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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21년(681) 봄 정월 초하루 사찬 무선(武仙)이 정예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비열홀을 지켰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영륭) 2년 봄 정월,돌궐이 원주와 경주 등의 주(州)를 침구하였다. 계사일,예부상서 배행검을 정양도 대총관으로 삼고 파견하여,군사를 거느리고 돌궐의 온부 부락을 토벌하도록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개요원년) 정월 을해일,돌궐이 원주와 경주의 2개 주(州)를 침구하였다. 계사일,배행검을 정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정벌 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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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병술일,정양도 총관 조회순이 돌궐의 사복념과 횡수에서 싸웠으나,관군(당나라군))이 대패하였다. (조)회순을 죽이지 않고,영남으로 유배 보냈다.(구당서 고종본기)
5월 병술일,정양도부총관 조회순이 돌궐과 횡수에서 싸워,패배하였다. 기축일,흑치상지가 토번과 양비천에서 싸워,패배시켰다.(신당서 고종본기)
이듬해(681)에 [돌궐이] 마침내 원[주](原州)과 경[주](慶州: 지금 감숙성 경양현) 두 주를 약탈하자 [황제가] 다시 조칙을 내려 [배]행검을 대총관으로, 우무위[위]장군 조회순, 유주도독 이문간을 부[총관]으로 삼으라고 했다. 첩자가 [아사나]복념과 [아사덕]온부가 흑사[성]에 있는데 기근이 심해 경장 기병만으로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속여 말했다. [조]회순만이 [이 말을] 믿고 경장한 군사를 이끌고 빠른 길로 흑사[성]에 갔으나 돌궐을 보지 못하고 설연타의 남은 부락만을 잡아 항복시켰을 뿐이었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장성 인근에 왔다가 [아사덕]온부를 만나 싸웠는데 서로 죽인 것이 비슷했다. [배]행검이 군대를 대[주]의 경구(陘口)에 주둔시키고 [돌궐 내부를] 이간하는 계책을 썼기 때문에 [아사나]복념과 [아사덕]온부가 서로 틈이 생기자 [아사덕온부가] 군대를 보내 [아사나]복념을 공격해 패배시켰다. [아사나]복념이 도망하다가 [조]회순과 만나 또 싸움을 하루 동안 벌였는데, [조회순은 아사나]복념에게 [끝내] 패배해 군대를 버리고 운중으로 도망갔다. 돌궐에게 쫓겨 죽은 병사들이 셀 수 없었는데, 모두의 머리가 남쪽으로 엎드려 있었다. [조]회순은 희생 재물을 잡아 [아사나]복념과 결맹을 하고서야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신당서 돌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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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21년(681) 가을 7월 1일에 (문무)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
윤7월 이달에,배행검이 돌궐의 사복념 무리를 대파하고,(사)복념은 정무정이 급히 추격하니,마침내 (사복념이) 온부를 잡아 투항하였으며,(배)행검이 이에 돌궐의 나머지 무리를 전부 평정하였다. (배)행검이 (사)복념과 온부를 잡아군대를 거두어 개선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윤7월 경신일,배행검이 돌궐과 싸워,패배시켰다.(신당서 고종본기)
☞(위 신당서 돌궐전에 이어지는 기사)
[아사나]복념이 거듭 패하자 군수 물자와 처자를 금아산에 두고, 경장 기병을 거느리고 [조]회순을 공격했는데, 마침 [배]행검이 부장을 보내 [돌궐의] 군수 물자를 빼앗아 바로 돌아오자 돌아갈 곳이 없게 되어 [아사나복념이] 바로 북쪽의 세사(細沙)로 도망가 숨었다. [배]행검이 선우도호부의 병사들에게 추격을 명령했는데, [아사나]복념이 당나라 군대가 멀리까지 오지 못할 것이라고 방비를 갖추지 않았다가 군대가 오자 놀라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국 사자를 샛길로 보내 [배]행검에게 와서 [아사덕]온부를 잡아 항복하니, [배]행검이 [아사나복념을] 사로잡아 경사로 보내서 동시(東市) 에서 목을 벴다.<신당서 돌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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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보장)왕은 요동에 이르러 배반할 것을 꾀하여 몰래 말갈과 통했으므로, [황제가] 개요(開耀) 원년(681)에 공주(邛州)로 소환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
(개요원년) 겨울 10월 을축일,영륭2년을 개요원년으로 고쳤다.
병인일,아사나 복념과 온부 등 54명을 도회지 시장에서 참수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