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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733년), 가돌우가 또 [다시] 와서 약탈하였다. 유주장사 설초옥이 부장 곽영걸·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을 보내 정예 기병 만 명을 거느리고 항복한 해의 무리를 함께 지휘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했다. 군대가 유관(渝關)의 도산 주위에 도달하자 가돌우는 돌궐 병사들을 지휘하여 관군과 대적했다. 해의 무리가 마침내 두 마음[兩端]을 품고 흩어져 달아나 요험[險]에 의지하였다. 관군이 크게 패하자 (오)지의와 (나)수충은 휘하를 거느리고 도망쳐 [돌아]왔으나 (곽)영걸과 (오)극근은 진(陣)에서 죽었고, 그 아래의 6천여 명은 모두 적에게 살해당했다. | 明年,可突于又來抄掠。幽州長史薛楚玉遣副將郭英傑、吳克勤、鄔知義、羅守忠率精騎萬人,并領降奚之眾追擊之。軍至渝關都山之下,可突于領突厥兵以拒官軍。奚眾遂持兩端,散走保險。官軍大敗,知義、守忠率麾下遁歸,英傑、克勤沒于陣,其下六千餘人,盡為賊所殺。 |
조칙을 내려 장수규를 유주장사 겸 어사중승으로 삼아 그들을 경략하게 하였다. 가돌우는 점차 (장)수규에게 압박을 당하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이어 또 [무리의 마음이] 미혹되고 안정되지 않자 무리를 이끌고 점차 서북쪽으로 향해 돌궐로 가려 하였다. (장)수규가 관기(管記) 왕회(王悔) 등을 보내 부락으로 가서 그들을 불러와 타이르고 가르치게 했다. 이 때 거란의 아관인 이과절(李過折)은 가돌우와 함께 병마[에 관한 일]을 나누어 맡았으나 마음이 맞지 않았는데 (왕)회가 은밀히 유인하자 (이)과절은 밤중에 병사를 거느리고 가돌우 및 그의 지당(支黨) 수십 명을 참수했다. | 詔以張守珪為幽州長史兼御史中丞以經略之。可突于漸為守珪所逼,遣使偽降。俄又迴惑不定,引眾漸向西北,將就突厥。守珪遣管記王悔等就部落招諭之。時契丹衙官李過折與可突于分掌兵馬,情不叶,悔潛誘之,過折夜勒兵斬可突于及其支黨數十人。 |
[개원] 23년(735) 정월, [가돌우의] 머리를 동도(東都)에 전했다. 조칙을 내려 (이)과절을 봉해 북평군왕으로 삼고 특진을 제수하고, 검교송막주도독으로 삼고 금의(錦衣) 한 부(副)와 은기(銀器) 열 사(事), 견채(絹綵) 삼천 필(疋)을 하사했다. 그 해, (이)과절은 가돌우의 남은 무리인 니예(泥禮)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여러 아들들도 함께 [살해당했으나] 오로지 한 명의 아들인 날건(剌乾)만이 달아나 안동에 투항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당은 그를] 좌효위장군에 제수했다. | 二十三年正月,傳首東都。詔封過折為北平郡王,授特進,檢校松漠州都督,賜錦衣一副、銀器十事、絹綵三千疋。其年,過折為可突于餘黨泥禮所殺,并其諸子,唯一子剌乾走投安東得免,拜左驍衛將軍。 |
[(당)현종] 천보 10년(751), 안록산은 그[들의] 추장(酋長)이 배반하려 한다고 무고하고 병사를 들어 그들을 토벌할 것을 청했다. 8월, 유주· 운중· 평로 [일대의] 무리 수만 명이 황수(潢水) 남쪽 거란의 본영으로 가서 그들과 전투를 벌였으나 (안)녹산은 크게 패하여 돌아왔고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12년(753)에 이르러, 또 [다시] 항복하고 의탁하였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에] 이르면 항상 한 해 걸러 와서 번국의 예[藩禮]를 행했다. | 天寶十年,安祿山誣其酋長欲叛,請舉兵討之。八月,以幽州、雲中、平盧之眾數萬人,就潢水南契丹衙與之戰,祿山大敗而還,死者數千人。至十二年,又降附。迄于貞元,常間歲來修藩禮。 |
정원(貞元) 4년(788), 해의 무리와 함께 우리(당나라)의 진무(振武)[땅]에 침략해 인축(人畜)을 대거 약탈하고 돌아갔다. 9년(793)과 10년(794), 다시 사자를 보내와 알현하자 대수령(大首領) 회락예하(悔落拽何) 이하 각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돌려 보냈다. 11년(795), 대수령 열소 등 25명이 와서 알현하였다. 이후로 [헌종] 원화· [목종] 장경· [경종] 보력· [문종] 대화· 개성 연간에 이를 때까지 사자를 보내와 조공을 바쳤다. | 貞元四年,與奚眾同寇我振武,大掠人畜而去。九年、十年,復遣使來朝,大首領悔落拽何已下,各授官放還。十一年,大首領熱蘇等二十五人來朝。自後至元和、長慶、寶曆、大和、開成時遣使來朝貢。 |
[무종] 회창 2년(842) 9월, 제(制)를 내려 말하기를, “거란에서 새로 즉위한 왕 굴수에게 운마장군을 제수해 우무위장군원외치동정원을 담당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유주절도사 장중무가 상언(上言)하여 “굴수 등이 전하기를, 거란은 옛부터 회흘(迴紇)의 인장을 사용했는데 지금 [황제께] 간청하여 아뢰기를 거란[國家]의 [새로운] 인장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한다고 하자 [무종이] 이를 허락하고, [인장에] ‘봉국거란지인)’이라는 문구를 새기게 했다. =구당서 거란전 끝= | 會昌二年九月,制:「契丹新立王屈戍,可雲麾將軍,守右武衛將軍員外置同正員。」幽州節度使張仲武上言:「屈戍等云,契丹舊用迴紇印,今懇請聞奏,乞國家賜印。」許之,以「奉國契丹之印」為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