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원전(原典) 분석- 9(종합 및 결론)

상 상 2015. 6. 5. 16:45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원전(原典) 규명(糾明)- 9(종합 및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종합하여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동명성왕 본기)

출처:

원전(原典)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구삼국사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淥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구삼국사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금와]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위서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구삼국사

고기(古記)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구삼국사

위서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였다.“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사람됨이 용맹스럽습니다. 만약 일찍 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버리십시오!”

구삼국사

고기(古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날랜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가 또 죽이려고 꾀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이것을 눈치채고 [주몽에게] 일렀다.“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위서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淹㴲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淥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구삼국사

단군고기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위서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고기(古記)

위서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고기(古記)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로써 성을 삼았다.

단군고기

고기(古記)

위서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고기(古記)

구삼국사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靺鞨) 부락에 붙어 있어 침략과 도적질의 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 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사냥하며 찾아가서 비류국(沸流國)에 이르렀다.

고기(古記)

그 나라 왕 송양(松讓)이 나와 보고는 말하였다.“과인(寡人)이 바다의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주몽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송양이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 대에 걸쳐서 왕노릇하였다. 땅이 좁아서 두 왕을 용납하기에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의 부하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왕은 그 말을 [듣고] 분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말다툼하고 또 서로 활을 쏘아 재능을 겨루었는데, 송양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2(서기전 36)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구삼국사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고기(古記)

3(서기전 35)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구삼국사

6(서기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10(서기전 28) 가을 9월에 난새[]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14(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고기(古記)

19(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구삼국사

삼국사기(유리명왕 본기)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요.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구삼국사

고기(古記)

 

 

고기(古記):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까지 우리 민족에게 내려오는 옛 기록으로 책 이름(書名)을 알 수 없는 사료,

또는 김부식이 중국의 사료가 아닌 우리 민족의 사료로써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료.

 

결론적으로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 및 유리왕 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삼국사를 인용, 편집한 것인데,

부분적으로 단군고기, 기타 우리 민족에게 내려오는 사료(고기:古記), 위서를 인용, 편집한 것이다.

 

그 구성 비율을 보면 대체로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 53%, 단군고기 3%,

기타 우리 민족에게 내려온 사료(고기:古記) 25%, 위서 19%를 인용, 편집한 것으로 볼 수있다.

 

다시말해서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표에서 말한대로 100% 기존 사료를 추려 재단하는(잘라내는) 방법으로

편찬한 사서이다.

 

동명성왕 본기의 예를들면 우리민족에게 전해 내려온 사료 81%, 중국측 사료 19%를 직접 인용 또는 편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다만 일부분에서 우리민족에게 전해내려온 사료는 버리고 중국측 사료를 채택한 점은 삼국사기의 커다란 오점이다.(사대주의)

 

이런 점을 볼 때 삼국사기가 풍문을 편집하였다는 말은 삼국사기를 모르는데서 온 말이고

심지어 삼국사기가 김부식이 지어낸 창작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는 거짓말이며 사기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의 창작이자 조작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론은 삼국사기에 대한 무지에 바탕을 둔 사기이며,

가당치도 않는 허위 날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