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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에 살았는데, [이 곳은] 선비(鮮卑)의 옛 땅으로 [당의] 경성(京城)에서는 동북으로 5천3백 리 [떨어져] 있다. 동으로는 고려(高麗)와 이웃하였고 서로는 해국(奚國)과 접했고 남으로는 [당의] 영주(營州)에[까지] 도달하고 북으로는 실위(室韋)에 도달했다. 냉형산(冷陘山)은 그 나라의 남쪽에 있었는데 해의 서산(西山)과 서로 [이어져 있어] 산길이 험준하였고 [그 길이 지나는] 지방은 2천 리였다. | 契丹,居潢水之南,黃龍之北,鮮卑之故地,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東與高麗鄰,西與奚國接,南至營州,北至室韋。冷陘山在其國南,與奚西山相崎,地方二千里。 |
[그들은 가축을] 쫓아 사냥하고 왕래하여 거처는 정해진 곳이 없었다. 그[들의] 군장의 성씨[姓]는 대하씨(大賀氏)였다. [그들에게는] 뛰어난 병사[勝兵]가 사만삼천 명 있었는데 나누어 팔부(八部)로 삼았고 만약 징발이 있으면 여러 부락이 모두 모름지기 모일 것을 의논했고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사냥을 할 때는 부[락으로 단위]를 나누었으나 전투를 할 때는 함께 움직였다. 본래 돌궐에 신속하고 해와는 전투하기를 즐겼는데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청산(靑山) 및 선비산(鮮卑山)으로 달아나 의지하였다. | 逐獵往來,居無常處。其君長姓大賀氏。勝兵四萬三千人,分為八部,若有徵發,諸部皆須議合, 不得獨舉。獵則別部,戰則同行。本臣突厥,好與奚鬬,不利則遁保青山及鮮卑山。 |
그들의 풍속에는 죽은 자[를 위해서]는 무덤[塚墓]을 만들지 않았고, 말[이 끄는] 수레로 [시체를 실고] 대산(大山)에 들어가 시체를 나무 위에 놓았으며 또한 상복을 입지[服紀] 않았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자손은 곡을 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 풍속은 돌궐(突厥)과 같았다. | 其俗死者不得作塚墓,以馬駕車送入大山,置之樹上,亦無服紀。子孫死,父母晨夕哭之;父母死,子孫不哭。其餘風俗與突厥同。 |
[당 고조] 무덕 초, [거란은] 자주 [당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무덕] 2년(619)에는 평주에 쳐들어왔다. 6년, 그들의 군장인 돌라가 사자를 보내 명마와 풍초(豐貂)를 바쳤다. [태종] 정관 2년(628), 그들의 지배자인 마회가 그의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 武德初,數抄邊境。二年,入寇平州。六年,其君長咄羅遣使貢名馬豐貂。貞觀二年,其君摩會率其部落來降。 |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이 사자를 보내 양사도(梁師都)와 거란(契丹)을 맞바꿀 것을 청하자 태종(太宗)이 일러 말하기를, “거란(契丹)과 돌궐(突厥)은 본래 다른 무리[別類]로 지금 [거란이] 우리에게 와서 항복했는데 무슨 연고로 그를 찾는단 말인가? (양)사도는 본래 중국사람으로 우리[나라 경내의] 주성(州城)에 웅거하여 도적질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돌궐(突厥)은 아무런 이유없이 그를 받아들였고, 우리의 군대가 가서 토벌하려 하면 곧 와서 구원하였다. 헤아려 보건대 [그는] 오래지 않아 스스로 생포되어 망하게 될 것이고 설령 그를 멸할 수 없다 하더라도 끝내 거란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 突厥頡利遣使請以梁師都易契丹,太宗謂曰:「契丹、突厥,本是別類,今來降我,何故索之?師都本中國人,據我州城,以為盜竊,突厥無故容納之,我師往討,便來救援。計不久自當擒滅,縱其不得,終不以契丹易之。」 |
태종이 고려를 정벌하고 영주에 도달해 마침 그들의 군장 및 노인 등을 만나 물자를 하사했는데 각자에게 차등을 두었고 그들의 번장(蕃長)인 굴가에게 [관직을 제수해] 좌무위장군으로 삼았다. | 太宗伐高麗,至營州,會其君長及老人等,賜物各有差,授其蕃長窟哥為左武衛將軍。 |
[정관] 22년(648), 굴가 등[이 이끄는] 부락이 모두 [당 경내로] 들어와 복속하기를 청하자 곧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굴가를 좌영군장군 겸 송막도독부· 무극현남으로 삼고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다. | 二十二年,窟哥等部咸請內屬,乃置松漠都督府,以窟哥為左領軍將軍兼松漠都督府、無極縣男,賜姓李氏。 |
[고종] 현경 초(656~657), 또 굴가를 좌감문대장군에 제수했다. 그의 증손인 고막리는 측천(則天)의 치세 때 좌위장군 겸 검교탄한주자사를 역임하고 귀순군왕이 되었다. | 顯慶初,又拜窟哥為左監門大將軍。其曾孫祜莫離,則天時歷左衛將軍兼檢校彈汗州刺史,歸順郡王。 |
또 거란에는 다른 부락[別部]의 우두머리인 손오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수(隋)에 출사(出仕)해 금자광록대부가 되었다. 무덕 4년(621), 말갈의 추장인 돌지계와 함께 사자를 보내 와 의탁하니 조칙을 내려 [그들을] 영주성 옆에 안치하고 운휘장군을 제수하고 요주총관의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 又契丹有別部酋帥孫敖曹,初仕隋為金紫光祿大夫。武德四年,與靺鞨酋長突地稽俱遣使內附,詔令於營州城傍安置,授雲麾將軍,行遼州總管。 |
증손인 [손(孫)]만영에 이르면 [측천] 수공(垂拱) 초(685~686), 우옥령위장군· 귀성주자사)에 잇달아 제수하고 영락현공에 봉했다. | 至曾孫萬榮,垂拱初累授右玉鈐衛將軍、歸誠州刺史,封永樂縣公。 |
[측천] 만세통천 연간(696~697), (손)만영이 그의 매서(妹壻)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함께 영주도독 조홰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두 사람이 마침내 병사를 들어 (조)홰를 죽이고 영주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은 곧 굴가의 후손으로 우무위대장군 겸 송막도독[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 萬歲通天中,萬榮與其妹壻松漠都督李盡忠,俱為營州都督趙翽所侵侮,二人遂舉兵殺翽,據營州作亂。盡忠即窟哥之胤,歷位右武衛大將軍兼松漠都督。 |
측천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에 노하여 조칙을 내려 (손)만영의 이름을 고쳐 (손)만참(萬斬)이라 하고 (이)진충은 (이)진멸(盡滅)이라 했다. | 則天怒其叛亂,下詔改萬榮名為萬斬,盡忠為盡滅。 |
(이)진멸은 이어 스스로를 무상가한이라 칭하고 (손)만참(손만영)을 대장으로 삼아 전봉(前鋒)에 서서 땅을 빼앗게 했는데 [그들이]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시켜 십여 일만에 병사가 수만 [명]에 달했고 진격하여 단주(檀州)에 침범했다. | 盡滅尋自稱無上可汗, 以萬斬為大將,前鋒略地,所向皆下,旬日兵至數萬,進逼檀州。 |
조칙을 내려 우금오대장군 장현우· 좌응양위장군 조인사· 사농소경 마인절 등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이들은] (손)만참(손만영)과 서협석곡(西硤石谷)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관군은 패하고 (장)현우와 (마)인절은 함께 적에게 사로잡혔다. | 詔令右金吾大將軍張玄遇、左鷹揚衛將軍曹仁師、司農少卿麻仁節率兵討之。與萬斬戰于西硤石谷,官軍敗績,玄遇、仁節並為賊所虜。 |
또 하관상서 왕효걸· 좌우림장군 소굉휘에게 명하여 병사 7만 [명]을 거느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게 했다. (손)만참(손만영)과 동협석곡(東硤石谷)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왕)효걸은 진영에서 죽었고 (소)굉휘는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 又令夏官尚書王孝傑、左羽林將軍蘇宏暉領兵七萬以繼之。與萬斬戰于東硤石谷,孝傑在陣陷沒,宏暉棄甲而遁。 |
(손)만참(손망영)은 [이] 기세를 타서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유주로 들어가 인리(人吏)를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 萬斬乘勝率其眾入幽州,殺略人吏。 |
청변도대총관· 건안군왕 무유의가 비장(裨將)을 보내 그를 토벌하려 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또 조칙을 내려 좌금오대장군· 하내왕 무의종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 누사덕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사탁충의를 전군총관으로 삼아 병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게 했다. | 清邊道大總管、建安郡王武攸宜遣裨將討之,不能克。又詔左金吾大將軍、河內王武懿宗為大總管,御史大夫婁師德為副大總管,右武衛將軍沙吒忠義為前軍總管,率兵三十萬以討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