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8

상 상 2014. 9. 29. 17:11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8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1)

 

668

12월 고구려가 몰락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로 하여금 지키게 하자

 

669

2월 고구려의 안승이 4천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한다.

 

670

1월과 3월에 동쪽에서는 백제의 땅을 가지고 신라와 당이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고, 고구려의 땅을 둘러싸고는 신라 및 고구려 부흥군의 연합군과 당이 압록강 너머에서 군사력이 대치하다가

4월에 연합군(신라군 및 고구려 부흥군)이 당나라 군사와 싸워 승리하나 당군이 계속 도착하자 연합군이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킨다. 여기에 검모잠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세우며 본격적인 고구려 재건에 나서자 당은 고간과 이근행을 동주도 행군총관과 연산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고구려 지역으로 군사를 출동시킨다.

 

이때 서쪽에서는 토번이 백주 등 18()를 함락시키고우전(于闐)과 무리를 합쳐 구자의 발환성을 함락시키니 안서 4진이 없어졌다. 이에 당은 평양에 있던 설인귀를 불러 라사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출동시켰으나 대비천에서 대패한다.

이에 당은 서쪽 전선을 포기하고 동쪽에만 군사력을 집중시켜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한다.

 

671

6월 신라는 당나라 군사와 백제 지역인 석성(石城)에서 싸워 53백 명을 목베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다.

한편, 전년도(670) 4월에 당을 출발한 고간의 군대는 7월에 안시성을 거쳐 9월에 평양에 도착한다.

 

672

7, 고간과 이근행은 다시 4만의 군사를 보충한 다음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 8월부터 당군이 군사를 진격시켜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연합군과 일전일퇴를 시작하고 12월에는 고구려 지역에서 남아있던 고구려의 부흥군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격파한다. 이때 신라는 군사를 보내 고구려 부흥군을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격퇴하여 2천명이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해 겨울에 고간이 신라 군사와 횡수에서 싸웠으나 대패한다.

 

673

5월 혼자 남은 이근행은 고구려의 부흥운동군을 호로하 서쪽에서 깨뜨리니고구려 평양에 남았던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로 달아나 들어간다.

 

9월에는 당의 군사가 말갈·거란 군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왔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 신라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베었고 당의 군사 중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고, 거란·말갈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을 공격하여 멸한다. 아직도 고구려 부흥군의 활약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674

정월, 이렇게 문무왕이 고구려의 부흥군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애고. 왕의 동생 김인문이 당의 서울(장안)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필, 이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온다.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여 아주 결판을 낼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문무왕도

8월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고 9월에는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여 연합군을 형성하며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들어간다.

드디어

 

675

2월 신라군과 유인궤는 칠중성에서 싸워 유인궤가 승리하나 당으로 돌아가고 이근행이 뒤를 이어 매초성까지 진출하였으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다.

 

9월에 당은 다시 설인귀를 내세워 길압잡이를 이용하여 바다를 통해 쳐들어왔으나 패배한다. 이러한 기세를 타고 신라는 매초성에 있던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칠중성까지 되찾는다. 다시 칠중성과 그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신라가 18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승리한다. 이러한 신라의 대승은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676

우선 2월에 당은 평양을 포기하고 안동도호부를 압록강 너머 옛 요동성으로 옮긴다.

3월에는 671년부터 675년까지 5년동안이나 잠잠하던 토번으로 하여금 당나라의 선주곽주하주방주 등 4개 주()를 침략하게 한다.

 

신라의 대승이 토번에게 전해졌는 모양이고, 이로써 토번은 당을 다시한번 깔보게 되고

이에따라 토번이 다시 당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던 모양이다.

이로써 당나라는 또다시 끔찍한 동서 양쪽에서의 전쟁을 치루게 된다.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하다가 서쪽에서 패하니 동쪽에서만 힘을 집중하여 전쟁을 하였는데도 동쪽에서 대패하니 또다시 원하지 않던 동서 양쪽에서의 정쟁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어쩔수 없이 그 달(3)에 주왕 이현과 상왕 이륜을 행군원수로 삼고유심례와 계필하력 등을 딸려 보내 토번을 토벌하게 하였지만 두 왕은 결국 가지 않는다. 두려움이 전쟁터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동쪽으로는 7월에 신라의 도림성을 공격하고

디시 서쪽에서는 8월에 토번이 첩주(疊州)를 공격하는데

다시 동쪽으로 11월에 설인귀를 내세워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신라와 싸우다가 결국 신라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당은 또다시 동쪽에서 큰 패배를 맛보고 곤경에 빠진다.

이렇게 2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신라가 당에 대승을 거둔 것은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한다.

 

먼저, 당은 동쪽에서 손을 떼게 된다.

, 고구려 지역과 백제지역에서는 직접지배를 못하게 되고 간접지배(기미정책)를 시도하게 되며 신라에 대해서 다시는 공격을 못하게 된다.

동쪽을 포기하고 달래는(기미정책) 대신 이번에는 서쪽에만 군사력을 집중하게 된다.

동쪽과 서쪽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