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12대 중천왕(中川王) 본기- 2

상 상 2011. 12. 20. 18:25

7 년 (AD 254) : 음우(陰友)를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번역문]

7년(254) 여름 4월에 국상 명림어수가 죽자, 비류(沸流) 패자(沛者) 음우(陰友)를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 년 (AD 255) : 약로를 왕태자로 세우고 사면하였다

[번역문]

8년(255)에 왕자 약로(藥盧)를 왕태자로 세우고, 나라 안에 사면하였다.

 

9 년 (AD 256) : 명림홀도(明臨笏覩)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번역문]

9년(256) 겨울 11월에 연나(椽那) 명림홀도(明臨笏覩)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12 년 (AD 259) : 위나라 장수 위지해가 쳐들어 왔다.

번역문]

12년(259) 겨울 12월에 왕은 두눌(杜訥) 골짜기로 사냥 나갔다.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이름이 장릉(長陵)의 이름에 저촉된다.>가 병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정예의 기병[精騎] 5천 명을 뽑아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13 년 (AD 260) :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번역문]

13년(260) 가을 9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15 년 (AD 262) : 기구(箕丘)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번역문]

15년(262) 가을 7월에 왕은 기구(箕丘)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23 년 (AD 270) :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번역문]

23년(270)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중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중천왕이라고 하였다.

==========================================================

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먼저 국상 패자 라는 벼슬이름이 나왔으니 다시한번 고구려의 3정승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먼저 번, 대무신왕 3편에서 정리한 것을 다시 보겠습니다.

원래 이름

신가

팔치

발치

태대신(太大臣), 별명 머리

팔(肱)

다리(股)

한문직역

두신(頭臣)

굉신(肱臣)

고신(股臣)

이두문자 표기

 대로(對盧)  

패자(沛者)

평자(評者)

한문 표기

국상(國相) 혹은 대보(大輔)

 좌보(左輔)

우보(右輔)

 

즉, 국상은 대보이며 이두문으로 표시하면 대로이고 패자는 좌보입니다.(평자=우보).

 

2) 위나라 장수 위지해가 쳐들어와 중천왕(이름 연불)이 정예의 기병[精騎] 5천 명을 뽑아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고 승리합니다.

 

이때에 위나라는 고구려를 쉽게 보고 쳐들어 온 것 같고 중천왕은 동천왕 때의 실수를(적을 깔보는 일-경적필패輕敵必敗) 하지 않고

제대로 적을 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정예기병 5천으로 8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장소도 동천왕이 이긴 양맥의 골짜기입니다.(동천왕은 5천으로 4천명을 치다가 대패했음-기록에 의하면)

 

3) 중천왕도 졸본에 갑니다.(평양에서)

졸본은 고구려 최초의 서울이며 시조, 동명성왕의 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임금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은 동천왕(11대 왕) 2년 조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4) 고구려 역대왕의 왕호와 이름을 다시한번 되새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조 동명성왕(추모, 주몽)

② 2대 유리명왕(유리)

③ 3대 대무신왕(무휼)

④ 4대 민중왕(해색주)

⑤ 5대 모본왕(해우 또는 해애루)

⑥ 6대 태조대왕(궁, 어릴 때 이름은 어수)

⑦ 7대 차대왕(수성)

⑧ 8대 신대왕(백고)

⑨ 9대 고국천왕(남무)

⑩ 10대 산상왕(연우)

⑪ 11대 동천왕(우위거, 어릴 때 이름은 교체)

⑫ 12대 중천왕(연불)

 

5)‘중천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중천왕이라고 하였다.’고 하는 장사 지낸 곳의 이름으로 왕호로 삼는 고구려의 풍습은

여기에서도 계속됩니다.

이러한 풍습은 제 4대 민중왕 때부터 시작되어, 5대 모본왕, 9대 고국천왕에 이어 12대 중천왕이 네 번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