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35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년~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년~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년~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년~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1
이제 두 번째 의문과 그에 대한 답을 알아보자.
신당서 동이열전을 보면, 『상원2년(675년)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그들(신라 군사)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오랑캐(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김)법민(문무왕)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신라에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로 (김)법민(문무왕)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라고 되어있다. 이 뒤로는 중국정사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기록이 없어졌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이 끝난 것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675년 2월 당나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이 사죄하고 공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와서 용서를 빌어서 당이 용서하였고, 그래서 문무왕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신라는 살아남았는가?, 즉, 신라는 당나라의 하해와 같은 은혜 때문에 살아남았는가? 중국 정사를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도 이제 충분한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간단한 답은 “사실이 아니다”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이고 가소로운 거짓말이며 사기이다.
그러면 사실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이때까지의 신라와 당의 상황을 보면,
668년 12월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룰 설치하지만 그 다음 해인 669년에 고구려 유민이 신라로 망명하고 670년에는 드디어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 신라군과 연합하여 압록강 이북에서 당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당은 고구려 지역으로 군사를 출동시킨다. 그때 서쪽에서 토번이 당을 공격하자 당이 10만 대군을 출동시킴으로써 당은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서 당이 대패하자 당은 서쪽을 포기하고 동쪽에서만 전쟁을 벌린다. 671년부터 675년까지 무려 5년 동안이나 동쪽에만 군사력을 집중시켜 전쟁을 벌렸는데도 결과는 고구려 부흥군이 합세한 신라의 대승이었다.
즉, 675년 9월 신라는 바다를 통해 침입한 설인귀를 쳐부수고 이어서 매초성에 있던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북진하여 칠중성까지 되찾는다. 다시 칠중성과 그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신라가 18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한다. 당이 무려 5년 동안이나 동쪽에만 국력을 집중했는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676년 2월 신라가 전년도에 평양과 가까운 곳까지 되찾자 당은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 이북 옛 요동성으로 요동도호부를 옯긴다. 영향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신라의 대승은 토번의 당나라 공격을 불러왔다. 이로써 당나라는 또다시 끔찍한 동서 양쪽에서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676년 3월 서쪽에서는 토번을 공격하고. 7월에는 동쪽에서 신라의 도림성을 공격하였는데, 8월에 다시 서쪽에서는 토번이 당을 공격하고, 11월에는 다시 동쪽으로 설인귀를 내세워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신라와 싸우는 등의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벌렸다. 하지만 결과는 신라가 기벌포에서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함으로써 당은 또다시 동쪽에서 큰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렇게 2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신라가 당에 대승을 거두어 또다시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먼저, 677년 2월 동쪽에서 안동도호부를 또다시 신성으로 옮기며 보장왕을 조선군왕에 봉하여,고구려 사람들을 다스리게 한다. 즉 당은 동쪽에서 손을 떼게 된다. 다시말해서 고구려 지역에서 직접지배를 못하게 되고 간접지배(기미정책)를 하게 되며 신라에 대해서 다시는 공격을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당이 서쪽에만 군사력을 집중하게 된다. 이래서 677년 2월 이후에 신라와 당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다시말해서 675년 2월에 당의 승리 이후에도 나당전쟁은 계속되었고, 675년 9월 신라는 설인귀와 매초성에 있던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북진하여 또 이기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 다음에도 676년 11월에 신라가 기벌포에서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함으로써 또한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2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신라가 당에 대승을 거두자 당은 손을 들게 된 것이다.
보다 넓게 말해서 당나라가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어져서 나당전쟁이 끝난 것이며 동쪽에서 국경선(안동도호부)를 후퇴시키며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지만 신라가 두 번씩이나 나당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자 동쪽에서는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서, 나당전쟁이 끝난 것이고 서쪽에만 군사력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동쪽을 포기한 결과 나당전쟁에서 손을 들어서 나당전쟁이 끝난 것이다
이와같이 신당서 동이열전은 나당전쟁의 진정한 종결 원인을 기재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패전하였기 때문에 일부러 그러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춘추필법) (이것이 중국인들이 역사에서 거짓말을 하는 한가지 수법이다.) 그래서 신당서 동이열전만 본 사람들은 나당전쟁의 진정한 종전(終戰) 원인을 모르게 되었다.
나당전쟁의 진짜 종전(終戰) 원인은 두 번에 걸친 신라의 결정적인 승리인데 신당서 동이열전만 본 사람들은 완전히 거꾸로 당나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무왕이 사죄하고 공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와서 용서를 빌어서 당이 용서하였고, 그래서 문무왕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신라는 살아남은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신당서 동이열전만 본 사람들은 676년 2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는 중국 정사의 기록에 대해 그 이유를 모르게 되었고, 677년 2월 동쪽에서 안동도호부를 또다시 신성으로 옮기며 보장왕을 조선군왕에 봉하여 안동부로 돌려보내,고구려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신구당서 동이전의 기록에 대해 그 진정한 원인을 모르게 되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구당서 고종본기, 신구당서 동이전만을 본 자들은 나당전쟁이 마치 당의 하해와 같은 은혜 때문에 끝난 줄 알고 그런 무지한 주장을 하는 것이며 그런 무식으로 인한 사기를 치는 것이다.
결국 나당전쟁의 결말은 신라가 승전국으로 당나라가 패전국으로 결말이 난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우리역사는 식민지 사관의 개들이 말한 바와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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