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5, 신당서 거란전-3)

상 상 2015. 4. 1. 17:4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5, 신당서 거란전-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당서 거란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219)/ 북적전(거란전)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 卷 二百一十九/ 北狄/ 契丹

번 역 문

원 문

가돌우가 다시 [당에] 왔는데 재상(宰相) 이원굉(李元紘)[그를 대하는 것이] 예를 갖추는 바가 없다고 여기고 불평을 하며 [돌아] 갔다. 장열(張說)이 말하기를, “그는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로 오직 [자신에게] 이로울 때만 [그 쪽으로] 향합니다. 또 바야흐로 나라[의 실권]을 가진데다가 아랫사람들이 의부(依附)하고 있으므로, [우대하는] ()를 빌리지 않는다면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可突于復來不為宰相李元紘所禮鞅鞅去張說曰:「彼獸心者唯利是向且方持國下所附也不假以禮不來矣。」

3년 후,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굴렬(屈烈)을 세워 왕으로 삼고 해의 무리를 위협해 함께 돌궐(突厥)에 항복하자 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도망쳤다.

後三年可突于殺邵固立屈烈為王脅奚眾共降突厥公主走平盧軍

조칙을 내려 유주장사(幽州長史)이자 범양절도사[范陽節度]의 임무를 맡고 있던 조함장(趙含章)에게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 배관(裴寬)과 급사중(給事中) 설품(薛偘)을 보내 장사(壯士)를 대거 모으게 하고 충왕 준(忠王 浚)을 하북도(河北道) 행군원수(行軍元帥)에 제수하고 어사대부 이조은(李朝隱)과 경조윤(京兆尹) 배유선(裵伷先)을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아 정백헌(程伯獻장문엄(張文儼송지체(宋之悌이동몽(李東蒙조만공(趙萬功곽영걸(郭英傑) 등 여덟 명의 총관(總管) [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거란을 공격했다.

詔幽州長史知范陽節度事趙含章擊之遣中書舍人裴寬給事中薛偘大募壯士拜忠王浚河北道行軍元帥以御史大夫李朝隱京兆尹裴伷先副之帥程伯獻張文儼宋之悌李東蒙趙萬功郭英傑等八總管兵擊契丹

이윽고 또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河東道諸軍元帥)를 겸하게 했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신안군왕 의(信安郡王 禕)를 지절하북도행군부원수(持節河北道行軍副元帥)로 삼아 함장과 함께 변방으로 나가 거란[]을 사로잡게 하니 크게 물리쳤다. 가돌우가 도망치자 해의 무리는 항복했고 왕은 두 [개의] 번국[]에서 사로잡은 포로와 수급[俘級]을 여러 묘()에 고했다.

既又以忠王兼河東道諸軍元帥王不行以禮部尚書信安郡王禕持節河北道行軍副元帥與含章出塞捕虜大破之可突于走奚眾降王以二蕃俘級告諸廟

다음 해 가돌우가 변방을 약탈하자 유주장사 설초옥(薛楚玉부총관(副總管) 곽영걸(郭英傑오극근(吳克勤오지의(烏知義나수충(羅守忠)이 만기(萬騎) 및 해를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여 도산(都山) 주변에서 전투를 벌였다.

明年可突于盜邊幽州長史薛楚玉副總管郭英傑吳克勤烏知義羅守忠率萬騎及奚擊之戰都山下

가돌우가 돌궐(突厥) 병사들을 [거느리고] 오자 해가 두려워하며 두 마음[兩端]을 품어 무리가 요해처[]로 도망쳤다. 지의와 수충은 패하고 영걸과 극근은 죽었고 당[] 병사 만 명이 죽었다.

可突于以突厥兵來奚懼持兩端眾走險知義守忠敗英傑克勤死之殺唐兵萬人

()가 장수규(張守珪)를 발탁해 유주장사로 삼아 그들을 경략하게 했다. 수규는 이미 이름난 장수로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신하[가 되기]를 청했으나 점차 서북쪽으로 가서 돌궐(突厥)에 의지했다.

帝擢張守珪為幽州長史經略之守珪既善將可突于恐陽請臣而稍趨西北倚突厥

그의 아관(衙官)인 이과절(李過折)은 가돌우에게 [마음] 속으로 불만이 있었는데 수규가 객()인 왕회(王悔)로 하여금 은밀히 그를 불러들여 병사로써 가돌우를 포위하게 하니 과절이 곧 밤중에 가돌우와 굴렬 및 지당(支黨) 수십 명을 참수하고 자신은 돌아왔다.

其衙官李過折與可突于內不平守珪使客王悔陰邀之以兵圍可突于過折即夜斬可突于屈烈及支黨數十人自歸

()수규가 과절에게 그 부락[]을 다스리게 하고 가돌우 등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동도에 전했다.

守珪使過折統其部函可突于等首傳東都

[당은] 과절을 북평군왕(北平郡王)에 제수하고 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삼았다. 가돌우의 잔당이 과절을 공격해 죽이고 그의 집에 쳐들어갔는데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자건(剌乾)은 안동도호부[安東]로 달아나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에 제수되었다.

拜過折北平郡王為松漠都督可突于殘黨擊殺過折屠其家一子剌乾走安東拜左驍衞將軍

[개원] 25(737), ()수규가 거란(契丹)을 토벌하고[나서] 다시 그들을 물리치니 조칙을 내려 지금부터 전투에서 공이 있으면 반드시 묘()에 아뢰도록 했다.

二十五年守珪討契丹再破之有詔自今戰有功必告廟

[현종] 천보(天寶) 4(745), 거란(契丹)의 대추(大酋)인 이회수(李懷秀)가 항복하자 송막도독(松漠都督)에 제수하고 숭순왕(崇順王)에 봉하고 종실 출신의 여자인 독고씨[獨孤]를 정락공주(靜樂公主)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天寶四載契丹大酋李懷秀降拜松漠都督封崇順王以宗室出女獨孤為靜樂公主妻之

그 해 공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범양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이 그를 토벌하고 물리쳤다.

是歲殺公主叛去范陽節度使安祿山討破之

봉작을 바꾸어 그들의 우두머리인 해락(楷落)을 공인왕(恭仁王)으로 삼고 송막도독(松漠都督)을 이어받게 했다. 녹산은 바야흐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표를 올려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제()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

更封其酋楷落為恭仁王代松漠都督祿山方幸表討契丹以向帝意

유주(幽州운중(雲中평로(平盧하동(河東)[일대의] 병사 십여 만을 징발하고 해를 향도(鄉導)로 삼아 황수(潢水) 남쪽에서 대거 전투를 벌였으나 녹산은 패했고 죽은 자가 수 천이었으며, 이로부터 녹산은 [그들]과 서로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일찍이 [포위]를 풀지 않았는데 그가 반란을 일으킴에 이르러서야 곧 그만두었다.

發幽州雲中平盧河東兵十餘萬以奚為鄉導大戰潢水南祿山敗死者數千自是祿山與相侵掠未嘗解至其反乃已

거란(契丹)은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바친 것이 무려 이십 [차례]였다. 과거에는 범양절도사[范陽節度]를 압해·거란사(押奚·契丹使)로 삼았으나 [숙종(肅宗)] 지덕(至德) [연간] 이후로는 번진(藩鎮)이 제멋대로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힘쓰고 요새[]를 지키기 위해 척후병[斥候]을 두는 일을 더욱 엄격히 하여 변방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해와 거란 역시 쳐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契丹在開元天寶間使朝獻者無慮二十故事以范陽節度為押奚契丹使自至德後藩鎮擅地務自安鄣戍斥候益謹不生事于邊契丹亦鮮入寇

해마다 추호(酋豪) 수십 []을 뽑아 장안(長安)에 들어와 조회에 참석하게 했는데 매번 [그들을] 불러[들여] 볼 때마다 녹봉[]을 사여했고 그들이 휘하에 거느린 수백 []은 모두 유주(幽州)의 관()에 머물게 했다.

歲選酋豪數十入長安朝會每引見賜與有秩其下率數百皆駐館幽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