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역 문 | 원 문 |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東胡) 의 [한]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여 살았다. | 契丹,本東胡種,其先為匈奴所破,保鮮卑山。 |
조위[魏]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 자사 (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 魏青龍中,部酋比能稍桀驁,為幽州刺史王雄所殺,眾遂微,逃潢水之南,黃龍之北。 |
원위(元魏: 북위)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고려(高麗)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실위(室韋)와 [인접해 있었고], 냉형산(冷陘山)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사냥을 해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君]는 대하씨(大賀氏) 로 승병(勝兵) 4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무리를] 팔부(八部)로 나누어 돌궐(突厥)에 신속하고 사근(俟斤) 이 되었다. | 至元魏,自號曰契丹。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東距高麗,西奚,南營州,北靺鞨、室韋,阻冷陘山以自固。射獵居處無常。其君大賀氏,有勝兵四萬,析八部,臣于突厥,以為俟斤。 |
무릇 [병사를] 징발하여 전쟁을 할 때에는 여러 부락[部]이 모두 모였고, 사냥을 할 때에는 부락[部]이 [그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해(奚)와는 [서로] 불만스럽게 생각해 매번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번번이 선비산(鮮卑山)으로 도망쳐 의지하였다. | 凡調發攻戰,則諸部畢會;獵則部得自行。與奚不平,每鬬不利,輒遁保鮮卑山。 |
[그들의] 풍속은 돌궐(突厥)과 대체로 같았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에 시체를 실고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두었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한 상복[喪]을 입는 기간[喪期]도 없었다. | 風俗與突厥大抵略侔。死不墓,以馬車載尸入山,置於樹顛。子孫死,父母旦夕哭;父母死則否,亦無喪期。 |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연간, 그들의 대추(大酋)인 손오조(孫敖曹)는 말갈의 지배자[長]인 돌지계(突地稽)와 함께 사람을 보내 와 알현했으나 [그들의] 군장(君長) 혹은 소인[小]들은 [당 경내로] 들어와 변경을 약탈하였다. 2년 뒤, 군장이 곧 사자를 보내 명마(名馬)와 풍초(豐貂)를 바쳤다. | 武德中,其大酋孫敖曹與靺鞨長突地稽俱遣人來朝,而君長或小入寇邊。後二年,君長乃遣使者上名馬、豐貂。 |
[태종(太宗)] 정관(貞觀) 2년(628), 마회(摩會)가 와서 항복하였다.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외이(外夷)가 당과 잘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아 곧 양사도(梁師都)와 거란(契丹)을 맞바꿀 것을 청했다. | 貞觀二年,摩會來降。突厥頡利可汗不欲外夷與唐合,乃請以梁師都易契丹。 |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거란과 돌궐은 같은 종류가 아니며 [거란이] 지금 이미 우리에게 항복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들을] 찾으려 하는가? 사도는 당의 편호(編戶)인데도 우리의 주부(州部)를 도적질했고 돌궐은 번번이 [그를] 도왔으니 내가 장차 그를 사로잡을 것이며 의당 [그를] 투항한 자와 맞바꿀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마회가 다시 들어와 알현하니 [그에게] 북과 깃발[鼓纛] 을 하사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정기적인 조공이 있[게 되]었다. 제(帝)가 고려를 정벌할 때 [거란의] 추장(酋長)과 해의 우두머리를 모두 징발해 군대를 따르게 했다. 제가 돌아오다 영주(營州)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지배자[長]인 굴가(窟哥) 및 노인(老人)들을 모두 불러 차등을 두어 증채(繒采)를 하사하고 굴가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으로 삼았다. | 太宗曰:「契丹、突厥不同類,今已降我,尚可索邪?師都,唐編戶,盜我州部,突厥輒為助,我將禽之,誼不可易降者。」明年,摩會復入朝,賜鼓纛,由是有常貢。帝伐高麗,悉發酋長與奚首領從軍。帝還,過營州,盡召其長窟哥及老人,差賜繒采,以窟哥為左武衞將軍。 |
대추(大酋)인 욕흘주(辱紇主) 곡거(曲據)가 또 무리를 거느리고 귀의하니 곧 그의 부락[部][의 땅]을 현주(玄州)라 하고 곡거에게 자사를 제수하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에 예속시켰다. 오래지 않아 굴가(窟哥)가 부락을 들어 내속(內屬)하자 곧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고 굴가를 사지절십주제군사(使持節十州諸軍事)·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삼고 무극남(無極男)에 봉하고 이씨 성을 하사했다. 달해부(達稽部)를 초락주(峭落州)라 하고, 흘편부(紇便部)를 탄한주(彈汗州)라 하고, 독활부(獨活部)를 무봉주(無逢州)라 하고, 분문부(芬問部)를 우릉주(羽陵州)라 하고, 돌편부(突便部)를 일련주(日連州)라 하고, 내해부(芮奚部)를 도하주(徒河州)라 하고, 타근부(墜斤部)를 만단주(萬丹州)라 하고 복부(伏部)를 필려(匹黎)·적산(赤山) 두 개 주[二州]로 하여 모두 송막부에 예속시키고 곧 욕흘주(辱紇主)를 그 곳의 자사로 삼았다. | 大酋辱紇主曲據又率眾歸,即其部為玄州,拜曲據刺史,隸營州都督府。未幾,窟哥舉部內屬,乃置松漠都督府,以窟哥為使持節十州諸軍事、松漠都督,封無極男,賜氏李;以達稽部為峭落州,紇便部為彈汗州,獨活部為無逢州,芬問部為羽陵州,突便部為日連州,芮奚部為徒河州,墜斤部為萬丹州,伏部為匹黎、赤山二州,俱隸松漠府,即以辱紇主為之刺史。 |
굴가(窟哥)가 죽고[나서 그의 무리들이] 해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자 행군총관(行軍總管)인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 등이 송막도독(松漠都督) 아복고(阿卜固)를 사로잡아 동도(東都)에 바쳤다. 굴가에게는 2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고막리(枯莫離)라 불렀고 좌위장군(左衛將軍)·탄한주자사(彈汗州刺史)로 삼았고 귀순군왕(歸順郡王)에 봉했다. [또 한 명은] 진충(盡忠)이라 불렀고 무위대장군(武衛大將軍)·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삼았다. [손]오조에게는 손자가 있었는데 만영(萬榮)이라고 불렀고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로 삼았다. 이즈음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가 교만하고 허욕이 많아 자주 그의 아랫사람들을 업신여기니 진충(盡忠) 등이 모두 원망(怨望)하였다. 만영은 본래 시자(侍子) 로써 입조(入朝)하여 중국의 [지세가] 험난한 지 평탄한 지를 알고 있었고 좌우에서 [그가]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으나 곧 [진충과] 함께 병사를 들어 문홰를 죽이고 영주(營州)에서 도적질을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충은 스스로를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부르며 만영을 장수로 삼고 병사를 내보내 사방을 [공격하고] 약탈하여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항복시켰으나 [그 기간이] 스무 날도 안 되었고 [거느린] 무리가 수 만이었으나 망령되이 십만이라 하였고 숭주(崇州)를 공격해 토격부사(討擊副使) 허흠적(許欽寂)을 사로잡았다. | 窟哥死,與奚連叛,行軍總管阿史德樞賓等執松漠都督阿卜固獻東都。窟哥有二孫:曰枯莫離,為左衞將軍、彈汗州刺史,封歸順郡王;曰盡忠,為武衞大將軍、松漠都督。而敖曹有孫曰萬榮,為歸誠州刺史。於是營州都督趙文翽驕沓,數侵侮其下,盡忠等皆怨望。萬榮本以侍子入朝,知中國險易,挾亂不疑,即共舉兵,殺文翽,盜營州反。盡忠自號無上可汗,以萬榮為將,縱兵四略,所向輒下,不重浹,眾數萬,妄言十萬,攻崇州,執討擊副使許欽寂。 |
무후(武后)가 노하여 조칙을 내려 응양장군(鷹揚將軍) 조인사(曹仁師)·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우무위대장군(右武威大將軍) 이다조(李多祚)·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 등 스물여덟 명의 장수에게 장차 그들을 공격하게 했다. | 武后怒,詔鷹揚將軍曹仁師、金吾大將軍張玄遇、右武威大將軍李多祚、司農少卿麻仁節等二十八將擊之; |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를 유관도 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로 삼고 납언(納言) 요숙(姚璹)을 그의 부장[副]으로 삼았다. 이름를 바꾸어 만영(萬榮)을 만참(萬斬)이라 하고 (이)진충(盡忠)을 진멸(盡滅)이라 했다. | 以梁王武三思為榆關道安撫大使,納言姚璹為之副。更號萬榮曰萬斬,盡忠曰盡滅。 |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황장곡(西硤石黃麞谷)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당의 군대[王師]가 패하여 현우와 인절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진격하여 평주(平州)를 공격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 諸將戰西硤石黃麞谷,王師敗績,玄遇、仁節皆為虜禽。進攻平州,不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