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원전(原典) 분석- 8

상 상 2015. 6. 5. 16:41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원전(原典) 규명(糾明)- 8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의 내용 8유리왕의 어린시절 일화 및 태자책봉 및 왕위계승

사 료

내 용

삼국사기

유리왕 본기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요.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원문]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類利聞之 乃往山谷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으니 / 俶儻有奇節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 元子曰類利

칼을 얻어 부왕의 위를 이었고 / 得劍繼父位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 塞盆止人詈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다.”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 “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하였다. 유리가 울며, “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 “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하였다. 대답하기를,“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가 갈 때 말을 남기기를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였다.”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하고 일어나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俶儻有奇節元子曰類利得劒繼父位塞盆止人詈類利少有奇節云云少以彈雀爲業見一婦戴水盆彈破之其女怒而詈曰無父之兒彈破我盆類利大慙以泥丸彈之塞盆孔如故歸家問母曰我父是誰母以類利年少戱之曰汝無定父類利泣曰人無定父將何面目見人乎遂欲自刎母大驚止之曰前言戱耳汝父是天帝孫河伯甥怨爲扶餘之臣逃往南土始造國家汝往見之乎對曰父爲人君子爲人臣吾雖不才豈不愧乎母曰汝父去時有遺言吾有藏物七嶺七谷石上之松能得此者乃我之子也類利自往山谷搜求不得疲倦而還類利聞堂柱有悲聲其柱乃石上之松木體有七稜類利自解之曰七嶺七谷者七稜也石上松者柱也起而就視之柱上有孔得毀劒一片大喜前漢鴻嘉四年夏四月奔高句麗以劒一片奉之於王王出所有毀劒一片合之血出連爲一劍王謂類利曰汝實我子有何神聖乎類利應聲擧身聳空乘牖中日示其神聖之異王大悅立爲太子

단군고기

(檀君古記)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음.

위서

고구려전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국왕(國王)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朱蒙在夫餘時妻懷孕朱蒙逃後生一子字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主即與母亡而歸之名之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閭達代立閭達死子如栗代立

북사

고구려전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 있을 적에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주몽(朱蒙)이 도망한 후에 아들을 낳으니, [()]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朱蒙)이 국왕(國王)이 된 것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주몽(朱蒙)] 그를 여달(閭達)이라 이름지어 주고, 국사(國事)를 그에게 맡겼다. 주몽(朱蒙)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하였다.

 

其在夫餘妻懷孕朱蒙逃後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為國王即與母亡歸之名曰閭達委之國事朱蒙死子如栗立

 

 

내용 8유리왕의 어린시절 일화 및 태자책봉 및 왕위계승의 비교, 분석.

 

 

1. 삼국사기와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비교

삼국사기(유리명왕 본기)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요.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으니 / 俶儻有奇節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 元子曰類利

칼을 얻어 부왕의 위를 이었고 / 得劍繼父位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 塞盆止人詈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다.”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 “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하였다. 유리가 울며,

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 “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하였다. 대답하기를,“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머니가,“너의 아버지가 갈 때 말을 남기기를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였다.”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하고 일어나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1) 위에서 보다시피 삼국사기 유리왕 본기와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의 내용이 사실상 같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구삼국사의 신화적인 내용은 다 생략하고 그 내용을 간추려 쓴 것이다.(편집)

, 삼국사기 유리왕 본기는 여기있는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의 내용 중 신화적인 내용을 생략하고

약간 간추린 것이다.

 

2. 삼국사기와 위서 및 북사의 비교.

삼국사기(유리명왕 본기)

위서 고구려전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요.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국왕(國王)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북사 고구려전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 있을 적에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주몽(朱蒙)이 도망한 후에 아들을 낳으니, [()]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朱蒙)이 국왕(國王)이 된 것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주몽(朱蒙)] 그를 여달(閭達)이라 이름지어 주고, 국사(國事)를 그에게 맡겼다. 주몽(朱蒙)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하였다.

 

 

1) 여기서 보다시피 삼국사기는 위서 및 북사와 내용이 매우 다르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는 중국측 사료인 위서(북사)를 인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