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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보장왕)이 영순 초(682년)에 죽으니, 위위경을 추증하여 힐리(가한)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성(城)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遺民)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고장이 영순 초(682년)에 졸하자 위위경에 추증하였다. 조서를 내려 서울(장안)로 운구케 하여 힐리의 묘 좌측에 장지를 하사하고, 비(碑)도 세워 주었다.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
12월,돌궐의 나머지 무리 아사나 골독록 등이 잔여 무리를 불러모아,흑사성을 근거지로 삼고,병주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영순(永淳) 원년(682)에 (돌궐의) [아사나]골돌록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 [아사나]골돌록은 힐리[가한]의 친척으로 운중도독 사리원영(舍利元英) [휘하] 부락의 추장으로 대대로 토둔(吐屯)을 세습했다. [아사나]복념이 패하자 바로 도망해 흩어진 [부락 백성을] 불러 모아 총재산(總材山)에 숨어서 다시 흑사성을 수리했는데, 백성이 5천 명으로 9성(九姓: 철륵 9성의 준말) 의 가축과 말을 도둑질하여 점차 강하고 커지게 되자 바로 스스로 즉위해 가한이 되었고, 동생 묵철(黙啜)을 살(殺), [다른 동생] 돌실복을 엽호(葉護)로 삼았다. 이 때 선우[도호]부 항호 부락을 검교(檢校) 하던 아사덕원진이 장사 왕본립에게 잡혀 있었다. 마침 [아사나]골돌록이 와서 노략질을 하자 [아사덕]원진이 여러 부락이 돌아가도록 설득함으로써 죄를 대신하겠다고 청하니 [왕본립이] 허락했다. [그런데 아사덕원진은] 가서 [아사나]골돌록에게 항복하고 그와 함께 모의해 마침내 아파달간이 되어 모든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도호부]의 북부를 노략질하고 마침내 병주까지 공격해 남주자사 왕덕무를 죽이고, [군대를] 나누어 정주를 약탈하자 북평자사 곽왕원이 타격해 물러나게 했다. 또 규주(嬀州)를 공격해 선우도호부를 포위하고 사마 장행사를 죽였으며 울주를 공격해 자사 이사검을 죽이고 풍주도독 최지변을 사로잡았다. [무측천이]조칙을 내려 우무위[위]장군 정무정을 선우도안무대사로 삼아 변경을 수비하게 했다.<신당서 돌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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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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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2년 2월 경오일,돌궐이 정주(定州)와 규주 지경을 침구하였다. 기묘일,좌령군위대장군 설인귀가 죽었다.(구당서 고종본기)
(홍도원년) 2월 경오일,돌궐이 정주를 침구하여,자사 곽왕 (이)원궤가 패배시켰다.(신당서 고종본기)
영순2년(683년),돌궐의 아사나 골돌록이 다시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골돌록이라는 자는,힐리(가한)의 먼 친속으로,역시 성이 아사나씨였다. 그 할아버지는 본시 선우 운중도독 사리원영 휘하의 수령이었으며,토둔철(관직명)을 세습하였다. 복념이 이미 파멸하자,골돌록이 망해 흩어진 무리를을 한곳에 모아,총재산에 들어가,무리가 떼도둑이 되었는데,무리가 5천여명 있었다. 또 아홉개 성(姓)을 폭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으니,얻은 양과 말이 매우 많아져,점차 강성하게 되자,이에 스스로 가한에 즉위하였으며. 그 동생 묵철을 살로 삼고,돌실복을 엽호로 삼았다. 이때 ‘아사덕 원진’이란 자가 선우(도호부)에서 항호(降戶) 부락을 임시로 맡고 있었고, 일찍이 한 사건에 연루되어 선우(도호부의) 장사(長史)인 왕본립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때 (아사나)골돌록이 침입해 약탈함에 (아사덕)원진이 옛 부락을 맡기를 청하자 (왕)본립이 허락했으나 바로 (아사나)골돌록에게 투항해버렸다. (아사나)골돌록이 (그를) 얻자 아주 기뻐하며 아파달간으로 삼아 병마(兵馬)의 사무를 전적으로 맡게 했다.
(아사나골돌록이) 울주로 나아가 약탈하자 풍주도독 최지변이 이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구당서 돌궐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