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3

상 상 2014. 9. 17. 17:37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3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5)

고구려 신라(동쪽)

토번 돌궐(서쪽 및 북쪽)

677

의봉(儀鳳) 2년 정축년(677) 2월에 [황제가] 항복한 왕(보장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어 나머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였는데, 동쪽나라 사람으로서 먼저 여러 주에 와 있던 자들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 부흥운동>

 

(의봉)22월 정사일공부상서 고장(보장왕)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조선군왕에 봉하여안동부로 돌려보내고구려의 나머지 무리를 편안하게 하고사농경 부여륭에게 웅진주도독을 제수하고대방군왕에 봉하여가서 백제의 나머지 무리를 편안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또다시(거듭)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구당서 고종본기)

 

의봉 2(.677) 고장(보장왕)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고장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들은 하남과 농우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의봉 연간(676678) ()고종은 고장에게 개부의동삼사 요동제독을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서 살며 본번(本蕃)을 진무하는 군주()로 삼았다. 고장은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소환하여 공주로 유배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편>

 

 

(의봉)25토번이 부주(扶州)를 침구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12월 을묘일칙명으로 관내와 하동의 모든 주()에서 용감한 자를 불러모아토번을 토벌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12월 을묘일관내와 하동의 용사를 모집하여토번을 토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이해에서돌궐과 토번이 안서를 침구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678

 

(의봉)3년 정월 병자일이경현을 조하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토번을 정벌하였다. 계미일사신을 보내 하남과 하북의 용감한 병사를 모집하여토번을 정벌 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의봉 3(678) 또 중서령 이경현에게 명하여 선주도독을 겸하게 하고, 가서 ()인궤를 대신하여 조하(洮河)에서 진을 치고 지키게 하였다. 이윽고 관내(關內), 하동 및 여러 주()에서 용맹한 자들을 소집하여 맹사(猛士)로 삼았으니, 이전에 어떠한 역()에 종사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일찍이 문무 관리를 역임한 자는 황제가 궁궐에서 연회를 베풀고, 가서 토번을 격퇴하게 했다. 또한 익주장사 이효일, 휴주도독 척왕 ()봉 등에 명하여 검남, 산남에서 병사를 모아 토번을 격퇴하게 했다.<구당서 토번전>

 

토번이 서돌궐과 연합하여 안서(安西:안서도호부)를 공격하니 중서령 이경현을 다시 조하도행군대총관· 서하진무대사· 선주도독으로 삼고 ()인궤를 대신하게 했다. 조서를 내려 용맹한 병사를 모았는데 평시 징집에서 제외되었던 중죄인도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황제가 친히 배웅했다.

또한 명령을 내려 익주장사 이효일과 휴주도독 척왕(拓王) ()()에게 검남과 산남의 병사를 보태주었다.<신당서 토번전>

 

9월 병인일이경현과 유심례가 토번과 청해에서 싸웠는데패하여()심례가 죽었다.

(신당서 고종본기)

 

위 구당서 토번전, (의봉3년 또 중서령...격퇴하게 했다)에 이어지는 부분(기사).

그해(678) 가을, ()경현이 공부상서 유심례와 군대를 이끌고, 토번과 청해에서 싸웠으나, 관군(당나라군)이 크게 패하고 ()심례는 적진에서 전사하니, ()경현은 군사를 멈추고 감히 구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수습하여 철병하다가 승풍령에 잠시 머물렀는데, 진흙 구덩이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니, 적병은 높은 언덕에 머무르며 압박해 왔다. 편장좌령군원외장군 흑치상지가 결사대 5백여 명을 이끌고 적의 군영을 야습하니, 적진에 혼란이 일어 서로 짓밟다가 3백여 명이 죽었다. ()경현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선주(鄯州)에 이르렀으나, 죄를 물어 형주자사로 삼았다. 이전에 검남에서 병사를 모아 무주(茂州: 사천성 무현 일대)의 서남쪽에 안융성을 쌓고 적의 경계를 압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강(生羌)이 토번의 길잡이가 되어 그 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병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지켰다. 당시 토번은 양동(羊同), 당항 및 여러 강족의 땅을 모두 점령했으니, 동쪽으로는 양주(涼州), 송주, 무주, 휴주 등지와 서로 접했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 인도)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또한 구자 소륵 등 (안서) 4개의 진()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돌궐과 맞닿아, 땅이 만여 리에 이르니, (), () 이래 서융(西戎)의 번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고종이 ()심례 등이 패하여 적진에서 전사하였음을 듣고, 시신(侍臣)을 불러 토번을 진압할 대책을 물었는데, 중서사인 곽정일이 말하기를, “토번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헛되이 병사와 군마(軍馬)만 수고스럽게 하고 식량만 낭비하였으니, 깊숙이 토벌해 들어가지 않는다면 군대의 위엄만 손상시킬 뿐이고, 깊숙이 들어가도 소굴을 모두 소탕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병력 동원을 줄이시고 점차 군대를 보내 변경의 방어에 힘쓰되 봉화대를 정돈한다면 토번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라의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민심을 화합하기를 수년간 지속한다면,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급사중 유제현, 황보문량 등은 모두 엄히 지킴이 편하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흑치상지가 토번 대장 찬파 및 소화귀를 양비천(良非川)에서 격파하고, 2천여 급을 죽여 얻으니, 토번은 드디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황제는 조()를 내려 (흑지)상지를 하원군사로 삼아 진수하도록 하였다. <구당서 토번전>

 

위 신당서 토번전, (토번이...보태주었다)에 이어지는 부분(기사).

양군이 먼저 용지(龍支: 청해성 서녕 동남)에서 싸웠는데 토번이 패했다. ()경현(敬玄)이 유심례를 거느리고 토번을 청해 주변에서 공격했는데 ()심례가 전사했다. ()경현이 승풍령(承風嶺: 청해성 화륭 회족자치현 광위현의 서남쪽)에서 머물면서 위험한 지형이라 전진하지 못했는데 토번이 천자 부대의 주둔지를 압박해 들어오자, 좌령군장군 흑치상지가 결사대 오백을 거느리고, 토번의 병영을 야습하니 적병이 놀라 서로 밟혀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이에 군대를 끌어 도망갔다. 이에 ()경현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신당서 토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