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2

상 상 2014. 9. 15. 17:22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22

 

차례

1) 구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2) 신당서 고종 본기(668~고종 사망까지)

3)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668~문무왕 사망까지)

4) 연표(668~고종 사망까지)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

6) 동서 요약 연표

7) 동서 요약 연표 해설

8) 요약

9) 안동도호부가 옮겨지는 까닭

10) 신라와 당나라 전쟁의 결말

 

 

 

5) 동서 양쪽으로 분리한 연표(4)

고구려 신라(동쪽)

토번 돌궐(서쪽 및 북쪽)

 

 

 

 

675

 

(상원)2년 봄 정월 병인일우전(于闐)으로 비사도독부를 만들고울지복도웅을 비사도독으로 삼아그 경내를 10개 주로 나누었는데(울지)복도웅으로 하여금 토번을 공격한 공이 예전에 있었다. 신미일토번이 그 대신 론토혼미를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였으나불허 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상원 2년 정월 신미일토번이 화의를 청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상원 2(675), [토번에서] 대신 논토혼미를 보내 화해할 것을 청했으며 또한 토욕혼과도 수호할 것을 청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신당서 토번전)

상원22계림도 행군대총관(유인궤)이 신라의 무리를 칠중성에서 대파하여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지방물건을 바치고사죄하니용서하고다시 그 왕 김법민(문무왕)에게 벼슬과 작위를 주었다.(구당서 고종 본기)

 

2유인궤와 신라가 칠중성에서 싸워패배시켰다.(신당서 고종본기)

 

상원 22월에 []인궤가 칠중성에서 그들(신라 군사)을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공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오랑캐(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법민(문무왕)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를 하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 ()인문 또한 [신라에서] 돌아와 왕위를 내놓으므로, 조서로 ()법민(문무왕)의 관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부까지 점령하였다.

상주· 양주(良州강주· 웅주· 전주· 무주· 한주· 삭주· 명주)9()를 설치하고, ()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 내지 20()을 통솔하게 하였다. ()에는 태수를, ()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신당서 동이열전 신라편)

 

(문무왕)15(675)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케 하였다. 그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사죄하니 황제가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김인문은 중간에서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백제 땅을 많이 빼앗아 드디어 고구려 남쪽 경계지역에 이르기까지를 주와 군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침략해 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군사[九軍]를 내어 그것에 대비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본기)

 

 

4월 신사일천후(天后:측천무후)가 주왕 ()현의 왕비 조씨를 죽였다. 기해일천후(天后: 측천무후)가 황태자를 죽였다.(신당서 고종본기)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당한 것을 이용하여 풍훈을 이끌어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의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4백 명을 목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전마(戰馬) 1천 필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30,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의 병기도 이만큼 되었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침입하여 노략질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소수(小守)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에워싸 멸하였다.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대항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다시 석현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는데,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열여덟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모두 이겨서 6,047명을 목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이상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676

(상원)32월 갑술일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다.(구당서 고종본기)

 

 

3월 기사일-초하루토번이 선주곽주하주방주 등 4개 주()를 침략하였다. 을유일낙주목(洛州牧)이며 주왕(周王) ()현을 조주도 행군원수로 삼고공부상서 유심례 등 12명의 총관을 거느리며병주도독이며상왕(相王) ()륜을 양주도 행군원수로 삼고좌위장군 계필하력 등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여토번을 토벌하였다. 두 왕은 결국 가지 않았다.(구당서 고종본기)

 

의봉 원년 윤3월 기사일토번이 선주곽주하주방주 등 4개 주()를 침구하여좌감문위중랑장 영호지통이 토벌하였다. 을유일주왕(周王) ()현을 조하도 행군원수로 삼아좌위대장군 유심례 등 12총관을 거느리며상왕(相王) ()륜을 양주도 행군원수로 삼아계필하력 등의 군을 거느리고토번을 토벌하였다.(신당서 고종본기)

 

상원 3(676) (토번이) 선주(鄯州: 청해성 서녕시 낙도현), 곽주(廓州: 서녕시 남쪽 180) 등지를 침범하여, 백성과 관리를 죽이고 노략질하니, 고종은 상서좌복야 유인궤에게 명하여, 조하군(洮河軍: 감숙성 임담현 부근)에 가서 진을 치고 지켜서 그를 막게 했다. (구당서 토번전)

 

그 이듬해(의봉 원년, 676) (토번이) 선주(鄯州: 청해성 서녕), 곽주(廓州: 청해성 귀덕현 동쪽), 하주(河州: 감숙성 임하현), 방주(芳州: 감숙성 임담현 남쪽) 4주를 공격하여 관리를 죽이고 말과 소 만여 필을 노략질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주왕(周王) ()(: 후에 중종에 즉위)을 조주도행군원수로 삼아, 공부상서 유심례 등 12총관을 거느리게 했다. 상왕(相王) ()(: 후에 예종이 됨)을 양주도행군원수로 삼고 좌위대장군 계필하력, 홍려경 소사업 등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했다. 두 왕은 출정하지 않았다. 토번이 첩주(疊州: 감숙성 임담현 남쪽)로 진격하여 밀공, 단령 등 2()을 격파하고 다시 부주(扶州: 감숙성 문현 서북)를 공격하여 그곳을 지키던 장수를 격파했다. 이에 상서좌복야 유인궤를 조하진수사(洮河鎮守使)로 삼았으나 오랫동안 전공이 없었다.<신당서 토번전>

가을 7월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해 와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

 

 

8월 을미일토번이 첩주(疊州)를 침구하였다. (구당서 고종본기)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