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4, 신당서 거란전-2)

상 상 2015. 3. 30. 17:1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64, 신당서 거란전-2)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당서 거란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219)/ 북적전(거란전)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 卷 二百一十九/ 北狄/ 契丹

번 역 문

원 문

[군대가] 패했다는 서신[][의 내용]을 듣고 후()는 곧 우무위대장군 건안왕(建安王) 무유의(武攸宜)를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으로 삼아 거란(契丹)을 공격했다. 천하의 인노(人奴) []에 용맹함이 있는 자를 모아 관에서 [그들의 원래] 주인에게 돈을 주고 그들을 산 다음 모두 징발하여 거란[]을 공격했다.

敗書聞后乃以右武衞大將軍建安王武攸宜為清邊道大總管擊契丹募天下人奴有勇者官畀主直悉發以擊虜

()만영이 말에 재갈을 물리고[銜枚] 밤중에 단주(檀州)를 습격하니 청변도부총관 장구절(張九節)이 사사(死士) 수백 명을 모아 [그들을] 침범해 전투를 벌이자 만영이 패하여 산으로 도망갔다.

萬榮銜枚夜襲檀州清邊道副總管張九節募死士數百薄戰萬榮敗而走山

이어 ()진충이 죽자 돌궐(突厥)의 묵철(黙啜)이 그들의 부락을 습격해 물리쳤다. ()만영은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다시 일어나 별장(別將) 낙무정(駱務整)과 하아소(何阿小)에게 기주(冀州)로 들어가 자사(刺史) 육보적(陸寶積)을 죽이고 수천 명을 매질하게 했다.

俄而盡忠死突厥默啜襲破其部萬榮收散兵復振使別將駱務整何阿小入冀州殺刺史陸寶積掠數千人

무후(武后)[]진충(李盡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조칙을 내려 하관상서(夏官尙書) 왕효걸(王孝傑우림위장군(羽林衛將軍) 소굉휘(蘇宏暉)에게 병사 십칠만을 거느리고 거란(契丹)을 토벌하게 하니 동협석(東硤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군사는 패하고 효걸은 죽었다.

武后聞盡忠死更詔夏官尚書王孝傑羽林衞將軍蘇宏暉率兵十七萬討契丹戰東硤石師敗孝傑死之

()만영(萬榮)이 이미 승리를 거두고[나서] 마침내 유주(幽州)로 쳐들어갔다. 유의(攸宜)가 장수를 보내 [그들을] 토벌하여 체포하려 했으나 이길 수 없었다.

萬榮席已勝遂屠幽州攸宜遣將討捕不能克

곧이어 명을 내려 우금오위대장군(右金吾衛大將軍)이자 하내군왕(河內郡王)인 무의종(武懿宗)을 신병도대총관(神兵道大總管)으로 삼고, 우숙정대어사대부(右肅政臺御史大夫) 누사덕(婁師德)을 청변도대통관으로 삼고,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사탁충의(沙吒忠義)를 청변중도전군총관(淸邊中道前軍總管)으로 삼아 무릇 이십만 []을 병사로 [징발해] 적을 공격[하게]했다.

乃命右金吾衞大將軍河內郡王武懿宗為神兵道大總管右肅政臺御史大夫婁師德為清邊道大總管右武威衞大將軍沙吒忠義為清邊中道前軍總管兵凡二十萬擊賊

()만영[의 군대]는 상당히 민첩하여 북을 치며 남쪽[으로 진격해] 영주(瀛州)의 속현(屬縣)들을 멸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거리낌이 없었다.

萬榮銳甚鼓而南殘瀛州屬縣恣肆無所憚

이에 신병도총관 양현기(楊玄基)가 해 [출신]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의 후진[]을 불시에 덮치니 거란은 크게 패하여 하아소를 획득하고 별장(別將) 이해고와 낙무정을 항복시켰으며 [그들의] 장계(仗械)를 거두어들이니 쌓여 있는 것 같았다.

於是神兵道總管楊玄基率奚軍掩其尾契丹大敗獲何阿小降別將李楷固駱務整收仗械如積

()만영은 군수물자를 다 버리고 도주했으나 남아 있던 군대는 다시 모여 해[의 무리]와 싸웠는데 해가 사방에서 공격하자 곧 [전열이] 크게 무너졌고 만영은 멀리 달아났다.

萬榮委軍走殘隊復合與奚搏奚四面攻乃大潰萬榮左馳

장구절이 세 []의 복병(伏兵)에게 그들[의 동태]를 엿보게 했는데 만영은 [처지가] 궁해져 집안의 종[家奴]과 경기병[輕騎]과 함께 노하(潞河) 동쪽으로 도망쳤고 피곤함이 심해지자 수풀 아래에 누웠는데 종[]이 그의 머리를 참했고 구절이 그것을 동도(東都)에 전하자 남은 무리도 궤멸했다. ()유의(攸宜)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돌아오자 후가 기뻐하며 천하에 사면을 행하고 개원하여 신공(神功)이라 했다.

張九節為三伏伺之萬榮窮與家奴輕騎走潞河東憊甚臥林下奴斬其首九節傳之東都餘眾潰攸宜凱而還后喜為赦天下改元為神功

거란(契丹)[다시는] 자립할 수 없어 마침내 돌궐(突厥)에 의탁했다.

契丹不能立遂附突厥

[무후] 구시(久視) 원년(700), 조칙을 내려 좌옥금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와 우무위위장군(右武威衛將軍) 낙무정(駱務整)에게 거란(契丹)을 토벌하게 하여 물리쳤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거란[] [출신의] 뛰어난 장수로 일찍이 변경을 범하고 여러 차례 관군을 괴롭혔던 자들이나 이때에 이르러 공을 세웠다.

久視元年詔左玉鈐衞大將軍李楷固右武威衞將軍駱務整討契丹破之此兩人皆虜善將嘗犯邊數窘官軍者也及是有功

[현종(玄宗)] 개원(開元) 2(714), ()진충(盡忠)의 종제[從父弟]인 도독(都督) 실활(失活)이 묵철(默啜)의 정치가 쇠락하니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힐리발리건철(頡利發伊健啜)과 함께 와서 귀의하자 현종(玄宗)이 단서철권(丹書鐵券) 을 하사했다.

開元二年盡忠從父弟都督失活以默啜政衰率部落與頡利發伊健啜來歸玄宗賜丹書鐵券

2년 후, 해의 지배자[]인 이대포(李大酺)와 함께 오니 조칙을 내려 송막부(松漠府)를 다시 설치하고 실활(失活)을 도독(都督)으로 삼고 송막군왕(松漠郡王)에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을 제수했다. 그리하여 [송막]()에는 정석군(靜析軍)을 두고 실활(失活)을 경략대사(經略大使)로 삼았으며 [그가] 다스리던 팔부(八部)에서는 모두 그 우두머리[]를 발탁해 자사로 삼았다. 조칙을 내려 장군 설태(薛泰)를 압번낙사(押蕃落使)로 삼아 군대를 독려하고 진무(鎭撫)하게 했다. 황제가 동평왕(東平王)의 외손(外孫)인 양원사(楊元嗣)의 딸을 영락공주(永樂公主)로 삼아 실활(失活)에게 시집보냈다.

後二年與奚長李大酺皆來詔復置松漠府以失活為都督封松漠郡王授左金吾衞大將軍仍其府置靜析軍以失活為經略大使所統八部皆擢其酋為刺史詔將軍薛泰為押蕃落使督軍鎮撫帝以東平王外孫楊元嗣女為永樂公主妻失活

다음 해 실활(失活)이 죽자 특진(特進)을 추증하고 제가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그의 동생인 중랑장(中郎將) 파고(婆固)에게 [형의] 봉작[] 및 다스리던 [지역]을 이어받게 했다. 다음 해 파고(婆固)가 공주와 함께 와서 알현하니 연회를 베풀고 하사품을 더해 주었다.

明年失活死贈特進帝遣使弔祠以其弟中郎將娑固襲封及所領明年娑固與公主來朝宴賚有加

가돌우(可突于)라는 자가 있었는데 정석군부사(靜析軍副使)로 날쌔고 용맹하여 무리[의 신망]을 얻게 되자 파고(婆固)가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미처 결정하지 못했다. 가돌우가 도리어 파고를 공격하자 파고는 영주(營州)로 도망쳤다. 도독(都督) 허흠담(許欽澹)이 주의 군사[州甲] 오백 []을 해의 군장(君長)인 이대포의 병사와 합쳐 함께 가돌우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파고와 대포 모두 죽게 되자 흠첨이 두려워하며 군대를 옮겨 유관(楡關)으로 들어갔다.

有可突于者為靜析軍副使悍勇得眾娑固欲去之未決可突于反攻娑固娑固奔營州都督許欽澹以州甲五百合奚君長李大酺兵共攻可突于不勝娑固大酺皆死欽澹懼徙軍入榆關

가돌우가 파고의 종제 울우(鬱于)를 받들어 지배자[]로 삼고 사자를 보내 사죄하자 조칙을 내려 곧 울우를 송막군왕(松漠郡王)에 제수하고 가돌우를 사면했다. 울우가 와서 알현하니 솔경령(率更令)을 제수하고 종실 출신의 여자인 모용씨[慕容]를 연군공주(燕郡公主)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可突于奉娑固從父弟鬱于為君遣使者謝罪有詔即拜鬱于松漠郡王而赦可突于鬱于來朝授率更令以宗室所出女慕容為燕郡公主妻之

가돌우 역시 와서 알현하니 좌우림위장군(左羽林衛將軍)으로 발탁했다. 울우가 죽자 동생 토우(吐于)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가돌우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어 그의 휘하를 안정시킬 수 없자 공주를 데리고 도망쳐 오니 [당은 그를] 요양군왕(遼陽郡王)에 봉하고 숙위(宿衛)에 머무르게 했다. 가돌우가 진충(盡忠)의 동생인 소고(邵固)를 받들고 무리를 다스리자 조칙을 내려 [그가] 왕작[]을 이어받는 것을 허락했다. 천자가 봉선(封禪) 을 떠나자 소고가 여러 번국의 지배자[蕃長]들과 함께 모두 행재(行在)에 따라 갔다.

可突于亦來朝擢左羽林衞將軍鬱于死弟吐于嗣與可突于有隙不能定其下攜公主來奔封遼陽郡王留宿衞可突于奉盡忠弟邵固統眾詔許襲王天子封禪邵固與諸蕃長皆從行在

다음 해, [소고를] 좌우림위대장군(左羽林衛大將軍)에 제수하고 왕[작의 봉지]를 광화군(廣化郡)으로 옮기고 종실 출신의 여자인 진씨[]을 동화공주(東華公主)로 삼아 소고에게 시집보내고 조칙을 내려 그들 부락[]의 추장(酋長) 백 여 명에게 관직을 주고 소고에게는 아들을 시위(侍衛)로 들여보내게 했다.

明年拜左羽林衞大將軍徙王廣化郡以宗室出女陳為東華公主妻邵固詔官其部酋長百餘人邵固以子入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