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역 문 | 원 문 |
가돌우가 다시 [당에] 왔는데 재상(宰相) 이원굉(李元紘)이 [그를 대하는 것이] 예를 갖추는 바가 없다고 여기고 불평을 하며 [돌아] 갔다. 장열(張說)이 말하기를, “그는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로 오직 [자신에게] 이로울 때만 [그 쪽으로] 향합니다. 또 바야흐로 나라[의 실권]을 가진데다가 아랫사람들이 의부(依附)하고 있으므로, [우대하는] 예(禮)를 빌리지 않는다면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可突于復來,不為宰相李元紘所禮,鞅鞅去。張說曰:「彼獸心者,唯利是向。且方持國,下所附也,不假以禮,不來矣。」 |
3년 후, 가돌우가 소고를 죽이고 굴렬(屈烈)을 세워 왕으로 삼고 해의 무리를 위협해 함께 돌궐(突厥)에 항복하자 공주는 평로군(平盧軍)으로 도망쳤다. | 後三年,可突于殺邵固,立屈烈為王,脅奚眾共降突厥,公主走平盧軍。 |
조칙을 내려 유주장사(幽州長史)이자 범양절도사[范陽節度]의 임무를 맡고 있던 조함장(趙含章)에게 그들을 공격하게 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 배관(裴寬)과 급사중(給事中) 설품(薛偘)을 보내 장사(壯士)를 대거 모으게 하고 충왕 준(忠王 浚)을 하북도(河北道) 행군원수(行軍元帥)에 제수하고 어사대부 이조은(李朝隱)과 경조윤(京兆尹) 배유선(裵伷先)을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아 정백헌(程伯獻)·장문엄(張文儼)·송지체(宋之悌)·이동몽(李東蒙)·조만공(趙萬功)·곽영걸(郭英傑) 등 여덟 명의 총관(總管) [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거란을 공격했다. | 詔幽州長史、知范陽節度事趙含章擊之,遣中書舍人裴寬、給事中薛偘大募壯士,拜忠王浚河北道行軍元帥,以御史大夫李朝隱、京兆尹裴伷先副之,帥程伯獻、張文儼、宋之悌、李東蒙、趙萬功、郭英傑等八總管兵擊契丹。 |
이윽고 또 충왕에게 하동도제군원수(河東道諸軍元帥)를 겸하게 했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신안군왕 의(信安郡王 禕)를 지절하북도행군부원수(持節河北道行軍副元帥)로 삼아 함장과 함께 변방으로 나가 거란[虜]을 사로잡게 하니 크게 물리쳤다. 가돌우가 도망치자 해의 무리는 항복했고 왕은 두 [개의] 번국[蕃]에서 사로잡은 포로와 수급[俘級]을 여러 묘(廟)에 고했다. | 既又以忠王兼河東道諸軍元帥,王不行。以禮部尚書信安郡王禕持節河北道行軍副元帥,與含章出塞捕虜,大破之。可突于走,奚眾降,王以二蕃俘級告諸廟。 |
다음 해 가돌우가 변방을 약탈하자 유주장사 설초옥(薛楚玉)·부총관(副總管) 곽영걸(郭英傑)·오극근(吳克勤)·오지의(烏知義)·나수충(羅守忠)이 만기(萬騎) 및 해를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여 도산(都山) 주변에서 전투를 벌였다. | 明年,可突于盜邊,幽州長史薛楚玉、副總管郭英傑、吳克勤、烏知義、羅守忠率萬騎及奚擊之,戰都山下。 |
가돌우가 돌궐(突厥) 병사들을 [거느리고] 오자 해가 두려워하며 두 마음[兩端]을 품어 무리가 요해처[險]로 도망쳤다. 지의와 수충은 패하고 영걸과 극근은 죽었고 당[의] 병사 만 명이 죽었다. | 可突于以突厥兵來,奚懼,持兩端,眾走險;知義、守忠敗,英傑、克勤死之,殺唐兵萬人。 |
제(帝)가 장수규(張守珪)를 발탁해 유주장사로 삼아 그들을 경략하게 했다. 수규는 이미 이름난 장수로 가돌우가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신하[가 되기]를 청했으나 점차 서북쪽으로 가서 돌궐(突厥)에 의지했다. | 帝擢張守珪為幽州長史經略之。守珪既善將,可突于恐,陽請臣而稍趨西北倚突厥。 |
그의 아관(衙官)인 이과절(李過折)은 가돌우에게 [마음] 속으로 불만이 있었는데 수규가 객(客)인 왕회(王悔)로 하여금 은밀히 그를 불러들여 병사로써 가돌우를 포위하게 하니 과절이 곧 밤중에 가돌우와 굴렬 및 지당(支黨) 수십 명을 참수하고 자신은 돌아왔다. | 其衙官李過折與可突于內不平,守珪使客王悔陰邀之,以兵圍可突于,過折即夜斬可突于、屈烈及支黨數十人,自歸。 |
(장)수규가 과절에게 그 부락[部]을 다스리게 하고 가돌우 등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동도에 전했다. | 守珪使過折統其部,函可突于等首傳東都。 |
[당은] 과절을 북평군왕(北平郡王)에 제수하고 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삼았다. 가돌우의 잔당이 과절을 공격해 죽이고 그의 집에 쳐들어갔는데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자건(剌乾)은 안동도호부[安東]로 달아나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에 제수되었다. | 拜過折北平郡王,為松漠都督。可突于殘黨擊殺過折,屠其家,一子剌乾走安東,拜左驍衞將軍。 |
[개원] 25년(737), (장)수규가 거란(契丹)을 토벌하고[나서] 다시 그들을 물리치니 조칙을 내려 지금부터 전투에서 공이 있으면 반드시 묘(廟)에 아뢰도록 했다. | 二十五年,守珪討契丹,再破之,有詔自今戰有功必告廟。 |
[현종] 천보(天寶) 4년(745), 거란(契丹)의 대추(大酋)인 이회수(李懷秀)가 항복하자 송막도독(松漠都督)에 제수하고 숭순왕(崇順王)에 봉하고 종실 출신의 여자인 독고씨[獨孤]를 정락공주(靜樂公主)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 天寶四載,契丹大酋李懷秀降,拜松漠都督,封崇順王,以宗室出女獨孤為靜樂公主妻之。 |
그 해 공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범양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이 그를 토벌하고 물리쳤다. | 是歲,殺公主叛去,范陽節度使安祿山討破之。 |
봉작을 바꾸어 그들의 우두머리인 해락(楷落)을 공인왕(恭仁王)으로 삼고 송막도독(松漠都督)을 이어받게 했다. 녹산은 바야흐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표를 올려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제(帝)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 | 更封其酋楷落為恭仁王,代松漠都督。祿山方幸,表討契丹以向帝意。 |
유주(幽州)·운중(雲中)·평로(平盧)·하동(河東)[일대의] 병사 십여 만을 징발하고 해를 향도(鄉導)로 삼아 황수(潢水) 남쪽에서 대거 전투를 벌였으나 녹산은 패했고 죽은 자가 수 천이었으며, 이로부터 녹산은 [그들]과 서로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일찍이 [포위]를 풀지 않았는데 그가 반란을 일으킴에 이르러서야 곧 그만두었다. | 發幽州、雲中、平盧、河東兵十餘萬,以奚為鄉導,大戰潢水南,祿山敗,死者數千,自是祿山與相侵掠未嘗解,至其反乃已。 |
거란(契丹)은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바친 것이 무려 이십 [차례]였다. 과거에는 범양절도사[范陽節度]를 압해·거란사(押奚·契丹使)로 삼았으나 [숙종(肅宗)] 지덕(至德) [연간] 이후로는 번진(藩鎮)이 제멋대로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힘쓰고 요새[戌]를 지키기 위해 척후병[斥候]을 두는 일을 더욱 엄격히 하여 변방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해와 거란 역시 쳐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 契丹在開元、天寶間,使朝獻者無慮二十。故事,以范陽節度為押奚、契丹使,自至德後,藩鎮擅地務自安,鄣戍斥候益謹,不生事于邊,奚、契丹亦鮮入寇, |
해마다 추호(酋豪) 수십 [명]을 뽑아 장안(長安)에 들어와 조회에 참석하게 했는데 매번 [그들을] 불러[들여] 볼 때마다 녹봉[秩]을 사여했고 그들이 휘하에 거느린 수백 [명]은 모두 유주(幽州)의 관(館)에 머물게 했다. | 歲選酋豪數十入長安朝會,每引見,賜與有秩,其下率數百皆駐館幽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