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4

상 상 2014. 9. 19. 11:44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4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6)

고구려 신라(동쪽)

토번 돌궐(서쪽 및 북쪽)

679

 

(의봉) 42월 임술일토번의 찬보(군주)가 죽어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를 올렸다.(구당서 고종본기)

 

의봉 4(679) 찬보가 죽었다. 그 아들 기노실롱이 자리를 잇고 다시 칭호를 찬보라고 하였다. 이때 나이가 여덟 살이어서, 국정은 다시 ()흠릉(欽陵)에게 위임하였다.

그는 대신 논한조방을 보내 [찬보의] 죽음을 알리고, 화평하기를 청했다. 고종은 낭장 송령문을 토번에 보내 장례에 참가하게 했다. <구당서 토번전>

 

의봉 4(679)에 찬보가 죽자 아들 기노실농이 뒤를 잇고 흠릉(欽陵)이 다시 국정을 맡았는데 대신을 [당에] 보내 초상을 알리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신당서 토번전>

 

(조로원년) 6월 신해일이부시랑 배행검이 서돌궐을 정벌 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9월 임오일이부시랑 배행검이 서쪽으로 돌궐을 토벌하여10개 성()의 가한(임금)인 아사나 도지와 별수(別帥:별도의 장수) 이차복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구당서 고종본기)

 

9월 임오일()행검이 서돌궐을 패배시키고그 가한 도지를 잡았다.(신당서 고종본기)

 

겨울 10선우대도호부의 돌궐() 아사덕 온부와 봉직, 2개의 부()가 잇따라 모반을 일으켜아사나 니숙복를 가한으로 세우니24개 주 수령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선우대도호 장사 소사업을 보내고장군 화대지와 이경가 등이 토벌하였다. 돌궐과 싸움을 하였으나적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사업을 계주로 유배 보냈다. 임자일장군 조회순에게 병사를 인솔하고 긍주로 가서 정형을 지키라고최헌에게 강주로 가서 용문을 지키라고 명하여돌궐에 대비하게 하였다. 계해일토번(에 있는) 문성공주가 그 대신 논새조방을 보내 와서 부고를 알리고화친을 청하였으나불허 하였다. 낭장 송령문을 토번에 사신으로 보내찬보(토번의 임금)의 장례에 참석하게 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10돌궐의 온부와 봉직 2개의 부()가 변경을 침구하여선우대도호부 장사 소사업이 정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조로(調露) 원년(679)에 선우(도호부가) 관내에 있던 돌궐 수령 아사덕온박과 (아사덕)봉직의 두 부락이 비로소 잇달아 반란을 일으켜 (아사나)니숙복을 가한(可汗)으로 옹립하자 24주가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호응했다. 고종은 홍려경 [선우대도호부 장사(長史)] 소사업과 우천우()장군 이경가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도록 했으나 도리어 [아사덕]온박에게 패해 죽은 병사가 만여 인이나 되었다.<구당서 돌궐전>

 

조로 초에 선우[도호]부의 대추(大酋)[아사덕] 온부(溫傅)[아사덕]봉직(奉職)의 두 부락 이 이반해 아사나 니숙복을 가한으로 삼으니 24주의 추장들이 모두 반발해 응수를 했다. 이에 홍려경 선우대도호부 장사(長史) 소사업과 좌령군위장군 원대지, 우천우위장군 이경가(李景嘉)가 토벌을 하려고 했는데, [당군이] 승리만 믿고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가 마침 비와 눈이 내려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지고 오히려 돌궐에게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해 죽거나 잡힌 것이 만여 명이 되자 []대지 등이 나머지 병졸을 거두어 싸워가며 후퇴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사업은 계주(桂州)로 유배되었고, 나머지는 연루되어 면관(免官) 되었다. <신당서 돌궐전>

 

11월 갑진일배행검을 정양도 대총관으로 삼아영주도독 주도무 등 병사 18만과아울러 서군 정무정동군 이문간 등30만으로 돌궐을 토벌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11월 갑진일예부상서 배행검을 정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정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황제가) 조칙을 내려 예부상서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태복소경 이사문과 영주도독 주도무 등을 거느리고 30여 만을 이끌고 (아사덕)온박을 공격하라고 해 크게 격파하자 (아사나)니숙복이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아울러 (아사덕)봉직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구당서 돌궐전: 위 구당서 돌궐전에 이어진 기사임.>

 

다시 예부상서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제수하여, 태복소경 이사문, 영주도독 주도무, 서군(西軍) 정무정, 동군(東軍) 이문간과 군졸 약 30만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자를 잡기 위해 공격[하게]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금오위장군 조회순을 정형[], 우무위[]장군 최헌을 강[]과 용문[]에 주둔하게 했다.

<신당서 돌궐전: 위 신당서 돌궐전에 이어진 기사임>

680

 

(조로)22월 임자일곽왕 ()원궤가 문무백관을 인솔하고일개월 간의 녹봉을 내어 군사 돕기를 청하여돌궐을 토벌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3배행검이 돌궐을 흑산에서 대파하고그 수령 봉직을 사로잡았다. 거짓 가한 (아사나)니숙복이 그의 부하에게 살해 당해머리를 보내고 투항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영륭 원년(680)에 돌궐은 또 힐리(가한의) 종형(從兄)의 아들인 아사나복념을 하주(夏州)에서 맞아들여 ()하를 건너가 가한으로 옹립했는데, 여러 부락이 다시 이에 호응해 따랐다. (황제가) 또 조칙을 내려 배행검에게 장군 조계숙과 정무정 이숭직, 이문간 등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라고 했다. (아사나)복념은 궁박하고 급하게 되자 ()행검에게 가서 항복했다. ()행검이 마침내 (아사나)복념을 사로잡아 경사(서울: 장안)에 보내자 동시(東市)에서 베었다.

<구당서 돌궐전>

 

이듬해(680) []행검이 흑산에서 싸워 [돌궐을] 크게 격파하자 그 부하가 [아사나]니숙복을 죽여 그 머리를 갖고 항복하면서 [아사덕]온부와 [아사덕]봉직마저 잡아 귀순하자 나머지 백성들이 낭산에 숨었다. 아직 돌궐이 평정되지 않았을 때 탈구[:새의 이름]가 울며 떼를 지어 날아 장성 안으로 들어오자 관리가 [이런 징조를 해석해] 말했다. “[이 새들은] 소위 탈구[][만약 이것들이] 남쪽으로 날아오면 돌궐[]이 반드시 온다는 뜻입니다.” 봄이 되어 [새들이] 돌아갔다가 모두 영[]와 하[] 사이에 떨어졌는데 [살펴보니] 모두 머리가 없었고, [이런 징조와 맞아 떨어져 아사나]니숙[]이 과연 패망했다. 낭산에 있던 백성들이 운주를 약탈하자 도독 두회철과 우령군중랑장 정무정이 쫓아냈다. 영융 년간에 [아사덕]온부의 부락 [사람들]이 다시 힐리[가한] 족속의 아들인 [아사나]복념(阿史那伏念)을 하주(夏州)에서 맞아들여 황하를 건너 도망가서 추대해 가한으로 삼자 여러 부락이 호응했다.<신당서 돌궐전>

 

가을 7토번이 하원에 침구하여양비천에 주둔하였다. 하서 진무대사 이경현과 토번 장군 찬파가 황중에서 싸웠으나관군(당나라군)이 패배하였다. 그때 좌무위장군 흑치상지가 온 힘을 다하여 싸워토번군을 대파해마침내 하원군 경략대사에 발탁되어이경현에게 선주(鄯州)를 진압하라고 명하고지원하였다.

이달에돌궐의 나머지 무리가 운주를 포위하여중랑장 정무정이 격파하였다.(구당서 고종본기)

 

(영륭원년) 7월 기묘일토번이 하원을 침구하였다. 신사일이경현이 토번과 황천에서 싸웠으나패배하였다. 좌무위장군 흑치상지를 하원군 경략대사로 삼았다.

병신일돌궐이 운주를 침구하여도독 두회철이 패배시켰다.(신당서 고종본기)

 

그 이듬해(680) 찬파(贊婆)와 소화귀가 군대 3만을 이끌고 하원(河源)을 공격하고 양비천(良非川)에 주둔하니, ()경현(敬玄)이 이들과 황천(湟川: 청해성 서녕 부근의 황수)에서 교전했으나 대패했다. 좌무위장군 흑치상지가 정예병 3천으로 토번의 군영을 야습하니 찬파가 두려워하여 철군했다. 이에 흑치상지를 하원군경략대사로 삼았다. 이에 더욱 엄히 경계를 서고 둔전을 개간하니 토번의 모략이 점차 꺾였다. 당초 검남(劍南: 대개 오늘날의 사천성)을 지나 무주(茂州: 사천성 무현 일대)의 서쪽에 안융성(安戎城: 사천성 무현의 서남에 위치)을 쌓아 토번의 변경을 위협하려 했다. 갑자기 생강(生羌)이 토번을 인도하여 이를 빼앗고 지키니 이로 인하여 서이하(西洱河: 운남성 대리의 서쪽 하원현에서 발원하여 양비강과 합류)의 여러 오랑캐를 병탐하고 양동(羊同)과 당항(党項)의 여러 강족을 모두 신하로 삼았다. 그 땅은 동쪽으로는 송주(), 무주(), 휴주()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4()을 취하고 북쪽으로는 돌궐에 이르러 그 넓이가 만여 리에 이르니 그 강성함은 한()과 위() 때의 여러 ()() 중에도 없는 바였다.

 

영륭 원년(680) 문성공주가 죽자 사자를 보내 조문하게 했고 토번은 우리나라(당나라) 진행언(陳行焉)의 유해를 돌려보냈다. 당초 ()행언은 토번에 사신으로 갔다가 논흠릉이 자신에게 절하게 하려고 군대를 열병시켜 위협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아 10년 간 억류되었다. 이때 유해가 돌아오자 목주자사에 추증했다. 찬파(贊婆)가 다시 양비천에 침입하자, 흑치상지가 이를 격퇴하여 쫓아버렸다.<이상 신당서 토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