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3, 신당서 거란전-1)

상 상 2015. 3. 27. 17:53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3, 신당서 거란전-1)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당서 거란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219)/ 북적전(거란전)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 卷 二百一十九/ 北狄/ 契丹

번 역 문

원 문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東胡) []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여 살았다.

契丹本東胡種其先為匈奴所破保鮮卑山

조위[]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 자사 (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魏青龍中部酋比能稍桀驁為幽州刺史王雄所殺眾遂微逃潢水之南黃龍之北

원위(元魏: 북위)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고려(高麗)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실위(室韋)[인접해 있었고], 냉형산(冷陘山)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

사냥을 해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는 대하씨(大賀氏) 로 승병(勝兵) 4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무리를] 팔부(八部)로 나누어 돌궐(突厥)에 신속하고 사근(俟斤) 이 되었다.

至元魏自號曰契丹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東距高麗西奚南營州北靺鞨室韋阻冷陘山以自固射獵居處無常其君大賀氏有勝兵四萬析八部臣于突厥以為俟斤

무릇 [병사를] 징발하여 전쟁을 할 때에는 여러 부락[]이 모두 모였고, 사냥을 할 때에는 부락[][그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와는 [서로] 불만스럽게 생각해 매번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번번이 선비산(鮮卑山)으로 도망쳐 의지하였다.

凡調發攻戰則諸部畢會獵則部得自行與奚不平每鬬不利輒遁保鮮卑山

[그들의] 풍속은 돌궐(突厥)과 대체로 같았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에 시체를 실고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두었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한 상복[]을 입는 기간[喪期]도 없었다.

風俗與突厥大抵略侔死不墓以馬車載尸入山置於樹顛子孫死父母旦夕哭父母死則否亦無喪期

[() 고조(高祖)] 무덕(武德) 연간, 그들의 대추(大酋)인 손오조(孫敖曹)는 말갈의 지배자[]인 돌지계(突地稽)와 함께 사람을 보내 와 알현했으나 [그들의] 군장(君長) 혹은 소인[]들은 [당 경내로] 들어와 변경을 약탈하였다. 2년 뒤, 군장이 곧 사자를 보내 명마(名馬)와 풍초(豐貂)를 바쳤다.

武德中其大酋孫敖曹與靺鞨長突地稽俱遣人來朝而君長或小入寇邊後二年君長乃遣使者上名馬豐貂

[태종(太宗)] 정관(貞觀) 2(628), 마회(摩會)가 와서 항복하였다.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은 외이(外夷)가 당과 잘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아 곧 양사도(梁師都)와 거란(契丹)을 맞바꿀 것을 청했다.

貞觀二年摩會來降突厥頡利可汗不欲外夷與唐合乃請以梁師都易契丹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거란과 돌궐은 같은 종류가 아니며 [거란이] 지금 이미 우리에게 항복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들을] 찾으려 하는가? 사도는 당의 편호(編戶)인데도 우리의 주부(州部)를 도적질했고 돌궐은 번번이 [그를] 도왔으니 내가 장차 그를 사로잡을 것이며 의당 [그를] 투항한 자와 맞바꿀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다음 해 마회가 다시 들어와 알현하니 [그에게] 북과 깃발[鼓纛] 을 하사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정기적인 조공이 있[게 되]었다. ()가 고려를 정벌할 때 [거란의] 추장(酋長)과 해의 우두머리를 모두 징발해 군대를 따르게 했다. 제가 돌아오다 영주(營州)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지배자[]인 굴가(窟哥) 및 노인(老人)들을 모두 불러 차등을 두어 증채(繒采)를 하사하고 굴가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으로 삼았다.

太宗曰:「契丹突厥不同類今已降我尚可索邪師都唐編戶盜我州部突厥輒為助我將禽之誼不可易降者。」明年摩會復入朝賜鼓纛由是有常貢帝伐高麗悉發酋長與奚首領從軍帝還過營州盡召其長窟哥及老人差賜繒采以窟哥為左武衞將軍

대추(大酋)인 욕흘주(辱紇主) 곡거(曲據)가 또 무리를 거느리고 귀의하니 곧 그의 부락[][의 땅]을 현주(玄州)라 하고 곡거에게 자사를 제수하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에 예속시켰다. 오래지 않아 굴가(窟哥)가 부락을 들어 내속(內屬)하자 곧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를 설치하고 굴가를 사지절십주제군사(使持節十州諸軍事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삼고 무극남(無極男)에 봉하고 이씨 성을 하사했다. 달해부(達稽部)를 초락주(峭落州)라 하고, 흘편부(紇便部)를 탄한주(彈汗州)라 하고, 독활부(獨活部)를 무봉주(無逢州)라 하고, 분문부(芬問部)를 우릉주(羽陵州)라 하고, 돌편부(突便部)를 일련주(日連州)라 하고, 내해부(芮奚部)를 도하주(徒河州)라 하고, 타근부(墜斤部)를 만단주(萬丹州)라 하고 복부(伏部)를 필려(匹黎적산(赤山) 두 개 주[二州]로 하여 모두 송막부에 예속시키고 곧 욕흘주(辱紇主)를 그 곳의 자사로 삼았다.

大酋辱紇主曲據又率眾歸即其部為玄州拜曲據刺史隸營州都督府未幾窟哥舉部內屬乃置松漠都督府以窟哥為使持節十州諸軍事松漠都督封無極男賜氏李以達稽部為峭落州紇便部為彈汗州獨活部為無逢州芬問部為羽陵州突便部為日連州芮奚部為徒河州墜斤部為萬丹州伏部為匹黎赤山二州俱隸松漠府即以辱紇主為之刺史

굴가(窟哥)가 죽고[나서 그의 무리들이] 해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자 행군총관(行軍總管)인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 등이 송막도독(松漠都督) 아복고(阿卜固)를 사로잡아 동도(東都)에 바쳤다. 굴가에게는 2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고막리(枯莫離)라 불렀고 좌위장군(左衛將軍탄한주자사(彈汗州刺史)로 삼았고 귀순군왕(歸順郡王)에 봉했다. [또 한 명은] 진충(盡忠)이라 불렀고 무위대장군(武衛大將軍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삼았다. []오조에게는 손자가 있었는데 만영(萬榮)이라고 불렀고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로 삼았다. 이즈음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가 교만하고 허욕이 많아 자주 그의 아랫사람들을 업신여기니 진충(盡忠) 등이 모두 원망(怨望)하였다. 만영은 본래 시자(侍子) 로써 입조(入朝)하여 중국의 [지세가] 험난한 지 평탄한 지를 알고 있었고 좌우에서 [그가] 난을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으나 곧 [진충과] 함께 병사를 들어 문홰를 죽이고 영주(營州)에서 도적질을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진충은 스스로를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부르며 만영을 장수로 삼고 병사를 내보내 사방을 [공격하고] 약탈하여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항복시켰으나 [그 기간이] 스무 날도 안 되었고 [거느린] 무리가 수 만이었으나 망령되이 십만이라 하였고 숭주(崇州)를 공격해 토격부사(討擊副使) 허흠적(許欽寂)을 사로잡았다.

窟哥死與奚連叛行軍總管阿史德樞賓等執松漠都督阿卜固獻東都窟哥有二孫曰枯莫離為左衞將軍彈汗州刺史封歸順郡王曰盡忠為武衞大將軍松漠都督而敖曹有孫曰萬榮為歸誠州刺史於是營州都督趙文翽驕沓數侵侮其下盡忠等皆怨望萬榮本以侍子入朝知中國險易挾亂不疑即共舉兵殺文翽盜營州反盡忠自號無上可汗以萬榮為將縱兵四略所向輒下不重浹眾數萬妄言十萬攻崇州執討擊副使許欽寂

무후(武后)가 노하여 조칙을 내려 응양장군(鷹揚將軍) 조인사(曹仁師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우무위대장군(右武威大將軍) 이다조(李多祚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 등 스물여덟 명의 장수에게 장차 그들을 공격하게 했다.

武后怒詔鷹揚將軍曹仁師金吾大將軍張玄遇右武威大將軍李多祚司農少卿麻仁節等二十八將擊之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를 유관도 안무대사(楡關道安撫大使)로 삼고 납언(納言) 요숙(姚璹)을 그의 부장[]으로 삼았다. 이름를 바꾸어 만영(萬榮)을 만참(萬斬)이라 하고 ()진충(盡忠)을 진멸(盡滅)이라 했다.

以梁王武三思為榆關道安撫大使納言姚璹為之副更號萬榮曰萬斬盡忠曰盡滅

여러 장수들이 서협석황장곡(西硤石黃麞谷)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당의 군대[王師]가 패하여 현우와 인절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진격하여 평주(平州)를 공격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諸將戰西硤石黃麞谷王師敗績玄遇仁節皆為虜禽進攻平州不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