42년(A.D.1614; 朝鮮 光海君 6) 4월에 생모(生母) 김씨(金氏)[註823]를 추봉(追封)해 주기를 주청(奏請)해 왔다.[註824] [8月][註825] 예부(禮部)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詳考)하여 적모(嫡母)가 봉(封)함을 받은 경우에도 생모(生母)가 [적모(嫡母)보다] 먼저 죽은 경우에는 추증(追贈)할 수 있다 하고 생모(生母) 김씨(金氏)를 봉(封)하여 국왕(國王)의 차비(次妃)로 삼도록 하였다.[註826]

 

○ [만력(萬曆)] 43년(A.D.1615; 朝鮮 光海君 7) 11월에 동지절(冬至節)을 경하(慶賀)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아울러『오학편(吾學編)』[註827]·『감산당별집(弇山堂別集)』[註828]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해 줄 것과, 조선(朝鮮)에 관한 사실이『대명회전(大明會典)』에 틀리게 기록되어 있으니 고쳐 달라고 상주(上奏)하였다.[註829] 예부(禮部)에서 말하기를, “야사(野史)를 전거(典據)로 삼을 것은 못되지만 지금 청원하는 치욕은 역당(逆黨)과 함께 문책을 받는 꼴이 되었으니, 그 성의를 가련하게 여겨 사관(史館)에 회부(回付)하여 알리도록 함이 옳습니다.”라고 하므로,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註830]

앞서 혼(琿)이 생모(生母)의 봉작(封爵)을 받아내더니 이제는 또 관복(冠服)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예부(禮部)의 대신은, 김씨(金氏)는 측실(側室)이므로 예(禮)에는 존비(尊卑)를 엄격히 구별하여야 하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다. [만력(萬曆)] 45년(A.D.1617; 朝鮮 光海君 9) 정월에 혼(琿)이 재차 청원하자, 황제는 혼(琿)이 여러번 간청하므로 부득이 허락하였다.[註831]

 

○[만력(萬曆)] 47년(A.D.1619; 朝鮮 光海君 11) 에 양호(楊鎬)가 마림(馬林)[註832]·두송(杜松)[註833]· 유정(劉綎) 등을 인솔하고 출전하였으나 우리 대청(大淸)의 군대에 패배하였다.[註834] 조선(朝鮮)은 원병(援兵)을 보내어 싸움을 도왔지만 더러는 항복하고 더러는 전사하였다.[註835] [이(李)]혼(琿)이 급박함을 보고하므로 더욱 두터운 은혜로 구휼(救恤)하는 조칙(詔勅)을 내렸다. 11월, 병부(兵部)에서 아뢰기를, “조선(朝鮮)에서 조공(朝貢)하러 다니는 길은 군대를 늘리어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註836] 고 하므로, 진강(鎭江)[註837] 등지에 군대를 두어 경략(經略) 웅정필(熊廷弼)[註838]로 하여금 위임 관장토록 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렸다.[註839]

 

○ [만력(萬曆)] 48년(A.D.1620; 朝鮮 光海君 12) 정월에 혼(琿)이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註840]

“적병(敵兵)이 8월 중에 북관(北關)[註841]을 공격하여 깨뜨리니 김태길(金台吉)[註842]은 스스로 분사(焚死)하고 백양(白羊)[註843]은 나아가 항복하였습니다. 철령(鐵嶺)[註844]의 전투에서는 몽고(蒙古)의 재새(宰賽)[註845] 역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나라에서 모의(謀議)하기를 ‘조선(朝鮮)· 북관(北關)· 재새(宰賽)가 한결같이 남조(南朝)에 원병(援兵)을 보냈는데 지금 북관(北關)과 재새(宰賽)를 모두 멸망시켰으니 조선(朝鮮)만 홀로 남겨 둘 수 없다’라고 합니다.

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우모채(牛毛寨)[註846]와 만차령(萬遮嶺)[註847]에 군대를 두어서 관전(寬奠)[註848]과 진강(鎭江) 등지를 공략하려 한다고 하니, 관전(寬奠)과 진강(鎭江)은 청성(昌城)[註849]· 의주(義州)[註850] 등의 여러 보루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므로 대단히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에 있습니다. 적(敵)이 만약 애양(靉陽)[註851] 지방의 위 아골관(鴉鶻關)[註852]으로부터 봉황성(鳳凰城)[註853]의 뒤를 돌아 빠져 나오는 길을 택한다면 하루만 말을 타고 달려도 관전(寬奠)· 진강(鎭江)· 창성(昌城)은 한결같이 스스로 방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안으로는 요좌(遼左)의 팔참(八站)[註854]이, 밖으로는 동강(東江)[註855]의 1성(城)이 서로 격리되어 원조할 길이 막히게 되니, 마음이 섬뜩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빨리 대병(大兵)을 동원하여 앞뒤에서 함께 협공하여 변방을 튼튼히 하기 바랍니다.” 이 무렵 요동진(遼東鎭)에서 조선(朝鮮)과 대청(大淸)이 강화(講和)하였다는 추측 보고가 있었다.[註856] 조정(朝廷)의 의논이 마침내 ‘혼(琿)이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적에게 순종하니 관인(官人)을 파견하여 선유(宣諭)하는 것이 옳다’라고도 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조선(朝鮮)을] 감호(監護)해야 한다’라고도 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혼(琿)이 이에 해명하는 소(疏)를 올리니 ‘2백년 동안 사대(事大)하는 충성심은 죽어도 변함이 없다’라고 하는 문사(文辭)가 대단히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예부(禮部)와 병부(兵部)에서 칙령을 내려 알아 듣도록 타일러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자고 청하니 황제가 그 의견을 옳게 여겼으나, 칙령(勅令)을 배신(陪臣)으로 하여금 가져가게 하고 관인(官人)은 파견하지 않았다.[註857]

 

○ 천계(天啓) 원년(A.D.1621; 朝鮮 光海君 13) 8월, 조선(朝鮮)의 공도(貢道)[註858]를 고쳐 해로(海路)로 등주(登州)에 이르러 바로 경사(京師)에 닿도록 하였다.[註859] 이 무렵 모문룡(毛文龍)[註860]이 총병(總兵)으로 피도(皮島)[註861]에 주둔하여 도류민(逃流民)을 불러 모아 군대로 삼고[註862] 조선(朝鮮)으로부터 보급을 받고 있었다.[註863] 11월에 혼(琿)이 상주(上奏)[註864]하기를,

“군량을 보급하기가 힘겨우니 만력(萬曆) 연간(A.D.1573~1615; 朝鮮 宣祖 6~光海君 7)의 동정(東征)때의 전례대로 산동(山東) 지방의 곡식을 운송해 주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천계(天啓) 3년(A.D.1623; 朝鮮 光海君 15) 4월, 나라 사람들이 [이(李)]혼(琿)을 폐위하고 그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 [이(李)]종(倧)[註865]을 세우니 소경왕비(昭敬王妃)[註866]의 명으로 국사(國事)를 대리(代理)케 하고,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독무(督撫)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전주(轉奏)케 하였다.[註867] [모(毛)]문룡(文龍)도 이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등주순무(登州巡撫) 원가립(袁可立)[註868]이 상언(上言)[註869] 하기를, “혼(琿)이 과연 부도(不道)하였으니 태비(太妃)가 중국(中國)의 처분을 기다려 다시 [왕을] 세우려고 갖추어 상주(上奏)하는 것을 청허(聽許)하는 것이 옳습니다.”고 하였는데, 소(疏)를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고 올리지 않았다.

 

○ [천계(天啓) 3년(1623)]8월, 왕비(王妃) 김씨(金氏)가 종(倧)을 왕으로 봉(封)해 주기를 바라는 소(疏)를 올리니,[註870] 예부상서(禮部尙書) 임요유(林堯兪)[註871]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朝鮮)의 폐립(廢立) 사건은 내외 여러 신하들의 충성심을 북돋우고 있으니, 죄상을 세상에 알리어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급히 죄를 다스리지 말고 그 나라의 공물(貢物)을 받으며 전후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책망(責望)하고 민심(民心)의 동향을 살펴야 한다고 하기도 하며, 또는 종(倧)으로 하여금 적(敵)을 토벌하도록 하여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씻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으니, 모두가 채택할 만한 것들입니다. 혼(琿)이 진실로 패덕(悖德)하여 종(倧)이 진심으로 조정(朝廷)을 받들고자 반신(叛臣)을 죄 주었다고 말한 것은 오직 [모(毛)]문룡(文龍) 한사람 뿐입니다. 황상(皇上)께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패역한 무리를 토벌하여 강상(綱常)을 북돋워 세우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법도(法度)입니다. 그들이 평소 공순(恭順)함을 내세우고 있음은 염두에 두지 마시고 다른 이민족(異民族)과 다르다면 믿을 만한 사신을 다시 파견하여 문룡(文龍)과 회동(會同)하고, 신민(臣民)을 널리 모아 몇 번이고 물어보고 살펴서 조사한 사실이 명확하다면 황제께서 친히 재결(裁決)하여 주시기를 재차 청원합니다.” 이에 황제는 좋다고 대답하였다.[註872]

 

○ [천계(天啓) 3년(1623)]12월, 예부(禮部)에서 다시 상언(上言)하였다.[註873] “신(臣)이 앞서 병부(兵部)와 함께 등래순무(登萊巡撫)[註874]에게 이자(移咨)함과 아울러 모(毛)[문룡(文龍)]의 진영에 차자(箚子)하고 관인(官人)을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그 나라에서 보낸 공결십이도(公結十二道)[註875]에 의하면, 종실(宗室)에서부터 팔도(八道)의 신민(臣民)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종(倧)이 공순(恭順)하다 일컫습니다. 또한 그들 배신(陪臣)들도 다투어 간곡하게 바라면서 말하기를,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군민(君民)의 주인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라옵건대 먼저 칙유(敕諭)를 내리시어 종(倧)으로 하여금 민사(民事)를 통리(統理)케 함과 아울러 군사를 징발하고 군자(軍資)를 거두어 [모(毛)]문룡(文龍)과 군사 행동을 함께 하도록 하여 차츰 일이 되어 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중신(重臣)을 파견, 정식으로 책봉(册封) 의례(儀禮)를 베풀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작고 연약한 나라를 사랑하여 어루만지는 데 적절할 뿐만 아니라 변방을 튼튼히 하는 방책에도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황제는 이 말대로 따랐다.[註876]

 

○ [천계(天啓)] 4년[註877] (A.D.1624; 朝鮮 仁祖 2) 4월,[註878] [이(李)]종(倧)을 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삼았다.[註879]

[천계(天啓)] 5년(A.D.1625; 朝鮮 仁祖 3) 12월, [모(毛)]문룡(文龍)이 이렇게 보고하였다.[註880] “조선(朝鮮)에서 역당(逆黨) 이괄(李适)[註881] 한명련(韓明璉)[註882] 등이 창성(昌成)에서 군사를 일으켜 곧장 왕경(王京)으로 달려들다가 신(臣)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그 역당(逆黨)의 자식인 한윤(韓潤)[註883]· 정매(鄭梅)[註884] 등이 건주(建州)[註885]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좌의부(左議府) 윤의립(尹義(의,毅)立)[註886]이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한 바 있어, 이번 겨울을 기(期)하여 대거(大擧) 조선(朝鮮)을 침범할 것이라 하므로,[註887] 신(臣)은 이미 국왕(國王)에게 방비하여 지키도록 자문(咨文)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철산(鐵山)의 백성들을 잠시 운종도(雲從島)[註888]로 옮기어 땔감을 장만하였습니다.” 등·래순무(登·萊巡撫) 무지망(武之望)[註889]이 이렇게 상주(上奏)하였다.[註890] “모문룡(毛文龍)이 5월부터 수미(須彌)[註891]에서 집을 짓고 있는데, 이른바 운종도(雲從島)가 바로 그 곳입니다. 금년 10월에는 또 다시 군인·민간인·상인들을 이사시켜 살게 하니 철산(鐵山)지방은 비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朝鮮) 전역에서는 그가 침범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심지어는 군대를 풀어 방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진신(鎭臣)이 말하는 이괄(李适) 등의 반란과 윤의립(尹義(의,毅)立)의 내응(內應)을 신(臣) 등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으니 함부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를 믿으면 조선(朝鮮) 사람들의 의심을 더욱 가중시키게 될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뒷날의 걱정거리를 남기는 것이 되어 두렵습니다.”

병부(兵部)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註892]병부언(兵部言) “적국(敵國)을 견제하는 것은 조선(朝鮮)이고, 조선(朝鮮)과 연합하는 것은 모문룡(毛文龍)의 진영이며, 모(毛)의 진영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은 등주(登州)의 순무(巡撫)입니다. 지금 순무(巡撫)와 모(毛)의 진영이 불화하니[註893] 모(毛)의 진영과 조선(朝鮮)이 불화하는 데 이르게 되면 지극히 이롭지 못합니다.”

이에 황제는 모(毛)의 진영과 순무(巡撫)가 마음을 합치도록 타이르고 격려하며, 한윤(韓潤)과 윤의립(尹義(의,毅)立) 등은 조선(朝鮮)으로 하여금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였다.[註894] [이(李)]종(倧)이 또 다시 요동(遼東)의 백성을 철수시켜 중국 땅에 안주시키기를 청하니[註895] 병부(兵部)에서 말하기를,[註896] “요동(遼東) 백성이 떠나고 머무는 것은 [모(毛)]문룡(文龍)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문룡(文龍)이 하루라도 [섬을] 나가지 않으면 요동(遼東) 백성이 하루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朝鮮) 사람은 그들을 몰아 섬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있으나 그들을 몰아 섬을 떠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모(毛)의 진영으로 하여금 요동(遼東) 백성을 모두 섬으로 건너가게 하고, 등주(登州)의 순무(巡撫)에게는 기한을 어기지 말고 조선(朝鮮)으로 양곡을 운송하여 양(量)에 맞추어 구휼(救恤)하여 둔목(屯牧)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옳다고 하였다.[註897]

 

○ [천계(天啓)] 6년(A.D.1626; 朝鮮 仁祖 4) 10월, 종(倧)이 이렇게 상소하였다.[註898]

“황조(皇朝)는 소방(小邦)에 대하여 복주(覆幬)의 은혜를 베풀어 왕기(王畿)나 다름없이 보살피고 있습니다. 잠시 어둡고 어지러운 대를 만나 몰래 적국(敵國)과 내통하였더니,[註899] 황천(皇天)이 진노하여 천명(天命)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신(臣)이 국권(國權)을 서리(署理)할 때부터 감히 쉴 여가를 얻지 못하였으니, 곧 배신(陪臣) 장만(張晩)[註900]을 대장으로 삼고 이괄(李适)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나라에서 제일 가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영변(寧邊)에 가서 주둔케 하였으니, 그것은 오로지 모(毛)진영의 절제(節制)를 받아 연합하여 공격하는 시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괄(适)이 막중한 군대를 손에 넣자 아랫사람으로서 분수에 넘치는 것을[註901] 모르고 드디어 구성부사(龜城府使) [한(韓)]명련(明璉)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곧바로 경성(京城)을 침범하였습니다. [장(張)]만(晩)이 남은 병사를 거두어 그 뒤를 쫒아와 서울의 관군(官軍)과 더불어 안팎에서 협공하니 적(賊)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지만 서쪽 변방의 군량과 병기(兵器) 및 각 군진(軍鎭)에 비축된 기물(器物)들이 이 일로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모(毛)의 진영은 요동(遼東) 전체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에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건너와, 바다의 섬 위에 임시로 주둔하여 요동(遼東) 백성을 불러 모아 전후 수십만이나 되는데, 소방(小邦)에 대해서도 역시 보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 나라에서는 많은 불상사가 일어나 토지는 메마르고 백성은 궁핍합니다. 안으로는 우리의 군수물자(軍需物資)를 공급해야 하고, 밖으로는 식량을 기다리는 모(毛) 진영의 병사를 먹여야 합니다. 곡식의 생산은 한도가 있으므로 지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요동(遼東) 백성들은 굶주림에 못이겨 촌락으로 흩어져 돌아다니며 강한 자는 약탈하고 약한 자는 구걸하니, 소방(小邦)의 군민(軍民)은 이러한 혼란을 감당할 수 없어 고향을 버리고 내지(內地)로 옮겨 다닙니다.[註902] 요동 백성들은 먹을 것을 쫓아 또다시 따라 들어오니, 창성(昌城)· 의주(義州) 이남에서부터 안주(安州)· 숙천(肅川) 이북에는 타국인이 6~7할은 되고, 본국인은 3~4할입니다. 앞서 이러한 형편을 갖추어 상주(上奏)하여 병부(兵部)의 관대한 처분을 이미 받았으니, 어찌 감히 다시 그런 처분을 청하겠습니까?

한윤(韓潤)과 그의 아우 담(潭)[註903]은 역적 명련(明璉)의 자질(子侄)로서 명적(名籍)을 이탈하고 몰래 도망하여 버리더니, 적을 꾀어 내어 노략질하러 왔습니다. 역적들은 이미 나라를 배반하고 갔으므로, 그들에게 제명(制命)을 내릴 권한은 이미 신(臣)에게 있지 않습니다. 윤의립(尹義(의,毅)立)은 판서(判書)를 지낸 적이 있을 뿐 본래부터 의정(議政)은 아니었습니다. 근년에는 모(毛) 진영의 접반관(接伴官)으로 뽑힌 적이 있지만 책임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아니하며, 면직(免職)되어 집으로 돌아갔으니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일도 역시 없습니다. 모(毛) 진영에서는 왕중보(王仲保)[註904] 등의 보고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이 아닙니다. 생각하건대, 이는 반드시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남을 헐뜯는 사람이 있어, 독무(督撫)를 속여 교묘하게 꾸며대는 계략을 행하는 것일 것입니다. 모(毛) 장군은 해외에 오래 주둔하고 있어, 신(臣)과 서로 돌보아 주기 이미 십여년 가깝습니다. 비록 희견(餼牽)이 다 떨어져 가서 서로가 함께 곤란을 당하고 있지만, 정훤(情諠)의 두터움은 진실로 조금도 손상됨이 없습니다. 또 그들이 수미(須彌)로 옮긴 것은 지켜야 할 임무가 점점 무거워짐에 대비하여, 마초(馬草)와 땔감을 장만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한번 나아가고 한번 물러서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잘못 전해진 말과 준답(噂沓)한 행위는 본래부터 개의(介意)할 것이 못됩니다.

삼가 병부(兵部)와 등·래순무(登·萊巡撫)의 이문(移文)· 자문(咨文)을 살펴보니, ‘침범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느니, ‘그 백성을 몰아내면 그 장수도 몰아낸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군대를 풀어 방비하고 있으니 조선과는 사이가 나쁘다’고까지 하는 말이 있는데, 해외의 정황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臣)이 요동(遼東) 백성을 데리고 가기를 요청한 것은 그들을 구제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당초부터 침입을 받을까 염려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臣)은 지금도 모문룡(毛文龍)과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공을 세워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하여 방비하려는 뜻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황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註905] “왕(王)은 동진(東鎭)과 화목 협력하여 중국 조정을 존중하여 받드니, 충성스럽고 곧은 정성이 언사(言辭)의 밖에서도 넘치고 있소. 모(毛) 진영의 군대가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고, 조선인(朝鮮人)과 요동민(遼東民)이 섞여 살고 있어 오래 머무는 객(客)이 주인에게 누를 끼치고 있으며, 생산은 적은데 먹을 사람은 많다는 사실을 왕(王)의 말이 아니었다면, 짐(朕)은 앉아서 만리 밖을 환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모(毛) 진영도 중국 조정에 있어서는 [적(敵)을] 견제해 주는 군대이며, 왕국(王國)에 있어서는 순망치한(唇亡齒寒)의 형세에 놓인 군대이요. 바다 위 섬에 대한 군량 운송은 이미 해당 관서에서 경계를 갈라 정하여 기한에 맞추어 보내 주도록 하였소. 피난 간 변방 백성 역시 모(毛) 장군이 마음을 다해 돌보아 주도록 하고, 다시는 왕(王)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소. 와전(訛傳)된 말은 마음에 둘 것이 못되니 힘을 합쳐 한 마음이 되도록 왕(王)은 노력하기 바라오.”

 

○ [천계(天啓)] 7년(A.D.1627; 朝鮮 仁祖 5) 3월, 병부(兵部)에서 모문룡(毛文龍)의 말을 인용하여 상주(上奏)하기를,[註906]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이 적(敵)을 불러들여 철산(鐵山)을 공격, 우리 군사 1천명을 상해(傷害)하고 조선(朝鮮)의 군대 6만을 죽였으며, 군량 1백여만석을 불살랐습니다. 적(敵)은 결국 진로를 바꾸어 조선(朝鮮)을 공격하였습니다.”[註907] 라고 하니, 황제는 문룡(文龍)에게 속히 기회를 타서 응원하도록 칙명(勅命)을 내렸다.[註908] 등(登)[주(州)]순무(巡撫) 이숭(李嵩)[註909]이,

“조선(朝鮮)의 반역자 한윤(韓潤) 등이 적을 유인하여 안주(安州)로 쳐들어 오니 절도사(節度使) 남이흥(南以興)[註910]은 스스로 분사(焚死)하였고, 중국(中國)의 원병도사(援兵都司) 왕삼계(王三桂)[註911] 등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註912]

라고 상주(上奏)하고, 연이어 이렇게 상주하였다. “의주(義州) 및 곽산(郭山)의 능한산성(凌漢山城)[註913]이 모두 함락하고, 평양(平壤)· 황주(黃州)는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지니 적의 부대는 곧바로 중화(中和)[註914]에 이르게 되었고, 기마유격대(騎馬遊擊隊)[註915]는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를 들락날락하고 있습니다. 또 부대를 나누어 운종도(雲從島)로 향하여 모(毛) 진영을 공격·노략질하였습니다.[註916] 조선 국왕(國王)과 사민(士民)들은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난리를 피하고 있습니다.”[註917] 이 때 대청(大淸)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쉽게 항복하고 조선(朝鮮)의 여러 성(城)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놀라서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에 [청(淸)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이(李)]종(倧)을 설득하니 종(倧)이 화의(和議)를 통보해 오므로 마침내 군대를 철수하였다.[註918] [천계(天啓)] 7년(A.D.1627; 朝鮮 仁祖 5) 9월에 종(倧)이 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상황을 상주(上奏)하였다.[註919] 이 때 희종(熹宗)이 붕(崩)하고, 장렬제(莊烈帝)가 사위(嗣位)하여 면려(勉勵)하도록 [朝鮮에] 간곡한 조칙(詔勅)을 내렸다.

 

○ 숭정(崇禎) 2년(A.D.1629; 朝鮮 仁祖 7) 해마다 두 번씩 조공(朝貢)하던 것을 고쳐 한 번만 조공 하도록 하였다.[註920] 앞서 요동(遼東)으로 통하던 길이 막히자 조공사행(朝貢使行)이 등주(登州)· 내주(萊州) 길을 택한 지 이미 십여년이나 되었다.[註921] 그런데 원숭환(袁崇煥)[註922]이 독사(督師)가 되면서부터 공로(貢路)를 각화(覺華)[註923]로 고쳐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오게 하니 그 나라에서는 여러번 종전대로 해 주기를 청하였다.[註924] 이 때에 이르러 호조판서(戶曹判書) 정두원(鄭斗源)[註925]이 등주(登州)의 해로(海路)로 와서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註926]에게 이문(移文)하여, 그들이 황제에게 주청(奏請)하고자 하는 바를 밝혀 주도록 부탁하였다. 원화(元化)는 관인(官人)을 시켜 함께 [경사(京師)로] 가게 하면서 들은대로 상소(上疏)하였다. 이에 황제는 [각화도(覺華島)로의] 항로(航路)는 이미 내려진 명령인데, 이 길을 고치려는 것은 자기들만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註927] 이 해 6월, 독사(督師) 원숭환(袁崇煥)이 쌍도(雙島)[註928]에서 평요장군(平遼將軍) 좌도독(左都督) 모문룡(毛文龍)을 죽였다.[註929]

 

○ 숭정(崇禎) 6년(A.D.1633; 朝鮮 仁祖 11) 6월, 종(倧)이 총병(總兵) 황룡(黃龍)[註930]에게 서신을 보내어, “문룡(文龍)의 옛 부하 장수이던 공유덕(孔有德)[註931]· 경중명(耿仲明)[註932]이 사졸(士卒) 2만명을 거느리고 청(淸)에 투항 귀순하였소. 그리고 조선(朝鮮)에 대해서는 식량을 요구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유덕(有德) 등이 지난날 피도(皮島)에 있던 것이 우리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고 말하니 [황(黃)]룡(龍)이 그대로 보고하였다.[註933]

 

○ 숭정(崇禎) 10년(A.D.1637; 朝鮮 仁祖 15) 정월,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註934]가 조선(朝鮮)을 친히 정벌하여 그들이 맹약(盟約)을 어기고 명(明)나라를 도운 죄를 책망하니, 여러 성(城)이 모두 무너졌다.[註935] 조선(朝鮮)에서 위급함을 알려 왔으므로 총병(總兵) 진홍범(陳洪範)[註936]에게 각진(各鎭)의 수군(水軍)을 뽑아 가서 돕도록 하였다. 3월에 홍범(洪範)이 관군(官軍)을 이끌고 바다로 출동하였다고 상주(上奏)하였다. 그 며칠 뒤 산동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註937]가 상주(上奏)하기를,

“조선(朝鮮)이 적을 방어하지 못하여 강화(江華)가 먼저 함락되어, 세자(世子)가 붙잡히자 국왕이 나와 항복하였습니다. 지금 함선(艦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피도(皮島)와 철산(鐵山)으로 쳐들어오니, 그 군세(軍勢)가 대단히 강합니다. 급히 심세괴(沈世魁)[註938]·진홍범(陳洪範) 등 두 진신(鎭臣)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피도(皮島)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첫째 과제로 삼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황제는 계조(繼祖)가 서로 협력하여 구원하지 못한 것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조금 뒤 피도(皮島)도 대청(大淸) 군대에게 함락되니, 조선(朝鮮)과는 결국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몇 해 가지 못하여 명(明)나라도 역시 패망하고 말았다.

조선(朝鮮)은 명(明)나라에 대하여 비록 속국(屬國)이라 일컬었으나, 경계 안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공(朝貢)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사품(下賜品)도 풍부하였으나 이루 다 쓸 수 없으므로, 이 열전편(列傳篇)에서는 치란(治亂)에 관계되는 것만 기록하는 데 그쳤다.[註939] 그 나라의 풍토(風土)와 물산(物産)에 관한 것은 전대(前代)의 사서(史書)에 갖추어져 실려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거듭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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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